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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황진.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 무쌍 신화의 주인공

by 사탐과탐 2022.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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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황진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 황진 장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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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영웅이라고 하면 이순신, 권율, 곽재우 같은 장군들이 먼저 떠오르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인물들도 정말 많죠

여기 너무나도 큰 공을 세워 2년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종 6품 현감(지금의 중위)에서 충청도 병마절도사(별 세 개의 장군)까지 오른 사람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황진'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뛰어났던 '천하무쌍' 황진 장군인데요

오늘은 이 황진 장군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웅치 이치 전투와 황진이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황진은 조선의 명재상 황희 정승의 5대 손으로, 1550년 전라북도 남원군에서 태어났습니다

27세에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1583년 여진족 3만 명이 침입한 '이탕개의 난'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고 하죠

 

1591년 종 6품 동복 현감이 된 황진은 1년 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이미 왜란이 일어날 징조를 알아챘기 때문에 공무가 끝나면 말타기와 활쏘기에 열중하며 전쟁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한양에 이어 평양까지 점령한 왜군은 곧이어 전라도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은 조선의 배후기지로서 식량과 무기 공급처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곳을 점령해 조선군에게 가는 보급물자를 끊고 바다에서 자신들을 박살 내고 다니는 이순신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왜군 6군단 총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전주로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왜군들이 전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웅치와 이치라는 두 고갯길을 넘어야 했는데 고바야카와는 부하인 안코쿠지를 시켜 웅치를 공격하고 자신은 이치로 쳐들어갔죠

조선군은 웅치에서 좁은 고개를 1진, 2진, 3진으로 나누어 수비하며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고 1진과 2진이 깨지자 장수들은 결국 뒤로 물러나기로 하는데요

 

김제 군수 정담만이 "나는 이곳에서 퇴각하느니 한 명의 왜군이라도 더 죽이고 이곳에서 죽겠다"라며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황진이 웅치에 도착하니 이미 웅치는 일본군에게 점령당했고 안코쿠지가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안덕원에 군대를 주둔시켜두고 있는 상황이었죠

이에 황진은 새벽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군대를 이끌고 안코쿠지의 진영을 기습해서 적장 한 명을 포함하여 3천 명의 왜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패배한 왜군은 소양평 방면으로 도망갔는데 황진은 이를 추격하여 박살 낸 후 남은 병사들을 모아서 이치 고개로 향했죠

그는 이 전투의 공로로 종 5품인 훈련원 판관으로 승진하게 됩니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해전이 아닌 육전에서 왜군의 본진을 습격해 큰 승리를 거둔 것은 처음이었기에 의미가 큰 전투였죠

 

웅치 전투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후 고바야카와가 만 명의 본진 병력을 이끌고 이번에는 이치 고개로 진격했습니다

총사령관이었던 권율이 이끄는 부대가 이치 고개를 지키는 중이었고 웅치 전투에서 대승한 황진이 여기에 합류하게 되죠

황진은 왜군의 조총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미리 고갯길에 있는 나무 위의 잎사귀를 다 잘라내고 사람 키 이상의 기둥만 남겨둬서 탄환을 피하기 위한 엄폐물로 사용했습니다

 

그 당시 조총은 1분에 한 발씩만 발사가 가능했지만 왜군들은 조총의 발사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데 성공했는데요

병사들을 3열 종대로 서게 한 후 첫 번째 줄이 조준해서 총을 쏘고 나면 그다음 줄이 달려 나가 총을 쏘고 다시 그다음 줄이 달려 나가 총을 쏘는 방식으로 화약에 불을 붙이는 시간을 절약한 것이죠

하지만 조선군도 경험이 쌓여서 왜군 1열이 총을 쏘고 2열이 앞으로 나오는 동안 활시위를 당긴 후 다시 숨는 방식으로 싸우면서 더 이상 순순히 당해 주지 않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조총으로는 답이 없다는 걸 깨달은 왜군은 칼을 들고 가까이 접근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황진이 달려 나가서 왜군 서너 명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리자 용기백배한 황진의 부하들도 대장을 따라 용맹하게 싸우기 시작했죠

이에 왜군들이 더 많은 병력을 투입시키자 황진은 활을 쏘기 시작해서 백발백중의 솜씨로 왜군을 사살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진은 전투 도중 허벅지에 총알을 맞았음에도 때로는 활을 쏘고 때로는 칼을 든 채 미친 듯이 날뛰며 무쌍을 찍는 모습을 보였고 그런 황진을 본 왜구들이 점점 그에게 공격을 집중시킨 결과 황진은 끝내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게 되는데요

황진이 쓰러지자 놀란 아군 병사들이 도망가려고 했지만 권율이 칼을 빼들며 후퇴하는 병사들은 투구에 표시를 해두고 나중에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엄포를 놓으면서 병사들의 기강을 잡은 끝에 치열했던 이치 전투에서 끝내 승리를 거머쥐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황진 장군이 머리에 총을 맞긴 했지만 죽은 것은 아니었는데요

날아온 총알이 투구를 뚫고 들어오면서 힘이 약해진 까닭에 심각한 부상을 입지는 않았고 단지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은 황진이 기절하면서 쓰러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깨어난 황진 장군이 돌아오자 전주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고 하네요

 

이순신에게 패배했던 일본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육지로 진격하여 호남지역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웅치와 이치에서 황진의 맹활약으로 결국 전주성을 지켜내게 됨으로써 호남지역이 왜군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을 수 있었죠

후방이 안전해졌기 때문에 이순신도 안심하고 바다로 나가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웅치와 이치 전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치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권율과 황진은 병사들을 이끌고 북상해서 수원성을 지키러 갔죠

이후 권율은 행주산성으로 내려가 행주대첩을 벌이게 되었고 황진은 수원에 진을 치고 왜군을 주시하고 있었는데요

어느 날 수원 사평에서 정찰을 하던 도중 왜군이 갑자기 기습공격을 하자 깜짝 놀란 조선군 장수들이 급히 퇴각 해리면서 전방에 나가 있던 황진 혼자만 왜군에게 포위되고 말았죠

 

왜군들은 황진을 사로잡기 위해 멀리서 포위만 하고 있었는데 이때 황진이 오히려 갑자기 앞으로 돌격해 왜군들을 베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황진은 하루도 아닌 무려 이틀 동안이나 혼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마침내 말을 빼앗아 좌우로 종횡무진 왜군들을 마구 베어내는 어마어마한 무쌍을 찍으며 본진으로 귀환했다고 하죠

 

이 공으로 절충장군(정 3품) 겸 충청도 조방장으로 승진했고 다음 해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종 2품)로 다시 승진하게 됩니다

그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던 이순신이 계속 정 3품에 머물러 있다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오르며 겨우 종 2품이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6개월 만에 종 6품에서 종 2품까지 승진했던 것을 보면 임진년에 황진의 활약이 참으로 대단했다고 보시면 될 거 같네요

 

충청도 병마사가 된 황진은 왜군 칠본창 중 한 명이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지키던 경기도 안성의 죽산 성을 빼앗아 한양으로 올라가는 왜군의 보급로를 끊기도 했죠

이에 한양을 점령하기 어렵게 되자 명나라와 휴전한 왜군은 남해안으로 내려가던 중 갑작스러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게 됩니다

진주성을 공격해 김시민이 대승을 거뒀던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진주성 내의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라는 명이었죠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모리 히데토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이 대대적인 진주성 공격을 준비했는데 그 수가 무려 10만에 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명나라를 비롯해 도원수 권율 심지어 왕인 선조마저 진주성을 포기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진주성이 뚫리면 그곳을 전진기지로 삼아 왜군들이 호남까지 노리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죠

 

게다가 왜군이 진주성으로 진격하면서 근처 함안이나 의령 지역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여버렸기 때문에 경상도에 있는 백성들이 진주성으로 가면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모두 진주성으로 피난을 간 상태였습니다

호남지역의 안전과 이 6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황진을 포함한 여러 장수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진주성으로 떠나게 되죠

 

하지만 왜군의 병력은 대략 10만 명이었던데 반해 진주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고작 6천 명이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가망이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래서 황진의 능력을 높이 샀던 홍의장군 곽재우도 "당신 같은 인물이 죽는 것은 국가에 큰 손실이니 진주성은 포기하고 나와 같이 밖에서 싸우자"라고 제안했지만 황진은 "이미 진주성에 가기로 약속했으니 죽을지언정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다"라는 말을 남기며 이를 거절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6월 21일 10만의 왜군 대 6천 명 조선군 간의 본격적인 2차 진주성 전투가 드디어 시작되는데요

첫날부터 황진이 뛰어난 활솜씨로 활약했다는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여기서 잠시 황진의 활솜씨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를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무민공실기에 의하면 일본에 통신사로 따라간 시절 일본인들이 조선 통신사의 기를 죽인답시고 50보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세워놓고 이를 쏘아 맞춘 후 자신들의 실력을 과시하는 일이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이를 본 황진은 태연하게 그 과녁 옆에 훨씬 작은 과녁을 세우고 화살 한 발을 날려서 과녁을 명중시킨 다음 다시 화살 두발을 연속으로 쏘아서 날아가는 새 두 마리를 떨어뜨려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황진에게 화살을 갖다 주는 사수만 2~3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손이 바쁠 정도로 황진은 쉴 새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고 하는데요

 

어찌나 빨리 활을 쏘는지 앞서 쏜 화살이 적병의 몸에 맞기도 전에 그다음 화살이 날아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전투 5일째인 6월 25일 왜군이 동문에 망루를 가져와 높은 곳에서 화살을 쏘기 시작하자 조선군도 그 높이에 대항하기 위해 토산을 쌓기 시작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인부들과 일반 병졸들이나 할 작업에 황진도 참여해서 직접 토산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별 3개인 군단장 직위의 황진 장군이 앞장서서 백성들과 같이 흙을 나르니 감동한 병졸들과 백성들은 용기백배해서 토산을 금세 쌓게 됐다고 하네요

그 후 조선군은 토산 위에 천자총통을 놓고는 시원하게 왜군의 망루를 부숴버렸죠

그다음 날에는 왜군이 커다란 나무 방패에 소가죽을 두른 후 그 아래에 숨어서 성문 주변을 파내는 작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본 황진이 먼저 바위를 떨어뜨려 가죽을 찢어지게 만든 후 기름을 먹인 불화살을 명중시켜 그 방패를 불태워버리면서 공들여 만든 왜군들의 공성병기는 허공으로 날아가버렸죠

6월 27일 왜군의 귀갑차 공격에 동문이 허물어지자 황진 장군이 아래로 내려와 몰려드는 적병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고 그동안 병사들이 성문을 수리하면서 수비를 이어나간 끝에 간신히 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압도적인 병력 차에도 일주일이 넘도록 공격을 잘 막아내던 조선군이지만 6월 28일 그들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치게 됩니다

바로 황진 장군이 시체더미 속에 숨어있던 왜군 저격병이 쏜 탄환을 머리에 맞고 전사해버린 것이죠

 

단순히 산술적으로만 보면 사람 한 명이 죽는다고 해서 큰 영향이 있지는 않겠지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계속 전투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성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황진 장군에게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런 황진이 죽자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꺾이면서 싸울 의지를 잃게 되었고 결국 그 일이 있은지 하루 만에 진주성이 점령당하고 맙니다

 

황진 장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 장군도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되었구나"라며 탄식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살아남았던 백성들도 입을 모아 황진 장군이 살아있었다면 진주성을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라 얘기했다고 합니다

 

당시 기록 중 선조 수정 실록에도 "왜란이 있는 이후로 모든 장수 가운데 행군에 법도가 있고 사졸에 솔선하여 옛날 중국 명장의 풍도가 있는 자로는 모두가 황진을 추종하여 으뜸으로 꼽았는데 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고 되어있으니 황진 장군의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죠

 

2차 진주성 전투는 결과적으로는 패배했던 전투였지만 이 전투 이후로 두려움을 느낀 왜군들은 이후로 호남 공격을 포기하게 되는데요

그 이후 4년간 호남지역에서 한 번도 전투가 없었던 점에서 본다면 9일간 죽음으로 항전했던 것이 결코 헛된 패배가 아니며 임진왜란사를 바꿔버릴 정도로 의미가 큰 전투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웅치, 이치 전투에 이어서 2차 진주성 전투의 활약을 생각해 본다면 임진왜란사에서 황진 장군의 활약이 실로 크다고 할 수 있겠죠

지금까지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 무쌍 신화의 황진 장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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