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23전 23승 불패신화를 이뤄내며 멸망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해낸 결정적 이유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질 거 같은 싸움은 절대 하지 않으면서 23전 23승의 불패신화를 이뤄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무패의 신화를 만들어낸 데는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략전술이 가장 큰 역할을 했겠지만 한편으로 그가 이길 수 있을 거 같은 싸움만 선택해서 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오늘은 이순신 장군이 과연 어떤 식으로 정보전을 펼쳤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전쟁에서 수색과 정찰 등의 첩보활동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이지만 막상 그런 첩보활동을 수행하려면 병사들과 지휘관에게 많은 부담이 주어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첩보활동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철저한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이길 수 있는 작전과 전장만을 선택해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적에게는 큰 타격을 입히며 전략적으로 필요한 전투만을 벌였습니다
그 덕분에 해로를 차단해서 왜군 선봉군의 무기와 식량보급에 엄청난 타격을 주면서 왜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고 바닷길을 이용하지 못하는 왜군이 육로로 이어진 보급로에만 의존하게 만들면서 각지의 조선 의병들이 왜군의 보급로를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죠
때문에 이순신의 승리는 단순히 바다에서만 이기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육지에서 싸우는 모든 왜군들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까지 꺾어버리면서 조선이 살아나게 되는 계기를 만든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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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치밀한 정보수집을 통해 단 한 번도 왜군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았다고 하죠
심지어 징비록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습이 있을 것 같으니 준비해라"라고 말하자 얼마 후 진짜로 왜군이 기습해왔다는 일화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순신의 부하 장수들이 그가 귀신이 아닌가 하면서 놀랐다는 기록이 있죠
가끔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길 수 있는 싸움만을 택했다"라는 이유로 이순신을 까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이 말은 오히려 지휘관에게 있어 최고의 칭찬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인데요
전장은 수많은 변수 덕분에 시시각각으로 상황이 바뀌는 곳이며 만약 아군에게 완벽하게 유리한 장소가 있다고 해도 적장이 그런 지형으로 순순히 들어와 전투를 해줄 리도 없습니다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지휘관들은 전란의 시대에서 무수한 전투를 경험했던 베테랑들인데 이런 경험 많은 장수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선택해서 싸움을 걸었다는 것 자체가 이순신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는 것이죠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이순신 장군에게는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첩자들만 최소 7명이 있었는데 피난을 온 사람들에게 단순히 소식을 물어보는 정도가 아닌 전문적으로 첩자일을 하는 사람들을 부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중에는 일본군의 본진인 부산포에 들어가 몇 년 동안이나 내부에서 정보를 빼낸 고정간첩도 2명 있었고 이순신은 이들을 이용해 일본인들에게 고의적으로 정보를 흘리는 역공작을 펼치기도 했죠
이 첩자들은 조정에서 지원해준 인재들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 사적으로 관리하던 자원들이었기 때문에 원균은 이들의 존재에 대해 알지도 못했으며 칠천량 해전 이후 이순신이 복귀한 후에 다시 유용하게 쓰였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순신은 꾸준한 정찰을 통해 현지의 정보를 얻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바다에서는 매우 속도가 빠른 소형 정찰선인 탐망선을 약 110척 정도나 보내 늘 주변 지형과 적진의 상태를 파악했으며 육지에서는 높은 산 정상에 탐망군이라는 정찰병을 계속 보내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고 나서야 전투에 나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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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다른 장수들은 적당히 눈이 좋고 발이 빠른 병사들을 뽑아 정찰을 보냈던 것과 달리 이순신은 척후장과 별망군, 탐망선등 첩보에 특화된 인재들과 부대를 따로 운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피난민들에게서 정보를 수집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죠
가뜩이나 이순신 장군이 다스리는 곳으로 가면 안전하다는 소문이 나며 백성들이 몰려들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쓸만한 첩보를 제공하면 보상까지 많이 준다는 소식을 듣자 적극적으로 이순신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한산도 대첩이 일어나기 전 왜군 함대가 견내량에 있다는 소식을 알려준 김천손이라는 목동이 그 대표적인 증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의 많은 조선군이 왜적을 포로로 잡으면 목을 잘라서 전공을 세우려 했던 것과 다르게 이순신은 그 포로들에게서 정보를 캐내는데 집중했다고 하는데요
때문에 부하 장수들이 왜군의 목을 베오는 것보다 산채로 잡아오는 것을 더 높게 쳐줬다고 합니다
광양현감 어영담은 업무능력이 다소 떨어져서 평생을 남해안 일대의 외관직만 하며 떠돌아다니던 관료였죠
하지만 어영담에게는 누구보다 뛰어난 장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길을 거의 다 외워버린 인간 GPS였다는 것인데요
이순신은 그런 어영담을 정보장교로 채용해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길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조선수군의 길잡이로 이용했습니다
이순신은 평소 부정을 저지르거나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에게는 칼같이 벌을 줬지만 어영담이 약간의 부정을 저지르거나 일을 제대로 못했을 때는 눈감아주기도 하는 등 필요할 때는 융통성을 발휘할 줄도 아는 모습을 보여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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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유연한 모습을 보인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제대로 된 정보를 받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나라군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내야만 했는데 당시 명나라의 장수들은 진린처럼 이순신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 소수를 제외하면 조선군을 자신들보다 아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매우 거만한 태도를 보였죠
이순신은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잠시 자존심을 내려놓고 없는 살림에 연회까지 베풀어주며 명나라 장수들의 비위를 맞춰줬습니다
명나라의 장수들은 술에 취해 온갖 허세를 부리며 쓸모없는 소리만 해댔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쓸만한 정보를 얘기할 때도 있었기 때문에 조정으로부터 아무 지원을 받을 수 없던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에게서 정보를 캐낸 것이죠
그렇게 이순신은 전쟁 내내 원균과 조선 조정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 상황에서도 온갖 노력을 통해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싸우면서 23전 전승의 믿기 힘든 무패 신화를 세우며 멸망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해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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