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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청연, 청선공주.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의 딸들, 정조가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했던 여동생들

by 사탐과탐 202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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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자 사도세자의 딸들, 정조가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했던 여동생들
청연, 청선공주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왕실의 화려함 속에는 때로 잊혀지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의 딸이자 정조의 친여동생이었던 청연공주와 청선공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녀들은 사실 살아생전 공주 칭호를 받지 못해 청연군주와 청선군주로 불렸었는데요

사도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채 세자 신분으로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정2품에 해당하는 군주로 불렸던 겁니다

훗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사도세자를 장조로 혜경궁 홍씨를 헌경왕후로 추존하게 되면서 청연군주와 청선군주도 공주신분을 부여받게 되었죠

 

청연공주는 1754년 7월 14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탄생은 영조에게 큰 기쁨이었죠

 

"백여 년 만에 군주가 태어나니 귀하다"

라고 했을 정도로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는 숙종과 경종, 영조 대에 걸쳐 왕실에서 공주가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청연의 탄생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출산 예정일을 한 달이나 넘기게 되면서 그녀의 어머니인 한산부부인 이씨가 50여 일이나 대궐에 머물며 출산을 도왔죠

 

청선공주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756년 윤9월에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청선공주 역시 언니와 마찬가지로 태어나기까지 순탄치 않았다고 하는데요

 

혜경궁 홍씨는 임신 중 모친 상을 치르느라 고기반찬을 먹지 못하는 통에 몸이 좋지 않았고 게다가 사도세자의 실수로 창경궁 낙선당에 불이 나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필 원손인 어린 정조가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

임신한 몸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급히 정조의 처소로 뛰어들어가

잠든 정조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두 공주는 태어나기 전부터 여러 고난을 겪었는데

그들의 어린시절도 왕실의 비극과 맞물려 있었죠

 

특히 청선공주가 태어난 이듬해인 1757년, 사도세자를 매우 아껴주던 할머니인 인원왕후와 어머니 정성왕후가 한 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왕실은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1762년에 일어난 임오화변이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이 사건으로 인해, 두 공주를 포함한 가족들은 모두 궁을 나와야 했죠

당시 청연은 9살, 청선은 7살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두 공주의 어린 시절은 왕실의 영광과 비극이 동시에 교차했었던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그녀들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그녀들의 삶은 큰 변화를 맞이하는데요

시간이 흐르면서 할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가족들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청연공주는 12살이 되던 1765년에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은 김상익의 아들 김기성이었습니다

당시 왕실의 관습에 따라 세 번의 간택 과정을 거쳐 신랑이 결정되었죠

 

청선공주 역시 이듬해인 1766년, 11살의 나이에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은 정인환의 아들 정재화였죠

청선공주의 혼례 역시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습니다

 

두 공주의 혼인은 왕실의 품위를 지키면서도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요

그녀들의 남편들은 모두 양반 가문 출신으로 혼인을 통해 '부마'라는 지위를 얻게 되었죠

그렇게 김기성은 광은위에, 정재화는 흥은부위에 각각 봉해졌습니다

 

그러나 두 공주의 혼인 생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청선공주의 남편 정재화는 세손이었던 처남 정조와 여러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데요

'한중록'에 따르면 정재화는 "용모와 행동이 아름다웠으나" 나중에는 "빗나가 별감들을 데리고 외입이 무궁하고, 세손 체면을 깎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와 어울리며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켰다는 것을 의미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한 상황은 청선공주에게 많은 스트레스가 되었을텐데 하지만 그녀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살아갔습니다

 

청연공주의 경우 남편 김기성과의 사이에서 7남 2녀를 낳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자녀들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죠

결국 2남 1녀만이 성인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두 공주의 혼인 생활은 조선 시대 왕실 여성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데요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을 하고, 남편의 행실 문제로 고민하며, 많은 자녀를 낳지만 높은 유아 사망률로 인해 고통받는 모습 등은 당시 왕실 여성들이 겪은 보편적인 경험이었을 겁니다

 

한편, 청연공주와 청선공주에게 있어 오빠 정조의 존재는 너무나도 특별했는데요

 

정조는 두 여동생을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죠

이는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혈육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함께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는 공감대가 더 큰 이유였을거 같습니다

 

정조와 두 공주의 관계는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특히 정조가 청선공주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어 그들의 관계를 엿볼 수 있죠

자신은 더위에 앓고 있는데 여동생의 무더위에 안부를 묻는 내용으로 "그 사이 잘 지내느냐, 본지 오래니 섭섭하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정조가 여동생들의 안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두 공주의 궁중 생활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녀들의 문화 활동입니다

1773년에 청연공주와 청선공주는 그 당시 궁녀였던 의빈 성씨와 '곽장양문록'이라는 소설을 필사했습니다.

이는 당시 왕실 여성들의 대표적인 취미 활동이었죠

이 필사 작업에는 후에 정조의 후궁이 되는 의빈 성씨도 참여했는데 이는 당시 궁중 여성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이러한 문학 활동은 궁중 여성들이 단순히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나름의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두 공주는 또한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에도 참여했습니다

이 행사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고 화성을 새로운 도시로 건설하는 것을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였는데요

청연공주의 아들들도 이 행사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왕실 행사에서 두 공주가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죠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청연공주와 청선공주가 단순히 왕실의 구성원으로서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화 활동에 참여하고 가족 간의 유대를 중시하는 인물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두 공주는 각자의 삶을 마감하게 되는데요

동생 청선공주가 1802년에 47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는 오빠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의 일이었죠

청연공주는 세 남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 1821년, 6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두 공주의 죽음은 왕실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죠

특히 조카인 순조는 두 공주의 죽음에 대해 매우 비통해했다고 합니다

순조는 청선공주의 죽음에 대해 "'천붕지통'을 만난 이후로부터 의지하고 앙모하는 정이 더욱 깊었는데 어찌 오늘날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라고 말하며 비통한 심정을 전했죠

(천붕지통(天崩之痛):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이라는 뜻으로, 제왕이나 아버지의 죽음을 당한 슬픔을 이르는 말)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두 공주의 사후, 그녀들의 유물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특히 2019년 6월, 청선공주와 그의 남편 정재화의 유물 1,014점이 수원 화성 박물관에 기증되었죠

이는 조선 왕실 부마의 유물을 대거 기증한 첫 사례로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유물들 중에는 부마의 초상화, 한글 편지, 의복 등 다양한 물건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특히 정재화의 초상화는 조선시대 부마의 초상화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받고 있죠

 

청연공주의 경우, 1923년 경기도 광주 세촌면 암동리에서 그녀와 남편의 합장묘를 이장하던 중 약 200여 점의 복식과 부장품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중 청연공주의 노의는 한국 복식사에서 매우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죠

 

1899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사도세자는 장조의 묘호로 추존되고, 혜경궁 홍씨는 헌경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청연군주와 청선군주도 각각 청연공주와 청선공주로 추증되었죠

 

청연과 청선공주는 비극적인 운명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 큰 시련을 겪었지만 결국 왕실의 중요한 구성원으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특히나 정조가 여동생을 예뻐하고 아꼈던 만큼 청연과 청선공주 또한 정조에게 큰 버팀목이 됐을거 같네요

 

지금까지 조선왕실의 귀여움을 받았고 특히 정조가 매우 아끼고 사랑한 여동생들이었던 청연공주와 청선공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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