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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한낱 양반의 재산에 불과했던 노비들과 그 재산을 지켜준 추노꾼들 이야기

by 사탐과탐 2024.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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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낱 양반의 재산에 불과했던 노비들과 그 재산을 지켜준 추노꾼들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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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선시대 사람을 물건 취급했던 노비 제도의 실체와

정말로 노비 사냥꾼이었던 추노꾼들이 존재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드라마 추노에서 등장했었던 노비들의

이마나 가슴에 새겨진 '노(奴)'자나 '비(婢)'자처럼 낙인을 진짜로 찍었을까요?

 

실제 조선에서는 이런 낙인이 노비의 표식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형태의 낙인은 주로 죄인에게 내리는 형벌 중 하나였었죠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보면,

죄인의 얼굴이나 몸에 먹물로 죄명을 새겨 넣는 형벌이 있었는데요

이를 '자자형'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한 사람 중에서 죄가 무거운 경우에 "도(盜)"자를 새기는 경우가 있었죠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런 사례가 간혹 나오는데

주로 공물을 훔친 사람들에게 이런 형벌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노비와 관련된 낙인은 전혀 없었을까요?

아주 잠깐이지만 있긴 했다고 하는데요

1506년, 연산군 12년에 도망친 노비에게

"도노(逃奴)" 혹은 "도비(逃婢)"를 새기라는 왕명이 내려진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왕명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문신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낙인이 찍히면 평생 지울 수 없었죠

때문에 너무나 가혹한 처사로 여겨지다

결국 1740년 영조 16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노비들은 어떻게 자신의 신분을 증명했을까요?

그리고 주인집 양반들은 누가 자신의 노비인지 어떻게 증명했을까요?

 

그 답은 바로 '종문서'에 있습니다

종문서의 대표적인 예로 노비 매매 계약서가 있는데요

1664년 현종 5년의 기록을 보면, 해남의 대부호 윤선도 집안에서

23세의 젊은 여자 종과 그 딸을 사들인 문서가 남아있습니다

 

그 문서에 따르면, 윤선도 집안에서 애순이라는 종을 보내

포목 2통 반을 주고 그 모녀를 샀다고 하죠

이런 매매 계약서가 바로 노비의 신분을 증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비들은 그 종문서를 항상 가지고 다녀야 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모든 노비가 매매를 통해 얻어진 건 아니었으며 상속받은 노비들도 많았습니다

상속이나 증여를 통해 노비를 얻은 경우에도 문서가 만들어졌어요

1510년 중종 5년의 기록을 보면,

안동에 살던 김연이라는 사람이 생원시에 합격하자

아내의 양아버지가 축하 선물로 종 3명을 줬었는데 그 문서가 남아있죠

노비를 물건 취급했던 조선이었지만

어쨌거나 노비들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도망칠 수도 있고

자신은 노비가 아니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노비와 관련된 공인된 문서를 주고받는 관행이 생겼다고 합니다

 

1480년 성종 11년의 기록을 보면

상속받은 노비 2명에 대한 소유권을 지방관청에서 공증해 준 문서가 남아있습니다

그 문서를 보면 상속에 참여한 사람들이 쓴 사실 확인서를 모두 붙여놓은 모습을 볼 수 있죠

 

게다가 양반들은 3년마다 한 번씩 호적을 작성할 때

자신이 소유한 노비의 명단도 함께 올려 관청에 보고했습니다

김선이라는 양반의 호적을 보면 주인 가족들이 먼저 기록되고

그 뒤로 쭉 노비들의 명단이 이어져 있죠

마치 지금의 각종 계약서로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고 증명하듯이

조선시대 양반들 또한 자신의 노비를 증명하기 위해

꼼꼼히 문서로 남겨 둔 거라 보면 될 거 같네요

 

드라마 '추노'에서는 17세기 초반, 인조 시절에 백성의 절반이 노비 신세였다고 나오는데요

노비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조선시대 그 누구도 없었을 거 같은데

대체 누가 노비가 되었던 것이고 진짜로 그렇게나 많은 백성들이 노비였던 것일까요?

 

노비가 되는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부모가 노비인 경우였습니다

조선시대 세종대왕 때 시작된 노비종모법 때문에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자동으로 노비가 되는 거였죠

노비종모법은 엄마의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되는 제도였는데

아빠가 양인이고 엄마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 아빠가 노비이고

엄마가 양인이면 자식은 양인이 되는 거였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실제로는 부모 중 아무나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 망할 노비종모법 때문에 양반들은 노비 한 명만 있어도

그 자손들을 모두 노비로 삼을 수 있었죠.

노비를 통해 재산을 늘리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겁니다.

그렇게 대를 이어 노비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나서

실제로 조선 인구의 40%~50%가 전부 노비가 되어버렸죠

 

그리고 노비로 태어나지 않고도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첫째, 중죄를 지은 경우였죠

특히 반역죄 같은 아주 심각한 죄를 지으면 노비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드라마 추노에 나오는 송태하 캐릭터가 바로 그런 경우죠

 

실제로 조선시대 법전을 보면 강도의 아내와 자식을 노비로 만든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대전회통'이라는 법전에는 "강도로서 사형되지 않은 자는

강도 글자를 얼굴이나 팔뚝에 새기고 재범한 경우에는 교형에 처한다

강도의 처자는 영원히 관할 지방관아의 노비가 되게 한다"라고 적혀있죠

둘째, 실제로 스스로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극심한 가난 때문이었죠.

 

전쟁이나 흉년으로 인해 생계가 막막해진 백성들 중에는

부잣집에 스스로를 팔아서 목숨을 부지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18세기 후반의 한 기록을 보면, 병든 남편을 돌보며 어렵게 살던 한 여인이

시아버지 장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를 노비로 판 안타까운 사연이 나오기도 하죠

 

심지어 19세기말에는 한 아비가 12살 딸을 노비로 팔아버린 기록도 있습니다

1889년에 이소동이라는 사람이 흉년 때문에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어린 딸을 45냥에 팔았다고 하네요

심지어 그중 6냥은 중개인의 몫이었고 이소동에게 벼 1 섬(약 200kg)과

5냥으로 지급되었다고 하죠

 

자기만 살려고 딸을 팔아넘긴 건지 아니면

딸이라도 살리려고 노비로 판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시대가 어떠했는지 짐작되는 기록입니다

 

그렇게 점점 노비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도망가는 노비들 수 또한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과도한 세금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노비들은 주인에게 매년 일정량의 세금을 바쳐야 했는데 이를 '신공'이라고 불렀죠.

그게 적당하면 될 텐데 감당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무거워서

노비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보이면 주인집에서 도망칠 생각을 하게 되었을 텐데요

그런데 도망가는 것이 결코 쉬운 게 아니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조선시대는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땅을 살 돈도 없이 고향을 떠난다는 건 정말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운 좋게 도망가더라도 언제 주인이 쫓아올지 모르는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죠

지금도 그렇지만 자기 재산이 없어졌는데 넋 놓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관아에 신고하거나 직접 사람을 풀어서 도망간 노비를 찾아내려고 기를 썼을 겁니다

실제로 도망간 노비를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는 기록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노비에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국가 소유의 '공노비'와 개인 소유의 '사노비'로 나누었죠.

공노비가 도망가면 관청에서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고 사노비가 도망가면 주인이 직접 찾아야 했습니다

 

1600년대 중반, 효종 때는 공노비 19만여 명 중

2만 7천여 명만 제대로 세금을 내고 있었죠

그러자 효종은 '추쇄도감'이라는 특별 기구를 만들어 도망간 공노비들을 찾았습니다

 

추쇄도감은 각 지방의 수령들에게 노비 조사를 지시하고 각 도마다 특별 관리를 보내 확인하는 등 철저하게 조사했죠

그 결과 2년 6개월 만에 전국의 공노비 현황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조정 또한 공노비가 중요한 재산이었기 때문에

특별기구까지 만들어 전국을 샅샅이 뒤져서 도망간 공노비를 찾아냈던 거죠

 

그럼 개인이 소유한 사노비를 찾는 일은 어땠을까요?

사노비를 찾는 건 전적으로 주인의 몫이었죠

주인집 양반들은 보통 관아에 신고해서

도망간 노비를 찾아달라고 요청하던지 아니면 추노꾼에게 의뢰했다고 합니다

 

1427년의 기록을 보면 경기도 양주에 살던 장전이라는 사람의 부인 신 씨가

도망간 여노비 4명을 잡기 위해 관아에 도움을 요청한 문서가 남아있습니다

신 씨의 신고를 받은 관찰사는 그 즉시 노비를 잡아오라고 지시했죠

 

이렇게 개인의 재산인 사노비를 찾는데도 관아에서 적극 나선 것은

당시 조선이 양반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양반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게 국가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졌던 거죠

 

드라마 추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추노꾼의 존재였을 텐데요

실제로 조선에서는 추노꾼이 존재했으며 그들을 두고 추노객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서울과 타지방에서 추노객들이 내려와 머물면서

의복, 식량, 솥 등의 물품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섬사람들 모두 집안이 기울고 파산하여 근심하고 원망하는 정경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

이를 보면 추노객이라는 사람들이 존재했었고 이들이 꽤나 횡포를 부렸다는 걸 알 수 있죠

 

하지만 이들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전문 직업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주인이 다른 노비를 시켜 도망간 노비를 잡으러 보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도 추노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 이유는 추노일이 상당한 돈벌이가 됐기 때문인데요

추노일을 다 완수하지도 않았는데 중도에 수행한 값으로

노비 4~5명을 요구했었다는 기록이 있죠

 

그리고 추노한 집안이 비록 수백천금을 얻는다 해도

결국에는 귀속할 곳이 없어지고 자손이 끊어진다는 내용도 있는데요

지금처럼 비정상적으로 모은 돈을 검은돈 취급하듯

그 당시에 추노로 큰 부자가 되더라도 결국에는 저주받아 망한다는 내용이죠

 

이렇듯 노비 제도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제도였습니다

심지어 서양의 노예제도와는 다르게 같은 민족을 대상으로 했던 게 더 큰 충격이죠

하지만 당시에는 이게 당연한 사회 제도로 여겨졌습니다

아무튼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기득권들이

자기 재산을 끔찍하게도 소중히 여기는 건 다 똑같은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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