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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반발한 조상들의 맛깔나는 드립

by 사탐과탐 2022.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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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민족성을 말살시키기위해 한국인들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는데요
그때 조선인들은 이에 반발해 기똥찬 이름을 많이 짓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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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되어 멸망한 경술국치 이후부터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공식적으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36년에 새로 총독으로 부임해온 미나미 지로 때부터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일본화 시키는 민족 말살정책을 시행했죠

 

이는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등 여러 침략전쟁에 조선인들을 투입시켜 총알받이로 써먹기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말살이라고 해서 조선인들을 모조리 죽인다는 의미는 아닌데요

바로 한민족으로써 가지고 있던 정체성을 없애버린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교육을 강화시키고 한국어를 쓰지 못하게 했으며 조선인과 일본인의 조상은 같다는 등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해 가르쳤고 나중에는 신사참배까지 강요했죠

거기다가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과 타이완에 적용했고 그렇게 사람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되기 시작했으며 강제징용되어 노동 착취를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한국식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일본식 이름으로 강제 개명시키는 일명 창씨개명을 하기 시작했죠

창씨는 성(姓)을 일본식으로 새로 만드는 것이었고 개명이란 기존에 있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는데요

이는 조선인의 혈통에 대한 관념을 흐트려놓는 동시에 민족성을 말살하고 황국 신민화를 시키기 위해 강요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조선인의 몸도 마음도 황국 신민이 되게 하여 모조리 전쟁이나 노동에 동원하는것이 목적이었죠

그러나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사실 광복이 되기까지 조선인의 호적과 일본인의 호적은 별도로 취급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창씨개명을 한 첫번째 조선인은 정미칠적 중 한명인 민족반역자 송병준이라고 하죠

 

어쨌든 일본의 이런 어처구니 없는 강요에 조선인들은 당연히 거부감을 나타내며 반발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나섰죠

그러다보니 1939년 11월부터 1940년 5월까지 창씨개명을 신고한 조선인은 전체의 약 7%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이 될수 있도록 해준다' 라는 되지도않는 명분을 내세워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권장했는데도 처참한 결과가 나타나자 총독부에서는 날짜를 정해놓고 그때까지 창씨개명을 하라고 강제하기 시작했는데요

만약 그래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여러가지로 불이익을 주기 시작했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의 자녀는 학교에 입학할수 없었고 진급이나 진학 조차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한 선생들이 아무 이유없이 학생을 혼내고 구타하고 조롱했죠

그러자 버티지못한 학생들이 부모에게 창씨개명을 하자고 요구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비국민이나 불령선인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려 경찰이 그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미행했으며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공무원은 커녕 일반 기업이나 사업체에서도 일을 할수 없게 만들었죠

 

그리고 현재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해고시켜버렸는데 만약 창씨개명을 한 후에는 다시 복직할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창씨개명이 되어 있지 않은 화물이나 우편물 등은 발송을 거부했고 즉시 반송 조치 되었으며, 그들은 기차도 배도 탈수 없었죠

그리고 식량과 생필품 등의 배급에서도 제외가 되었고 노무나 징용에 있어서는 우선적으로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창씨개명을 거부 한다는것은 더이상 먹고 살기 힘들어질만큼 철저하게 강요했죠

이렇게까지 불이익을 줘놓고 일본은 창씨개명 하기 싫으면 안해도된다 라며 강요하지 않는다는 개소리를 지껄여댔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2년동안이나 자행된 강압적인 일본에 의해 결국 1941년 연말까지 전체의 약 81%나 되는 조선인들이 창씨개명을 하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진지하게 창씨개명을 한 사람은 매우 적은수였는데요

오히려 일본을 향한 온갖 비웃음과 조롱, 풍자를 섞어 일본식 이름을 만들기 시작한것이죠

경상남도 동래읍에 사는 한 50대 남성은 개ㅅㄲ 라는 뜻의 '이누노코 (犬の子, 견노자)' 라는 새로운 일본식 성을 만들어 신청을 했는데 왜 이런 성을 만들었냐고 담당 공무원이 묻자

그는 조선인은 성씨를 바꾸면 개ㅅㄲ, 소ㅅㄲ 라고 불리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개똥이나 처먹어라' 라는 의미로 이누쿠소 구라에(犬糞食衛, 견분식위) 라는 이름으로 신청을 했는데 총독부로부터 퇴짜를 맞고 말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이누코 구마소(犬子熊孫, 견자웅손)' 라는 '단군의 자손이 개자식이 되었다' 라는 뜻으로 이름을 짓기도 했죠

하지만 역시 승인이 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병하(田炳夏)'라는 사람은 자신의 이름에 농(農)을 붙여 '전농병하(田農炳夏)'라고 신고했는데요

이를 일본어식으로 읽으면 '덴노 헤이카' 였고 이는 천황폐하 (天皇陛下)의 발음인 '텐노 헤이카' 와 너무 흡사했던 것입니다

이 역시 총독부의 퇴짜를 맞게 되었죠

 

이와 비슷하게 어떤 고등학생은 쇼와 천황의 이름인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로 개명을 하려고 하자 신성모독으로 체포되어 경찰서에 잡혀갔다고도 합니다

당시 한국어 미친놈이야 와 발음이 비슷해서 창씨개명 당시 조선인들이 조롱삼아 자주 사용했다고 하죠

 

거기다가 일왕 가족을 몰살시키려는 남자 라는 뜻의 '덴노조쿠 미나고로시로(天皇族 皆殺郞, 천황족개살랑)' 와 쇼와 일왕을 멸망시킬 남자 라는 뜻인 '쇼와 보타로(昭和 亡太郞, 소화망태랑)'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해도 되냐고 조선총독부로 엽서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조롱은 천왕 뿐만 아니라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를 향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지로는 둘째아들에게 붙이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조선 총독의 형이다' 라는 뜻으로 첫째아들을 뜻하는 '미나미 타로'(南太郞)로 창씨개명하려는 사람도 있었죠

하지만 역시 총독부로부터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한술 더 떠 '신불출' 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일본식 이름을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라고 지었는데요

 

이 글자들을 세로로 쓰면 축생(畜生) 이라는 글자가 되었고 이는 바로 '칙쇼, 빌어먹을, 개ㅅㄲ' 라는 뜻의 일본어 이기도 했던것이죠

하지만 역시 퇴짜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신불출은 두번째 이름으로 '강원야원 (江原野原)' 이라고 지었는데 이걸 일본식으로 읽으면 '에하라 노하라' 였죠

이는 한국어 '에헤라 놓아라~'와 발음이 비슷해 역시 일본을 조롱하는 의미였던것입니다

 

또한 시인이던 이영철은 창씨를 한국어의 어순인 '가나다(加那多)'로 짓기도 했죠

어떤 마을에서는 마을 주민 전체가 같은 성과 같은 이름으로 신청해버리기까지 했는데요

모든 사람이 이름이 같다면 당연히 조선 총독부에서 무슨일을 할때 복잡하고 귀찮은 일이 벌어질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일제를 엿먹이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굉장히 성의없이 대충 지어버리기도 했는데요

청산백수(靑山白水, 아오야마 시라미즈) 라던지 산천초목(山川草木, 야마카와 구사키)이라고 지은 경우가 바로 그것이죠

이처럼 당시 조선인들은 하는수없이 창씨개명을 하기는 했지만 끝까지 끈질기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연하겠지만 어느정도 타협한 사람들도 있긴 했는데요

바로 원래 성을 그대로 살리고 창씨를 한 경우이죠

경상남도 양산군에 살던 엄이섭 (嚴珥燮) 이라는 사람은 이름 끝에 야(也)자만 붙여 엄이섭야(嚴珥燮也)라로 신고했습니다

자신의 성을 엄에서 엄이(嚴珥)로 바꾼것인데 새로 일본식 성을 만들라는 창씨에 반항과 조롱을 동시에 한 것이었죠

 

또한 '본래(원래) 김씨였다' 라는 의미로 성을 '김본 (金本)', '김원 (金原)'으로 하거나 아니면 광주김씨는 '김광 (金光)', 강릉 김씨는 '김강 (金江)' 으로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세도가 가문은 문중회의를 열어 창씨를 한다음 가문 전체가 그 성씨를 사용하도록 하기도 했죠

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않고 목숨을 바쳐 이에 항거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현구라는 인물과 전남 곡성군의 유건영이라는 인물은 창씨개명에 저항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죠

전북 고창에 살던 설진영 이라는 사람은 창씨하지 않으면 자녀가 학교에서 퇴학당할 위기에 처하자 어쩔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고나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퇴학당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뒤 곧바로 투신자살했다고 합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비방하다가 체포된 사람도 많았다고 하죠

그런데 어이없는점은 바로 일본인들도 거세게 창씨개명을 반대했다는것입니다

심지어 조선총독부 내에서도 반발이 있었던것이죠

만약 조선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쓰게되면 일본인과 조선인의 구별이 쉽지않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약화 될것을 두려워 했다는것이죠

또한 유명한 친일파에게는 굳이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았는데요

이들에게까지 강요할 필요는 없었던데다가 창씨개명을 자신들은 강요하지 않는다 라는걸 친일파들을 통해 보여주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민족어문 말살정책과 함께 이 창씨개명은 일제의 가장 실패한 정책 중 하나가 되었죠

 

창씨를 했다 하더라도 혈통과 가문을 지키려는 의지가 굳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창씨개명의 피해는 현재까지도 많은 문제점을 남겼는데요

바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때 군인으로 잡혀간 조선인들이나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인, 여러곳에 강제 징용되어 노동 착취를 당한 조선인들의 명단이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지만 이름들이 모두 창씨개명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어서 신원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많은것이죠

 

시간이 흘러 1945년 8월15일 광복이 선언되자 조선인들은 곧바로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자신의 한국 이름을 적극적으로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1946년 10월 23일에는 창씨와 개명 모두 무효 처리 되었고 일제강점기에 사용되던 호적도 모두 무효화되었죠

그리고 하는 방법을 몰라 한국식 이름으로 신고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도 각 기관들이 알아서 원래의 이름으로 돌려 놓았습니다

 

그렇게 1947년말까지 이름 복구작업이 신속하게 진행되어 나중에는 창씨개명된 이름이 완전히 복구되었죠

일제강점기를 내가 겪었다면 일제에 저항할수 있었겠나 생각했을 때 저는 겁이 많아서 못했을거 같은데요

알게모르게 끝까지 일제에 저항했던 우리 조상들은 정말 대단했던것 같죠

 

한민족의 성과 이름을 모두 바꿔 민족성을 말살시키려 했던 창씨개명과 일본의 이런 행태를 조롱하고 풍자하며 한치도 물러섬이 없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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