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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정기룡. 조선의 조자룡이라고 불렸던 임진왜란 최강의 무장 중 한명

by 사탐과탐 2022.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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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조자룡이라고 불렸던 임진왜란 최강의 무장 중 한명인 정기룡 장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육지에서 60전 60승의 신화를 이루어낸 이야기 재미있게 봐주세요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용맹하기로 소문났던 장수를 뽑아보면 한명련과 정기룡 황진 이렇게 세명의 인물이 많이 언급되는데요 

오늘 이야기할 주인공은 엄청난 무력으로 왜군 부대를 곳곳에서 격파하고 다니며 육지에서 60전 60승의 신화를 기록한 정기룡 장군입니다 

 

왜군들이 보는 앞에서 왜적의 배를 갈라 생간을 철근같이 씹어먹으며 그대로 돌격해 적들을 두려움에 벌벌 떨게 만들었고 7일 동안 25개의 왜군 부대 9천에 가까운 군사를 고작 7백의 병사로 휩쓸고 다녔다고 하죠 

그 용맹한 모습으로 조선의 조자룡이라고도 불렸던 정기룡 장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정기룡 장군은 1562년 5월 26일 경상도 곤양현(현재의 하동군)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정기룡 장군의 본명은 정무수로 기룡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데는 재밌는 사연이 있다고 하는데요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게 되죠

 

이를 기이하게 여긴 선조는 신하를 시켜 자신이 꿈에서 본 마을에 가서 정말로 용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명령했습니다

신하가 그 명을 받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하다가 결국 그 마을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상주였다고 하죠

그곳에서 무관 시험을 준비하던 정무수를 보고 비범함을 느낀 신하가 그를 선조에게 데려갑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정무수가 마음에 들었던 선조는 그가 같은 해 있었던 무과시험에서 출중한 무용을 뽐내기까지 하자 마치 용이 승천하는 기세와 같다고 감탄하며 그에게 기룡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하네요

1586년 무과에 급제한 정기룡은 1590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의 밑에서 일하였고 다음 해 훈련원 봉사가 됩니다

 

1592년에 별장으로 승진한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의 밑에서 싸우게 되죠

전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경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왜군과 싸울 계책을 묻자 정기룡은 “적들은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강한 군대인 데다 조총을 무기로 쓰고 있으므로 태평한 세상에서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우리 병사들로서는 정면으로 승부하면 이기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은 보병 위주의 부대이니 말을 잘 타는 기병을 뽑아 적을 기다리고 있다가 뜻밖의 기습을 한다면 적은 반드시 놀라 흩어지고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를 틈타 기병과 보병이 합세하여 적을 공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라는 조언을 올렸고 조경도 그 말을 옳다고 인정하며 정기룡을 돌격장으로 임명해 선봉에 세웠죠

 

처음으로 왜군을 만난 거창 전투에서 구로다 나가마사의 선봉 500명과 정기룡 장군이 이끄는 수십 명의 기병이 맞부딪치게 되는데요

많은 왜적들을 보고 병사들이 두려워하자 갑자기 혼자서 말을 몰아 돌진한 정기룡 장군은 적들의 한가운데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왜군 수십 명을 쓰러트려버렸습니다

왜군들은 정기룡 장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놀라며 달아났고 용기를 얻은 부하들이 합류하며 결국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죠

 

이어진 금산 전투에서는 돌격명령을 받은 정기룡 장군이 적군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가 50여 명의 왜적들을 쓰러뜨리는 동안 본진에 있던 조경이 매복해 있던 왜적들에게 기습당해서 포로로 사로잡혀버리는 일이 생겨버렸죠

이 사실을 알게 된 정기룡 장군이 혼자서 말을 달려 적진에 침입해 조경을 잡고 있는 적을 베어버리고 조경을 겨드랑이에 낀 채 가로막는 왜군들을 모두 돌파하며 탈출에 성공합니다

 

단신으로 상관을 구출해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마치 주군의 아들을 구해온 삼국지의 명장

조자룡을 보는 거 같다며 감탄했는데요

그 공로로 그는 1592년 9월 곤양의 수성장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정기룡 장군은 조선의 조자룡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는 10월에 벌어진 진주성 대첩에서도 조선군이 승리하는데 기여했죠

 

초유사 김성일은 정기룡의 명성을 듣고 각지에서 모인 의병들과 함께 외곽에서 진주성의 수비를 지원하라는 임무를 맡깁니다

진주성 근처에 있는 살천장(지금의 산청군 덕산면)은 당시 조선군의 군량을 모아둔 중요한 장소였죠

이곳을 약탈하려는 왜군들을 정기룡 장군이 조경형과 함께 의병들을 이끌고 공격해서 박살을 내버렸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경상우도 감사가 된 김성일은 "정기룡의 용맹함이 아주 뛰어나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비록 직책은 낮지만 왜적을 토벌하는 것이 시급하니 재능 있는 이를 끌어올려 쓰는 것이 옳다" 라고 말하며 정기룡을 상주의 판관으로 임명했죠

임진왜란 초기에 상주성이 함락되면서 그 주변의 중요한 길목들을 일본군이 모두 장악하고 있어 북쪽으로 가는 통로가 막혀 있었는데요

 

김성일은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기룡 장군에게 상주성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명령을 받은 정기룡 장군은 밤낮을 쉬지 않고 상주로 갔지만 이미 상주성과 주변은 모두 왜군의 소굴이 되어 있었죠

왜군들은 상주성을 점령한 이후로 주변지역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계속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상주 서쪽의 용화동이라는 곳에 피신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왜적들이 용화동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보고를 받은 정기룡 장군은 근처의 관병과 의병들을 즉시 소집해서 용화동으로 달려갔죠

성급히 공격을 시작하면 그 과정에서 백성들이 다칠 수 있다고 생각한 정기룡 장군은 적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유인책을 쓴 후 왜군을 섬멸해버렸는데요

덕분에 용화동에 있던 백성들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어서 왜군들이 남아있던 상주성을 공격할 때는 밤중에 화공을 써서 적을 혼란하게 만든 다음 기병들을 이끌고 돌격하는 작전을 펼쳤다고 하죠

한쪽 성문을 비워둬서 왜군들이 도망가게 만든 다음 그 길목에 복병을 숨겨뒀다가 도망치는 왜군들을 박살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정기룡 장군의 이러한 활약 덕분에 예천과 김천 간의 막혀 있던 길이 뚫리게 되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정식으로 상주목사 자리에 오르게 되었죠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도 고령에서 적 장수를 생포한 공으로 병마절도사가 된 정기룡 장군은 일본군이 철수한 성주와 합천, 초계, 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합니다

이러한 공적들을 인정받아서 1610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죠

 

정기룡 장군은 1622년에 통영 진중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에게는 충의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정기룡 장군의 수많은 전공 중에는 그의 전공을 후손들이 기록한 행장에만 기록된 것이 많아서 검증을 하기가 힘들다는 아쉬움이 있는데요

 

하지만 그를 직접 본 명재상 이원익이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한 홍계남보다 뛰어난 장수라 평하며 홍계남보다 먼저 승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점 실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제독 마귀가 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을 조선에서 제일의 장수로 꼽았다는 점등을 봤을 때 이순신, 권율과 함께 언급될 정도로 많은 공을 세웠던 것은 사실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고 합니다

 

별다른 공을 세우지 않은 사람에게 충무공과 같은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내리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죠

지금까지 조선의 조자룡이라고 불렸던 정기룡 장군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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