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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김응서. 평양의 논개라고 불리는 기생 계월향의 도움을 받아 적진에 침투해 왜장의 목을 베면서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장수

by 사탐과탐 2022.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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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논개라고 불리는 기생 계월향의 도움을 받아 적진에 침투해 왜장의 목을 베면서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운 김응서장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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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평양성에서 무려 4차례나 전투가 있었다는 걸 알고 계시나요?

1592년 6월 1차 전투에서 평양성을 왜군에게 빼앗긴 조선군은 2차와 3차 전투에서도 연이은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조선군은 4번째로 벌어진 전투에서 마침내 승리하며 6개월 만에 평양성을 다시 탈환하게 되죠 

이 과정에서 평양의 논개라고 불리는 기생 계월향의 도움을 받아 왜장의 목을 베면서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첩보전의 대가 김응서 장군이죠

김응서는 대체 어떤 작전을 세웠길래 왜군들이 가득한 성안에 들어가서 적장의 목을 벨 수 있었던 것일까요? 

 

김응서 장군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해 1588년에 감찰직에 올랐지만 그의 집안이 보잘것없다는 황당한 이유로 파직을 당하게 되죠 

그러다 1592년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관직에 오르게 됩니다

왜군들이 밀려오자 왕인 선조는 수도인 한양에서 도망을 쳐서 개성을 지나 평양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6월이 되자 왜군의 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성 바로 앞 대동강까지 진격해왔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선조는 평양성에서 도망가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주변의 병사들과 백성들을 소집했죠

하지만 선조는 한양을 되찾으러 올라오던 조선군이 용인 전투에서 왜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의주까지 빤스런을 해버립니다

 

선조의 말을 믿고 평양성에 다시 모였던 백성들은 왕이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걸 알고 분통을 터뜨렸죠

그렇게 왕은 도망가면서 신하들에게 수비를 떠넘겼고 명을 받은 신하들은 남아서 성을 지키게 됩니다

남은 신하들은 어쩔 수 없이 수비를 하게 된 입장이기는 했지만 왜군이 가까이 다가오자 대동강을 건너서 선제 기습을 시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는데요

 

아쉽게도 기습 자체는 성공했지만 후방에 남겨둔 군량(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지키지 못하며 결과적으로는 전투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패배한 병사들이 평양성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큰 문제가 생기게 되죠

대동강에는 수심이 얕아 걸어서 지나갈 수 있는 길목이 있었는데 조선군들이 그곳을 통해 성으로 복귀를 하는 모습을 적들에게 보인 것입니다

 

강으로 둘러싸인 성이라 공격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왜군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일제히 걸어서 대동강을 건너며 공격을 시작했죠

왜군들의 총공격이 시작되자 지휘관들은 깜짝 놀라며 평양성을 포기하기로 결정하는데요

그렇게 그들은 성안에 남아있던 군량을 불태우고 무기는 대동강에 버려버린 후 후퇴를 하게 됩니다

한 달 후에 있었던 2차 전투에서는 명나라에서 조승훈이 3천의 요동 기병을 데리고 합류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조선의 병력까지 더해 총 6천의 병력으로 고니시 부대를 공격했지만 말을 탄 기병은 공성전에서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결국 2차 전투에서도 왜군에 대패하게 됩니다

1592년 9월 평양성을 지키는 왜군 병력이 약해졌다고 생각한 조선군은 또다시 2만 명의 병력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려 하는데요

이때 3차 전투에는 김응서 장군도 이원익, 이일과 함께 출전하게 됩니다

 

조선군은 병력을 나눠 3방향에서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평양성 문 앞까지 조선군이 다가오자 50명의 왜군 선발대가 먼저 공격을 해왔죠

그에 맞서 조선군도 활을 쏘아 왜군 20명을 사살하며 기선을 제압할 때까지만 해도 조선군에 유리하게 상황이 펼쳐지는가 했지만 이후 사기가 오른 조선군이 그대로 성문까지 돌격을 한 상황에서 갑자기 성안에서 수천 명의 왜군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전쟁 경험이 없던 조선군은 왜군의 갑작스런 돌격을 당하자 심각한 혼란상태에 빠지며 3개의 부대중 2부대가 전장에서 빠져나가버렸죠

덕분에 한쪽에 남아있던 김응서 장군이 이끄는 부대만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7천 명 가까이 전사하게 되며 3차 전투 역시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조승훈의 1차 원정군이 패배하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제독 이여송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4만 3천 명의 군사를 2차 지원군으로 보냈는데요

 

조선군에서는 도원수 김명원과 평안 우도 방어사 김응서 좌도 방어사 정희연 등의 8천군사와 서산대사, 사명대사가 이끄는 2천 명의 승병이 명나라군과 연합을 하게 되죠

이후 조·명 연합군은 1563년 1월 8일 이른 새벽부터 왜적이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에 총공격을 퍼부어 1592년 7월의 1차 전투부터 무려 4차례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6개월여 만에 마침내 성을 되찾게 됩니다

 

이날 조명 연합군이 승리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왜군들에 비해 수적으로 우위였던 탓도 있지만 전투 도중 왜적들의 사기가 떨어진 것 또한 큰 영향을 미쳤는데요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 공격을 위해 압록강을 건너던 1562년 12월 말에 평양기생 계월향과 그의 연인 김응서 장군이 마치 007 영화를 방불케 하는 비밀작전으로 적장의 목을 베서 성문 위에 내걸었고 이를 본 왜적들이 싸울 의지를 잃었기 때문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김응서 장군이 평양성에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곳에 요즘의 DMZ(비무장지대)와 같은 중립지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나라군과 왜군은 잦은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평양성 성벽으로부터 서쪽 10리까지는 군사들이 들어가지 않기로 조약을 맺었는데요

따라서 민간인들이 성벽 바로 아래까지 접근하는 것이 가능했고 첩보활동을 펼치던 김응서가 계월향을 만나 암살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죠

 

평양의 유명한 기생이었던 계월향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평양성 군관이던 김응서와 연인 관계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1592년 6월 1차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할 당시 미처 성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왜군의 포로가 되었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친척으로 가장 신임받던 부장 고니시 히의 애첩이 되었습니다

 

4차 평양성 전투 당시 김응서는 적군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이 가능한 서문을 중심으로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계월향은 그런 그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는데요

계월향은 왜군들에게 김응서가 전쟁 중에 헤어진 자신의 오빠라고 속이며 그를 성으로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죠

이렇게 평양성 전투가 준비되고 있는 동안 김응서는 적장의 애첩이 된 연인을 만나 적진 깊숙이 잠입할 수 있었습니다

 

며칠 후 김응서는 고니시 히가 깊이 잠들자 계월향의 연락을 받고 숙소에 몰래 들어와 단칼에 고니시의 목을 베어버렸죠

여기까지는 여러 기록이 대체로 일치하지만 이후 벌어진 계월향의 죽음과 김응서의 탈출 과정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요

임진록에서는 적장의 목을 들고 함께 평양성을 넘으려 했으나 곧 붙잡힐 위기에 처하자 계월향이 김응서 장군에게 꼭 탈출해 나라를 구하라며 등을 떠민 뒤 자결했다고 나옵니다

 

눈물을 삼키며 돌아선 김응서가 성문 높이 왜장의 목을 내걸었고 이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내용이죠

하지만 국립 민속 박물관에 있는 계월향 초상화에 쓰인 내용에는 둘 다 성을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계월향의 청으로 김응서가 그녀를 직접 벤 것이라고 나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조선왕조실록 1592년 9월 4일의 기록을 보면 비변사가 김응서의 특진을 건의한 내용을 볼 수 있죠

평양의 왜적은 정예병으로 그들의 머리 하나는 다른 왜적의 것 열 개를 얻는 것과 같은데

김응서는 그들을 상대로 항상 앞장서며 많은 공을 세웠다

 

이번에 또 10명이나 되는 적의 머리를 베었으니 특별히 상을 내릴만하다며 건의했고 선조는 그 자리에서 바로 특진을 명했다고 하네요

이처럼 김응서는 임진왜란 동안 수없이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첩보에 능했다고 합니다

평양성을 되찾은 이후 김응서는 항복한 왜적들을 중심으로 한 탄탄한 인맥과 정보력을 바탕으로 최전선에서 왜적과의 협상을 담당했다고 하죠

 

1595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한 김응서 장군은 왕명으로 동래부의 일본군 진영에 있는 송상현의 관을 찾아오라는 명을 받고 송상현의 관을 적진에서 빼내는 데 성공하는 등 이후에도 계속해서 공을 세웁니다

첩보활동으로 높은 자리까지 올랐던 김응서는 공교롭게도 이 첩보활동 때문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1619년 김응서는 명나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 참전한 전투에서 후금에 패하며 포로 신세가 되는데요

이후 김응서는 적진에서도 첩보활동을 벌이며 중요 정보를 국내로 보내다 발각되어 1624년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광해군의 명에 따라 포로가 되었고 그 이후로도 조선을 위해 일했지만조정의 신료들은 그를 명나라를 버리고 오랑캐에 투항한 배신자라 취급했죠

 

오랜 시간이 흘러 1791년 정조 시절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적을 인정받아 영의정에 봉해집니다

지금까지 첩보전의 대가 김응서 장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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