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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이건.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 됐어야 했던 황족 출신 친일파

by 사탐과탐 2024.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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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인명 사전에까지 등재될 뻔한 대한제국 황족 출신 친일파 이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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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황손 중 한 명인 이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의 삶은 일제강점기 시기와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한민족의 정체성과 개인의 생존이라는 두 가치가 충돌했을 텐데요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지금부터 확인해 보시죠

 

이건은 1909년 10월 28일,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탄생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순간과 맞물렸는데요

이듬해인 1910년,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죠

 

이건의 본관은 전주이며, 첫 이름은 '용길'이었습니다

이후 1924년에 '건'으로 개명했죠

 

이건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의친왕은 둘째 아들 이우는 무척 총애했지만, 이건을 노골적으로 미워했다고 합니다

이해경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의친왕은 술에 취하면

이건에게 일본으로 가서 살라고 화를 내곤 했다네요

 

이런 가정환경은 이건의 성격 형성과 훗날의 선택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되죠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와 소외감이

그가 친일 행보를 보이게 된 계기가 됐을 거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건은 그 당시 대한제국의 다른 황족들처럼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었죠

1916년 경성유치원을 졸업하고, 1917년 일출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21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학습원 초등과에 입학한 후 1923년에 졸업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3년 후에 이건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42기생으로 예과에 입교합니다

1926년 12월 1일 일본 황실령으로 제정된 '왕공가궤범'에 왕, 왕세자, 왕세손, 공이

만 18세가 되면 육군이나 해군 무관으로 임관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이후 이건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1938년에는 육군대학교를 졸업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습니다

계속해서 승진을 거듭한 이건은 일본제국 육군의 중좌 계급까지 올랐습니다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매우 드문 경력이었죠

이건의 군 경력은 보시는 바와 같이 매우 화려했습니다

 

1931년에는 일본 여성인 마츠다이라 요시코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영친왕 이은의 부인인 이방자의 이종 사촌 여동생이었습니다

이건은 친일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의 대표적인 망언인 "일본 황실의 태도에는 따뜻한 맛이 있는데

한국 황실에는 냉담함만이 있다"라는 말도 있었죠

또한 1945년 8월 12일 황족 회의에서 일본제국 천황인 쇼와 덴노를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당시 스포츠카 매니아로 유명했는데요

영국제 스포츠카인 Alvis speed 20,

미국의 Pierce-Arrow의 대형 리무진 등

많은 고급 차량을 소유했죠

이는 당시 일반 조선인들의 고통스러운 삶과는 완전히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계기로 1970년대 후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일본클래식자동차클럽(CCJC)의 회장으로 재직했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아무튼 일제강점기 시기에 이건의 삶은 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가 일제의 압박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당시 왕공족들은 일본에 의해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었고

그들의 선택권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후의 행적들까지 들여다보면

누가 봐도 이건이 단순히 생존을 위해 협력한 것을 넘어

스스로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욕을 바가지로 먹는 것인데요

나라가 망해가는 마당에 그의 사치스러운 취미 생활과

일본 군대에서의 승진은 단순한 강요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결국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이건의 삶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1947년 신적강하로 왕공족 제도가 폐지되면서

평민이 된 그는 '모모야마 켄이치'라는 이름으로 개명합니다

 

조선땅으로 돌아가면 득 될 게 없다고 판단한 건지

봉변당할까 두려웠던 건지 본인 스스로 일본인으로 살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이건과 그의 가족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시부야에서 단팥죽과 산양젖을 팔거나

긴자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는 등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했죠

일본 패망 전 까지는 특권층으로 영원히 천수를 누릴 줄 알았겠지만

패망 이후 순식간에 몰락해 버렸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함을 느꼈다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한편 남자를 엄청나게 밝혔던 아내 요시코와는 반대로 이건은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요시코가 긴자의 클럽에 취업한 것에 불만이 엄청 많았다고 하며 서로 자주 싸웠다고 하네요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장남 타다히사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닌 게 드러나면서

결국 1951년에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죠

 

그러고는 다음 해에 마에다 요시코와 재혼했습니다

그러다가 1955년에 이건은 창씨개명을 한 것도 모자라 아예 일본으로 귀화해 버렸죠

이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행동이었습니다

 

해방 후 잠시 한국에 왔을 때 이건은 이복동생들에게

"조선 왕족의 후예라는 것을 내세우지 말고 살라"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이 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건 스스로 일본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이건의 이러한 선택은 그의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아들 모모야마 코우야는 "아버지의 출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으며

전주 이 씨 왕실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아마도 이건은 자녀와 주변인들에게 철저히

본인이 대한제국의 황족이었던 걸 숨기고 살았던 거 같습니다

 

이건이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친일 논란이 있었지만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대한제국의 왕공족을 포함시킬지 말지에 대한 논란이 상당했다고 합니다

결국에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매국행위를 일삼은 왕공족만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고

영친왕 이은과 이건, 그의 이복동생 이우는 수록되지 않았죠

 

다만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이건은 광복 이후

곧바로 모모야마 켄이치로 개명해 버리고

일본으로 귀화까지 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일본으로 볼모로 끌려갔던 이복동생 이우는

일본을 극도로 싫어하며 본인 나름대로 항일 행동을 했던 것에 비해

이건은 조국을 등지고 자기 안위만을 생각한 채

일본 편에 섰기 때문에 더욱 욕을 얻어먹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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