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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척준경. 고려를 지킨 최강의 명장에서 간신을 지킨 맹견으로 전락한 한반도 최강의 소드마스터

by 사탐과탐 2022.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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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한반도 최강의 무장으로 알려져있는 고려시대 소드마스터 척준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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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의 이야기를 다루는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를 보면 재미있는 설정이 있는데요

바로 중국의 무당파를 만든 장삼풍이 제자의 복수를 위해 고려를 찾아왔다는 설정이죠

무림 최고 고수이던 장삼풍의 제자를 죽인 고려의 인물은 바로 곡산 검법을 쓰는 척 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하는데요

 

오늘 이야기할 이 인물이 바로 이 설정의 모티브가 된 인물입니다

이 인물은 무력 하나 만으로는 한반도에서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척준경이라는 인물이죠

 

척준경은 황해도 곡산 사람으로 아버지가 곡산의 향리 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무예를 익히는 걸 더 좋아했었죠

그러다보니 그는 글을 몰랐고 결국 아버지의 직업이었던 향리직을 이어받지 못한 채 동네 깡패 양아치 같은 무리와 어울려 놀다가 숙종이 계림공이던 시절에 그 밑에 들어가게 되었고 운 좋게 추밀원의 말단 관리로 들어가면서 하급 관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104년 2월, 여진족이 고려의 동북면을 치고 들어와 고려군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출진 하게 되었죠

당시 동북면을 지키고 있던 인물은 임간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임간이 공격해 온 여진족을 얕본 나머지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는 공을 세우고자 무모하게 적진으로 깊이 들어갔다가 여진군에 강력한 역습에 당황한 채 도망가기 시작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임간과 고려군은 여진군에게 천리장성의 관문이던 선덕관까지 쫓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말단 무장이었던 척준경이 총사령관이던 임간에게 달려와 무장한 말과 무기를 빌려달라고 요구했죠

그러자 당시 총대장이던 임간은 완전 하급 무관이었던 척준경이 감히 자신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것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워낙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에 그의 요구를 들어줬습니다

 

이때 척준경은 믿을 수 없는 활약을 펼치는데요

그는 갑옷을 입힌 말에 올라타고 창을 단단히 잡은 뒤 단신으로 여진족 부대 안으로 돌진했습니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여진족 병사들 사이로 뚫고 쏜살같이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온 척준경은 순식간에 여진족 장수 한 명의 목을 날려버렸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붙잡혀있던 고려의 병사 두 명을 구출했죠

 

이런 척준경의 활약에 사기가 오른 고려군과 고려 장수들은 뒤돌아 여진군에게 반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군 지휘관 한 명을 잃고 정신이 번쩍 든 여진족들은 기병 100명을 보내 척준경의 뒤를 쫓기 시작했죠

이에 그는 말을 숲속으로 달려 나무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추격병들을 따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추격병들에게 쫓기던 척준경은 자신의 뒤를 바짝 쫓던 여진의 장수마저 활을 쏴 쓰러트렸죠

홀로 여진족 부대를 헤집고 다니며 여진족 장수 두 명의 목을 따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기세가 사그라든 여진군은 더 이상 고려군을 추격하지 못했고 고려군은 천신만고 끝에 성 안으로 후퇴할 수 있었죠

이런 엄청난 공을 세운 척준경은 진급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가 옥에 갇히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면 하급 무장 주제에 총사령관에게 대놓고 요구한 것이 괘씸하다 생각해서 벌을 주었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척준경이 큰 공을 세운 것을 시기 질투한 사람이 그에게 이상한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일 수도 있죠

한편 고려조정은 여진에 대패한 것에 깜짝 놀라 윤관이라는 인물에게 동북면을 지키도록 했는데요

 

다행스럽게도 부임해온 윤관이 척준경의 엄청난 무예 솜씨를 알고 있었고 그를 풀어준 뒤 자신의 군으로 편입시켜 함께 여진과의 전투를 치르고자 했습니다

이에 척준경은 그때부터 윤관에게 충성을 다하게 되었죠

그렇게 다시 한번 여진군과 붙었지만 또 다시 대패한 고려군과 윤관은 그들에게 화친을 청했고 천리장성의 일부분인 장주와 정평도 그들에게 빼앗긴 채 간신히 여진군을 물러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예종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여진족의 수상한 동향을 눈치챈 고려 조정은 출정을 결정 하게 되는데요

윤관을 원수로 한 고려군 17만 명의 별무반은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진격을 개시 했습니다

그런데 함흥 인근의 한 성에서 여진족이 거세게 농성을 하는 것이었죠

 

이에 윤관이 계책을 써 잠깐 여진군을 함정에 빠트리기는 했지만 그들은 다시 성문을 굳게 닫고 지루한 농성을 이어나갔습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공격한 쪽이 불리했기 때문에 윤관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는데요

그러자 척준경은 또다시 놀라운 활약을 하게 되죠

 

그는 칼과 방패만 달랑 들고 혼자 성벽을 기어 올라가 여진족 장수와 병사 수십 명을 죽였고 그가 뚫어놓은 길을 따라 성위로 올라올 수 있었던 고려군은 결국 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강력한 여진족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는데요

어느 날 윤관은 순찰대를 꾸려 여진족을 염탐하러 갔다가 여진족 대규모 병력에 기습을 받게 되었고 고려군 총사령관이던 윤관이 사로잡힐 위기에 빠지게 되죠

 

가까스로 척준경의 부대로 지원 요청을 보낼 수 있었지만 부대를 이끌고 온 척준경도 여진족의 병력을 뚫고 윤관을 구해 내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에 척준경은 윤관을 구출하기 위한 10인의 결사대를 조직해 적진으로 침투하기로 마음먹게 되죠

그러자 그의 동생 척준신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며 형을 막아섰지만 자신의 능력을 높게 평가해주고 자신을 믿어준 윤관에 대한 의리 때문에 그를 구하고자 했던 척준경은 동생에게 늙은 아버지를 부탁하며 결사대 10명 만을 데리고 윤관 구출 작전에 돌입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척준경과 10인의 결사대는 순식간에 적진을 헤집고 돌파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휘두르는 칼에 여진족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지자 겁에 질린 여진족 병사들이 뒷걸음질 치며 우왕좌왕 하고있는사이에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고려의 지원군이 도착해 윤관을 구출하는데 성공하게 되죠

더 놀라운 점은 당시 척준경은 털 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하는데요

 

심지어 퇴각하는 여진군을 쫓아가 수십 명의 목을 베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윤관은 눈물을 흘리며 척준경의 손을 잡더니 "앞으로 너를 자식으로 생각할 테니, 너도 날 아버지처럼 생각하거라" 라고 말하며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겨우 살아남은 윤관은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영주성까지 물러나게 되었는데요

 

며칠 뒤 여진의 명장 알새가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영주성을 공격해 왔죠

병력이나 군량도 부족한 상황이었고 병사들의 사기마저 떨어져 있던 상황에서 윤관과 여러 장수들은 영주성에서 농성을 하며 버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척준경은 성안에 식량도 얼마 없고 원군도 오지 않는데 농성을 하다간 얼마 못 버틸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병력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렇게 결사대를 이끌고 성을 나간 척준경은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투를 승리로 가져가면서 여진군을 몰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그는 적군의 수급 19개를 가지고 돌아왔는데요

그의 늠름한 모습에 성을 지키던 윤관과 여러 장수들은 성에서 내려와 척준경에게 절까지 하며 그를 맞이했다고 하죠

 

생각보다 너무나도 강력했던 여진에 대항하기 위해 윤관은 각지에 넓게 분산되어 있던 병사들을 영주성으로 모이라고 명했는데요

윤관의 명령에 따라 왕자지는 군대를 거느리고 영주로 향했죠

그런데 갑자기 여진군에게 기습을 당하고 말았고 그렇게 대패한 고려군은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고려군을 지휘하던 왕자지도 말을 잃어버려 병사들과 함께 걸어서 퇴각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죠

얼마 안 가 여진족을 만난 척준경의 부대는 순식간에 그들을 섬멸해버렸고 왕자지에게 말 한 필을 선물해 주기도 했습니다

척준경의 활약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는데요

 

옹주성이 여진군에게 포위 당했을 때는 밤에 여진군 몰래 성벽을 타고 내려와 각지에서 지원군을 모은 뒤에 다시 여진군을 싹 쓸어버리기도 했죠

그렇게 지속적으로 여진과의 전투에서 독보적인 공적을 쌓은 척준경은 고려의 동북 9성을 쌓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종3품 직문하성까지 직위가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여진과의 전투에서 쌓은 경험 때문인지 여진과 전쟁을 하는 것보다는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척준경은 당시 외척이던 이자겸과 함께 여진과 화의를 주장하는데요

당시 최고의 무장이던 척준경을 눈여겨 보고있던 이자겸은 더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그를 끌어들였고 왕에 대한 충심이 별로 없던 척준경은 이자겸의 호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에 이자겸 일파가 되어 더 강한 권세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척준경은 이자겸의 도움으로 무신으로써는 역대급 벼슬인 정2품까지 올라가게 되었죠

하지만 인종 4년인 1126년 2월, 김찬과 안보린을 필두로 한 왕당파들은 자꾸 세력이 커지는 이자겸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궐에 있던 척순과 척준신, 전기상, 최영 등 이자겸의 일파를 죽여버린 사건이 벌어졌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자기 자식과 동생이 죽은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격분하며 그길로 부하 수십 명을 데리고 궁으로 향했고 인종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공격했으며 심지어는 궁에 불을 질러버리기 까지했죠

결국 왕당파는 이자겸 일파에게 패해 안보린 최탁 권수 등 17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고 말았고 나머지는 유배를 보내거나 처자식은 모조리 노비로 만들어 버렸으며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서 약 2달 동안 갇혀 살게 되면서 이 이자겸의 난은 일단락 되게 됩니다

 

그렇게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더욱 강력해져 고려에서 그 누구도 그들을 어쩌지 못할 정도가 되었죠

하지만 인종은 잠자코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요

이번에 왕당파가 패배한 이유는 척준경 때문이라 생각한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이간질 시켰고 여러 부하들을 척준경에게 보내 살살 달래며 그를 포섭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척준경은 이자겸을 배신하고 인종에게 붙었고 그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맹세도 하게 되죠

 

시간이 흘러 1126년 5월, 이자겸의 이상행동을 포착한 인종은 척준경에게 그를 잡아오라 명했고 그렇게 이자겸은 모든 것을 잃고 유배를 떠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자겸을 몰락시킨 척준경은 고려 최고의 권력자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데요

얼마 후 정지상과 김안 등이 척준경의 죄를 물어야 한다며 그를 탄핵했고 그렇게 척준경도 결국 유배를 가게 되었죠

 

그리고 이듬해 인 1128년, 인종은 그래도 척준경이 자신을 구해준 것을 생각해 그의 유배지를 고향이던 곡산으로 옮겨주었고 나중에는 척준경의 재산도 처자식들에게 돌려주라고 명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1144년에는 사직을 지킨 공로를 인정해 검교호부상서의 벼슬을 내리기까지 했죠

벼슬을 받고 나서 얼마 안 가 그는 등창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척준경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무인으로 여진과의 전투에서 많은 장수들 중 독보적인 전공을 쌓았죠

그가 전투에서 활약한 사실들을 들어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요

하지만 그는 권력을 다룰 줄 모르는 단순한 무인이었고 윤관의 밑에서는 나라를 지킨 구국의 영웅이었다가 이자겸의 밑에서는 간신을 지키는 충견이자 역적으로 전락해버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뒤늦게나마 다시 인종을 돕기는 했지만 결국 고려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죠

상관이 누구인가에 따라 영웅에서 역적까지 극과 극을 왔다 갔다 한 그의 태도가 참 안타까운 점이긴 하네요

한반도 역사상 최강의 무장이던 척준경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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