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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살타네 공주. 콧수염이 미의 기준이었던 100년 전 카자르 왕국의 미녀 공주

by 사탐과탐 2021.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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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페르시아 지역의 카자르 왕국에는 당대 최고의 미녀 살타네 공주가 있었습니다.
당시 미의 기준은 몸매가 풍만하고 눈썹은 짙고 두껍고 콧수염이 있어야 미인이었는데 살타네 공주는 완벽했던 것이죠.
그녀는 단순한 미녀가 아닌 여러가지 대단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시대에 따라 미인의 기준은 항상 달랐습니다.

고려시대 때와 조선시대 때도 달랐고 조선시대와 현재의 미인의 기준도 달랐죠.

또한 한국과 다른 나라와의 미인의 기준 역시 다릅니다.

 

오늘 이야기할 이 미녀는 현대 미녀의 기준과는 좀 많이 다른데요.

현재의 미녀라고 할 수 있는 여성들이 당시 페르시아에서 태어났다면 엄청 못생긴 여자가 되었을 수도 있죠.

어쨌든 19세기 페르시아에는 전설의 미녀나 천상의 미인이라고 불렸을 정도의 굉장한 미녀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당시 페르시아의 최고의 미녀였기에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청혼을 했지만 그녀는 거절했고 이 때문에 절망에 빠진 13명의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을 정도였죠.

그녀는 도대체 얼마나 미녀였길래 이 사달이 날 정도였을까요?

 

(살타네 공주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녀는 1883년에 카자르 왕국에서 태어난 공주였습니다.

카자르 왕국은 현재 이란 지역에 있던 왕국으로 수도는 '테헤란' 이었는데요.

그녀의 이름은 '카자르 카놈 타지 에스 살타네' 로 카자르 왕조의 '나시르 앗딘 샤' 라는 왕의 11남 11녀 중 8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굉장히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가지고 있고 작고 통통한 스타일이었죠.

그리고 좀 독특한 점은 바로 그녀에겐 남자들에게 있던 수염이 있다는 것입니다.

 

19세기 페르시아인들은 남자가 안았을 때 팔이 서로 닿지 않도록 몸매가 둥글며 볼륨이 있고 얼굴은 둥글 넓적하며 눈썹은 짙고 두꺼울수록 그리고 수염을 기른 여자를 미인이라고 생각했죠.

페르시아의 왕 또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무수히 많은 후궁을 두었었는데요.

후궁들 역시 둥근 몸매에 짙고 두꺼운 눈썹과 수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최고로 아름다운 여성들이 왕의 후궁이 되었던 셈이죠.

 

(살타네 공주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아무튼 살타네 공주는 이 모든 조건을 갖춘 최고의 미녀였고 심지어 얼굴도 예쁜데 신분 또한 공주였기에 페르시아 남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엔 충분했죠.

그렇다 보니 수많은 정치계 유력인사나 돈 많은 부자들 귀족 남자들이 그녀에게 청혼을 했는데 그 수는 무려 '145명' 에 달했습니다.

그 수많은 남자들의 구애를 모두 다 받아줄 수는 없으니 당연히 거절을 했고 이에 살타네 공주에게 거절을 당한 남자들은 실의에 빠져 심한 경우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발생했던 것이죠.

그렇게 죽은 남자는 무려 13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정도로 치명적이게 아름다웠던 그녀의 외모는 많은 예술가들의 뮤즈가 되어 큰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요.

당시 최고의 시인이던 '아리프 카즈빈' 또한 그녀를 뮤즈로 삼아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녀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국방부 장관의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당시 페르시아의 금기를 깨고 이후 남편과 이혼을 하게 되었죠.

 

그녀는 왕실에서 이혼을 한 최초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페르시아의 그 누구보다 진취적인 신 여성이었죠.

그녀의 아버지였던 '나시르 앗딘 샤' 는 페르시아 최초로 서양문물을 도입하는 등 개혁에 힘썼지만, 그것들은 남자들과 일부 왕족 여성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기에 그녀는 당시 페르시아의 여성의 권리를 위해 수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시르 왕과 살타네 공주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녀는 당시 이슬람 사회에서 강요했던 복장이자 여성 억압의 상징인 히잡을 벗어던져 버렸고 서양식 의복을 입었던 최초의 페르시아 여성이었죠.

실제로 아버지였던 페르시아의 왕은 1873년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 황제의 초청을 받고 러시아로 간 적이 있는데요.

그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공연을 보고 난 후 발레에 푹 빠졌었습니다.

그 영향에서 인지 온몸을 감추고 있던 복장을 벗어던지고 그녀 또한 발레복을 입기도 했죠.

 

또한 살타네 공주는 작가, 화가, 사회운동가 등 수많은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스어나 아랍어에도 능통했던 당시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란의 지하 여성 인권 단체인 '여성자유협회'의 창립 회원이기도 했는데요.

이후 여성 인권에 대한 문제를 의회로 가져가 여성인권 신장을 위한 헌법 개정을 지지하기도 했었죠.

 

살타네 공주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딸이던 투란 둘레와 함께 살았으며 말년에는 손녀를 교육시키며 보내다 1936년 1월 25일 53세의 나이로 많은 사람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기준으로 따지면 그녀의 외모는 미인의 기준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녀의 내면의 아름다움은 현재의 기준으로 따져도 굉장히 미인인 것 같네요.

당시 페르시아에서 최고의 외모와 최고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졌던 살타네 공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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