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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최초의 여자교황 요한나. 교황이 즉위하기 전 반드시 남자의 '그것'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던 이유

by 사탐과탐 2021.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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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경에 여자 교황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요한나로 여자임을 숨기고 교황으로 즉위하게 되었죠.
그녀 이후로 교황 즉위식 전에 반드시 확인하는 절차가 생겨났다고 하는데요.

 

 

'콘클라베' 라고 아시나요?

'열쇠로 걸어 잠글 수 있는 방' 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인데요.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사망하면 추기경들의 투표에 의해 다음 교황을 선출하죠.

전 세계의 추기경들을 성당의 큰 방에 모두 모아놓고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선거를 했습니다.

외부와 차단된 방에는 빵과 포도주, 물만을 받은 채 선거를 진행하고 투표 인원의 3분의 2 이상을 받은 교황이 나올 때까지 투표는 끝나지 않죠.

 

이렇게 교황이 뽑힐 때까지 투표하는 끝장 선거를 바로 '콘클라베' 라고 합니다.

선거 방식이 이렇다 보니 1268년 클레멘스 4세 교황이 선종 후에 다음 교황을 뽑는 선거에서는 무려 2년 9개월이나 걸린 1271년에야 비로소 교황이 선출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아무튼 콘클라베를 거쳐 선출된 새 교황은 일종의 신체검사 비슷한 것을 받는데 그건 바로 남자가 확실한지 확인한 것이었죠.

남자인지 확인한 방법은 일명 '성별 감별 의자' 라고 불리는 밑이 뚫린 의자에 앉아서 남성의 그것이 있는지 확인을 한 것인데요.

 

바로 하위직 성직자 중 한 사람이 의자 밑 뚫린 부분으로 직접 손을 넣어 새로 선출된 교황의 고환을 만져보고 확인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남자임이 확인되면 고환을 만진 사람이 큰소리로 "그에게 고환이 달려있습니다!!" 라고 외치면 모든 성직자들이 "주여.. 찬미 받으소서" 라고 화답했다고 하죠.

 

이런식으로 반드시 남자임을 증명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런 기괴한 과정을 거쳐야 했을까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 이유는 9세기 중반 레오 4세 교황의 뒤를 이은 교황이 바로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다는 전설 때문이었죠.

최초의 여자교황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일명 '교황 요한나'라고 불렸던 인물입니다.

여성인권이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장된 지금은 여자 교황이 나타난다 해서 별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당시에는 교황이 여자라고 한다면 많이 시끄러웠을 것 같긴 하네요.

 

아무튼 최초로 교황이 된 여인의 이름은 '요한네스 앙글리쿠스' 라고 합니다.

요한나는 요한의 여성형 표현인데요.

아마도 그녀는 '잉글랜드 출신 남자 요한' 으로 행세하고 다녔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죠.

그렇게 남자 행세를 하면서 그녀는 아테네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학문과 지식을 쌓았고 이후 로마로 가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죠.

 

그녀의 훌륭한 인품과 지식으로 많은 학생들과 추종자들이 요한나를 스승으로써 존경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지지 속에 주교와 대주교, 추기경을 거쳐 결국 만장일치로 교황까지 선출된 것이었죠.

그런데 교황이 된 이후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요한나는 임신을 하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교황의 법복 덕분에 임신한 사실을 숨길 수는 있었지만 어느 날 교황의 궁인 라테라노 궁전으로 향하던 중 길에서 양수가 터져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그렇게 길에서 아이를 낳아 버렸죠.

여태껏 존경해 마지않던 교황님이 여자였다는 걸 알아차린 군중들은 배신감에 휩싸여 요한나와 아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렇게 말릴새도 없이 요한나와 아이는 구타당해 죽었다고 하죠.

그 후로 가톨릭에서는 요한나를 악녀로 칭한다고 합니다.

 

또한 이 이후로 여자 교황 요한나가 아이를 낳은 이 길은 교황들이 피해 간다고 하죠.

이 이야기가 바로 여교황 요한나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이 이야기 외에도 수많은 문헌에서 살짝 다른 버전의 여자 교황 요한나를 다룬 기록은 여러 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1265년에 마르티니란 인물이 저술한 <교황과 황제들의 연대기> 라는 책에도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많은 복사본이 유럽에 퍼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죠.

이렇게 여자 교황이 있었고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실 그렇게 신뢰도가 높지는 않다고 합니다.

 

그 이외에도 여러 교황에 대한 서적들이 출간되었고 거기에는 9세기에 요한나라는 여성이 남자인척하고 약 2년간 교황으로 지내다 재임 중에 출산을 했다는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죠.

 

기록은 다 천차만별인데요.

여자교황 요한나가 낳은 아들이 길에서 태어나자마자 맞아 죽었다는 기록은 없고 나중에 장성해서 오스티아 주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요한나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여자임이 발각된 후 맞아 죽은게 아니라 이후 수녀원에 들어가 살았다고 하는 등 여러 버전이 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어떤 기록에는 여자임을 들키자마자 죽임을 당했고 그 죽임 당한 길 밑에 암매장 당해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한 '장 드 메일리' 라는 사람이 쓴 <보편적인 메츠 이야기>에는 요한나가 말을 타고 가다가 말 위에서 아이를 낳았고 교황이 여자란 사실을 알게 된 군중들에 의해 말 꼬리에 두 발이 묶인 채 끌려다니며 돌에 맞아 사망했으며 사제들은 자신이 모시던 교황이 여자였다는 사실과 심지어 그녀가 출산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4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고 기록되어 있죠.

 

아무튼 여자교황 요한나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었고 종교개혁 이전인 15세기 초반 '콘스탄츠 공의회' 에서도 여자교황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는걸 보면 실제로 존재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가톨릭 내에서도 일부 성직자들은 여자교황을 인정하기도 했다고 하죠.

 

거기다가 '마리오 에퀴콜라' 라는인물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여자를 교황에 자리에 오르도록 허락하신 거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여자교황에 대한 문제가 가톨릭 내부에서 갈등을 조장하자 1601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요한나 라는 여자교황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선언했고 시에나 성당에 있던 여교황 흉상을 부숴버리라고 명령했죠.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기록에 의하면 일단 요한나가 교황으로 재위했다고 추정되는 9세기의 기록에는 요한나의 전임인 교황 레오 4세, 그리고 후임인 베네딕토 3세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요한나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하죠.

 

게다가 레오 4세가 855년 7월 17일 선종했고 베네딕토 3세는 그해 9월 29일에 교황에 즉위했다는 기록을 봐도 그녀가 2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교황 생활을 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있지도 않았고 별로 쓸모도 없을법한 이런 전설이 생겼을까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유는 바로 교황과 교회의 타락을 조롱하기 위해 그리고 타락한 교황과 그의 내연녀를 비꼬기 위해서 당시 사람들에 의해 여러 버전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교황 세르지오 3세의 첩은 매춘부 '마로치아' 라는 여자였는데요.

그녀가 교회와 가톨릭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여교황' 이라며 비꼬았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여자교황 요한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죠.

 

또한 앞서 말했던 '성별 감정 의자' 또한 이 전설에 힘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문건이나 기록에서 많이 나오고 가톨릭에서도 여자 교황 흉상을 많이 만들기도 했으며 그림도 그린 것을 보면 아주 없었던 일은 아닐 수도 있죠.

요한나의 재위 기록은 나중에 지워버리고 고쳐버리면 그만이었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확실히 여자교황 요한나가 존재했다는 증거도 없기도 하죠.

 

그런데 중세시대 타락한 수많은 교황들에 비하면 여자교황 요한나는 어쩌면 더 훌륭한 교황이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현대로 생각하면 여자 교황이라고 하면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닐 것 같습니다.

어쩌면 존재했을 수도 있는 최초의 여자교황 요한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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