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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나라가 망한 후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by 사탐과탐 2024.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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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한 이후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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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능했던 대한제국 황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다루려고 합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반전을 노린 그의 계획은 오래가지 못했죠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면서 대한제국은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갔습니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죠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든 간에 멸망한 왕조의 끝은 비참했는데

500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모습 또한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이 씨 왕가는 막대한 재산을 보유했다고 합니다

1910년대부터 1945년까지 이 씨 왕가는

연간 150만 엔에서 180만 엔의 세비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 일반 교사 연봉의 수백 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고 하죠

또한 황실 소유의 토지, 건물, 귀중품 등을 포함하면 그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1945년 해방 당시 이왕가의 재산은

약 500억 원(현재 가치로 약 35조 원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당시 한국 경제 규모를 고려했을 때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그 재산의 출처와 소유권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었죠

일부는 이를 국가 재산으로 보았고, 다른 이들은 황실의 사유 재산으로 간주하기도 했다네요

 

어찌 됐건 그 돈은 모두 조선 백성들의 피와 땀이 섞인 세금이었다는 것이죠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는 1954년 '구황실재산법'을 제정하여

황실의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켰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재산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거나 사라졌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죠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일부 황실 후손들은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일본으로 반출된 황실 문화재였죠

수많은 귀중한 유물들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넘어갔는데

이 중 상당수가 아직도 반환되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전히 한일 간의 외교적 쟁점 중 하나로 남아있죠

 

그렇다면 대한제국이 무너진 후 황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황실이라는 최상위 특권을 누렸던 과거와 달리,

그들의 삶은 비극과 논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고종은 1907년 강제 퇴위 당한 후 덕수궁에서 여생을 보냅니다

그는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가는 모든 과정을 지켜봐야 했죠

특히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이후,

고종은 더욱 엄격한 감시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다가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갑작스럽게 사망해 버리는데요

뜬금없는 고종의 죽음 때문에 그 당시 독살설이 제기되면서 3.1 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죠

고종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모여들었고 금세 자연스럽게 독립만세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순종

 

순종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2대 황제의 자리에 있었지만 사실상 허울뿐인 황제였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그는 '이왕'이라는 호칭을 강요받았고

창덕궁에 갇혀 지내다시피 했습니다

순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 무력감과 자책감에 시달렸다고 하는데요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제2의 3.1 운동으로 볼 수 있는 6.10 만세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은 복잡한 인물입니다

그는 1877년에 태어나 일찍이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컸었죠

1902년에는 그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려는 쿠데타 계획이 있었지만

의친왕 본인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경술국치 이후 의친왕은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되는데요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주색에 빠져 폐인이 된 사람처럼 하고 다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자금을 지원했고, 독립운동가들을 은신시키기도 했습니다

1919년 11월 9일 밤, 변장을 한 뒤 궁을 탈출해서 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하다가

결국에 일제에게 붙잡히기도 했었죠

 

그렇게 그의 노력은 큰 결실을 맺지 못했고 일제의 감시를 피하지 못해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습니다

또한 1940년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할 때도 그는 거절했다고 하죠

 

의친왕은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황실 재산을 국유화시키고

황족들을 철저히 배척하고 냉대했는데 의친왕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피죽도 겨우 먹는 처참한 생활을 하며

70여 살의 병든 몸을 이끌고 부산까지 피난을 떠났다고 하죠

1955년 8월 영양실조 후유증과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79살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의친왕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했던걸 몰랐던 것인지

'이강이 졸했다'라는 매우 짧은 문구만 신문 한쪽 구석에 실려 있었다고 하네요

영친왕
 

영친왕 이은은 고종의 막내아들로 순종에 이어 황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비극적이었죠

1907년, 겨우 10살이던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로 인해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말이 유학이지 인질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운 셈이었죠

 

일제는 그를 철저히 일본식 교육을 시켰고,

결국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 중장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당시 조선 백성 입장에서도 지금의 관점에서도 일본에서 호위호식하며

일본 편에 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행보를 보였죠

 

거기다가 1920년에 영친왕은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 마사코(한국이름 이방자)와 결혼합니다

이는 당사자도 몰랐던 완전 극비리에 진행된 정략결혼이었죠

결국 독립신문에는 영친왕을 비난하는 쌍욕이 도배되었고

독립운동가 서상한은 영친왕 부부를 암살하려고 폭탄까지 준비했다가 발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영친왕 부부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이가 좋았다고 하죠

영친왕 부부는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들의 차별과 고통에 대해 안타까워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지위 때문에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친일 황족이라 불릴 만큼 증오의 대상이었고

이승만 정부에서는 대한제국 황실 호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즉 일본 황족 신분으로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본 국적을 취득한 거로 판단한 거죠

그런데 일본 정부에서도 그를 일본 국적으로 인정하지 않아

졸지에 영친왕과 이방자는 무국적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영친왕은 아내에게 "나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다"라고 통곡하며 고통스러워했다네요

 

결국 그는 일본으로 끌려간 지 약 56년이 지난 1963년이 돼서야

한국 땅을 밝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발로 밟은 게 아니라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상태가 악화되어

혼수상태인 채로 고국으로 돌아왔던 거죠

이후 계속 병치레를 하다 1970년 5월 1일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영친왕과 이방자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는 일본 황족 출신이었지만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던 특별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고 한복을 즐겨 입었으며 한국의 전통문화를 사랑했죠

해방 후 그녀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환영받지 못했지만 끝까지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1963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이방자는 남편 영친왕과

시누이 덕혜옹주를 헌신적으로 돌보며 어려운 삶을 살았는데요

그녀는 장애인 복지사업에 전념했고 자신의 보석을 팔아 고아원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1989년 4월 30일, 이방자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죠

 

덕혜옹주는 고종의 막내딸로,

어떻게 보면 황실 후손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인물입니다

1912년 태어난 그녀는 어린 나이에 다른 황실 후손들처럼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났고

1931년 일본의 대마도 귀족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덕혜옹주는 우울증과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하게 되었죠

거기다가 덕혜옹주의 딸 마사에는 1956년 8월 26일 아침 유서를 남긴 채 사라져 버렸고

실종된 그녀를 계속 수색했지만 결국엔 일본 경찰에서 사망 처리를 했다고 하네요

 

덕혜옹주는 한국을 떠난 지 37년 만인 1962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이미 많이 황폐해진 후였습니다

이방자의 헌신적인 간호 덕분에 조금씩 회복되어 갔지만 완전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는 못했죠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삶은 일제강점기 황실의 비극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덕혜옹주

 

영친왕의 아들 이구는 조선 황실의 마지막 직계 후손입니다

1931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했고,

미국인 여성 줄리아 멀로크와 결혼했습니다

 

1963년 한국으로 돌아온 이구는 건축가로 활동하며 한국의 현대 건축 발전에 기여했죠

하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아내와 별거하는 등 우울한 삶을 살다가

197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러다 1982년에 자녀가 없다는 이유로 종친회에 의해 강제 이혼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원인은 불명확하고 이구의 바람기와 종친들이

한국 여성과 결혼하라고 오랫동안 강요했다는 이야기도 있다네요

 

이후 이구는 한국과 일본, 미국을 오가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2005년 7월 16일 일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조선 황실의 마지막 의식이었고 많은 정치인들이 참석해 주목을 받았었죠

이구의 죽음으로 조선의 황통은 사실상 단절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친왕의 장남인 이건은 대한제국 황실 후손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입니다

1909년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일본으로 강제 유학 간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었죠

그리고 계속해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건은 일본 육군 중좌까지 진급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고국과 연을 끊다시피 살아갔으며 마츠다이라 요시코와 결혼했죠

해방 이후 그는 일본식 이름인 '모모야마 켄이치'로 개명해 버리고

1955년에는 아예 일본으로 귀화까지 해버렸습니다

개인의 선택이니 그렇다고 쳐도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그의 호화로운 생활 스타일이었죠

 

이건은 스포츠카 매니아로 유명했는데, 영국제 스포츠카인 알비스 스피드 20,

미국의 피어스 애로우 대형 리무진 등 값비싼 외제차를 다수 소유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제의 비호 아래 호의호식 했던 것이죠

이건과 그의 아내
 

그는 1970년대부터 사망 시까지 일본 클래식 자동차 클럽의 회장직을 맡았습니다

이는 그가 친일적 성향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죠

이건의 행적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분노와 실망을 안겨주었고

황실 후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 키웠습니다

 

이건의 이복동생 이우는 형과는 상반된 행보를 보였죠

이건은 친일을 넘어 스스로 일본 이름으로 개명해 버리고 결국에는 일본으로 귀화까지 해버렸지만

이우는 어릴 때부터 일본을 극도로 싫어하고 증오했다고 했습니다

일제는 다른 대한제국 황실 후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일본인과 강제로 결혼시키려 했죠

 

그러자 이우는 재빨리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여인이 친일파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였던 것이죠

이우의 아버지 의친왕 또한 일본인과 결혼시킬 바에는 친일파가 낫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하필 친일파 손녀와 결혼했던 것 때문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우는 이후로도 일본에 끌려갈 바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겠다고 고래고래 고함치기도 하는 등

일본 군복을 벗어던지고 가족과 함께 운현궁에서 살고 싶어 했다고 하죠

그러다 1945년에 히로시마로 발령받게 되었고

출근하는 길인 8월 6일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우는 그대로 피폭되어 버렸고 그다음 날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죠

평생을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끝내 보지 못하고 독립하기 직전에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1959년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 버렸는데요

일본이 독단적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이우의 이름을 올려 버린 것이죠

심지어 이우의 장남 이청에게 신사를 방문하라고

초대장까지 보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이우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 황족들이 갖게 된 신분인 왕공족들은 여전히 뜨거운 논란의 대상인데요

이들에 대한 평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첫째, 동정적인 시각입니다

일부에서는 그들을 일제의 강압에 의한 피해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죠

특히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간 영친왕이나 덕혜옹주,

이우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수 있겠네요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비판적인 시각입니다

대다수의 의견은 그들이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고 개인의 안위만을 좇았다는 것인데요

특히 이건과 같은 인물들의 친일 행적은 강하게 비판받고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도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심지어 일본군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 높은 직급까지 오른 것은 용서받기 어렵다는 주장이죠

 

셋째, 중립적인 시각입니다

황실 후손들의 행적을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죠

그들도 결국 시대의 희생양이었으며 개인의 선택보다는

시대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논란이 되는 것은 이들의 친일 행적에 대한 평가인데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황실 후손들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큰 논란이 있었죠

결국 황실 후손들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는 않지만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사실상 그들이 일제에 볼모로 붙잡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한편, 해방 이후 이들의 처우 문제도 논란거리였는데요

이승만 정부는 구 황실 인사들을 냉대했지만

박정희 정부 때부터는 어느 정도 예우를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찬반 의견이 엇갈리죠

역사적 상징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과

무슨 소리냐 친일파와 다름없이 잘 먹고 잘 살았는데

굳이 특별 대우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한제국 황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삶이 화려했든 비참했든 결국에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단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영광스러웠던 과거와 비극적인 몰락, 그리고 논란 가득한 현재까지

그들의 선택과 삶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무게와 개인의 책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들의 행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긴 영상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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