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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혜경궁 홍씨. 평생을 살얼음판을 걷는것 같은 삶을 살았던 여인.

by 사탐과탐 2022.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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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가 영조, 남편이 사도세자, 아들이 정조였던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두려운 삶을 살았던 여인 혜경궁 홍씨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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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린나이에 왕실로 시집와 시아버지의 편집증과 남편의 광증으로 인해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힘든 삶을 산 혜경궁 홍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녀는 시아버지가 영조이고, 남편이 사도세자, 아들이 정조였던만큼 평생을 마음 졸이며 살았죠

 

혜경궁 홍씨는 1735년 6월 18일, 아버지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홍봉한은 선조의 딸 정명공주의 자손이어서 그녀 역시 선조의 6대손이기도 하죠

혜경궁 홍씨는 태몽부터 범상치 않은데요

 

홍씨가 태어나기 전날 홍봉한은 잠을 자다 꿈을 꿨는데 사랑채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홍봉한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껴 위를 올려다 보니 검은용이 나타나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죠

깜짝 놀라 잠에서 깬 홍봉한은 조만간 태어날 아이가 가문을 빛낼 큰 인물이 될거라 생각했는데 다음날 혜경궁 홍씨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는 10살이 되던 해인 1744년 동갑내기였던 사도세자와 혼인을 하게 되었죠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릴 때 생전 처음보는 친척들이 찾아와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1750년 그녀는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의소세손을 낳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의소세손을 낳기 전, 이미 세상을 떠난 시누이 화평옹주가 꿈에 나타났는데 꿈에서 깬 홍씨는 혹시 출산을 할때 죽은 화평옹주가 무슨 해코지를 하려는건 아닌가 싶어 불안해 했다고 하죠

의소세손은 건강히 태어나긴 했지만 태어난지 두해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같은해에 훗날 정조가 되는 사내아이를 출산했죠

 

그녀는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낳고 2명은 유산을 했는데요

혜경궁 홍씨가 22세가 된 해에 청선군주를 낳고 그 이후로는 임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정성왕후와 인원왕후가 연달아 세상을 떠나면서 상중에 아이를 갖는것이 좀 그렇기도 했고 인원왕후가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는 사도세자의 광증이 나날이 악화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자식을 또 가지기엔 무리가 있었을거라 추측되죠

 

그러던 어느날 사도세자의 승휘 (세자의 후궁)인 숙빈 임씨가 아이를 가지자 영조가 자신을 혼낼것을 두려워한 사도세자가 아이를 유산시키려 한 사건이 있었죠

그리고 이후부터는 그녀를 완전 투명인간 취급 해버렸고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조차 자신의 손주를 임신중인 임씨에 대해 모른척 해버렸습니다

그렇게 숙빈임씨가 만삭이 될때까지 거의 모든 사람에게 개무시당하고 있는 모습을 본 혜경궁 홍씨는 질투는 커녕 동정심이 생겨 불쌍한 그녀를 잘보살펴 주었다고 하죠

 

결국 그녀는 은언군을 낳았고 이 사실을 알게된 영조는 한달 내내 사도세자를 꾸짖었는데요

심지어 혜경궁 홍씨에게도 "넌 여자이면서 질투도 안하냐"며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혜경궁 홍씨가 영조에게 어떻게 남편이 한일을 일러바치냐고 한마디 했다가 10분 욕먹을걸 1시간 더먹었다고 하죠

세자가 승휘를 들이는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세자가 학문을 가까이 하지않고 궁녀를 건드려 자식까지 낳은것이 영조 입장에서는 너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훗날 사도세자는 임씨에게서 은신군도 낳게 되었고 인원왕후의 침방 궁녀 빙애까지 건드려 청근현주와 은전군도 낳게 되는데요

사도세자가 궁녀들을 건드려 자식만 낳았지 이후부터는 승휘들과 자식들을 본체만체 해버렸고 영조 역시 세자의 승휘와 그 자녀들을 탐탁치않게 여겼기 때문에 혜경궁 홍씨는 그들을 못마땅해 하기는 커녕 오히려 동정심과 연민을 느껴 잘 대해 줬다고 하죠

 

자신이 쓴 한중록에도 승휘들이 자식을 낳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영조도 사도세자를 못잡아 먹어 안달난 상황에서 자신도 남편에게 난리치면 광증이 더 심해질까봐 참았다고 합니다

사도세자의 상태는 더 심각해져 자신의 승휘인 빙애까지 때려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런일도 있었는데요

사도세자가 미쳐날뛰면서 내시들과 궁녀들까지 살해하자 혜경궁 홍씨는 시어머니 영빈이씨에게 찾아가 이일을 어떻게 하냐며 울면서 의논했습니다

그러자 영빈이씨는 영조에게 말하는게 어떠냐고 하자 혜경궁 홍씨는 기겁하며 영조한테 말한걸 세자가 알면 우리도 그의 손에 죽고 말거라고 했다고 하죠

 

그렇게 사도세자의 광증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영조와의 갈등도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은 영조에게 "전하께서 평소에 너무 엄격하기 때문에 세자가 항상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마음속에 있는말도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다" 라며 사위였던 사도세자를 옹호하기도 했는데요

그래도 부자관계는 계속해서 악화일로를 걷고 있을뿐이었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몇달 전 영조 몰래 평양에 다녀온적이 있는데 나중에 알게된 영조는 또 격분하여 그를 꾸짖었습니다

이때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에게 "이번엔 아마도 무사하지 못할것 같은데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는건 어떨까" 라고 말하며 모든걸 체념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하죠

그러던 1762년 5월, 나경언이란 사람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굉장히 크게 부풀려 고변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격분한 영조는 이제 세자에게 남은 희망이 없다며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했죠

사도세자가 자결을 하려다 주위사람들의 만류로 실패하자 영조는 뒤주를 가지고 오라고 했고 세자에게 그곳에 들어가라 명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혜경궁 홍씨는 안절부절 못하다 밧소주방에서 뒤주를 가져가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두 차례나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기도 했지만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실패하기도 했죠

 

그러다 그녀는 남편을 만나기위해 그곳으로 달려갔는데요

하지만 근위병들의 제지로 인해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밖에서 남편이 울부짖는 소리만 들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이제는 아버님께서 하라시는대로 다 하겠습니다.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것이니 이리하지 마소서" 라며 애걸복걸 했지만 영조의 분노는 사그라 들지 않았고 그렇게 뒤주에 갇히게 되었죠

 

남편의 이 소리를 들은 혜경궁 홍씨는 간장 마디마디가 끊어지는 고통과 함께 눈앞이 캄캄 했다고 당시 공포스러웠던 상황을 한중록에 기록해 두었다고 합니다

또한 남편에게는 힘도 쌘 사람이 뒤주에 들어가라한다고 그냥 들어갔냐며 원망아닌 원망을 한채 눈물을 흘렸다고 하죠

그러면서 내시를 시켜 영조에게 죄인의 아내가 어찌 궁에 있겠냐며 친정으로 갈것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세손을 지켜줄것을 부탁했고 그렇게 궁에서 나가 친정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다 얼마안가 영조의 명으로 다시 궁으로 돌아온 혜경궁 홍씨는 이제부터는 아들이라도 잘 키워 왕으로 만들어야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죠

그녀는 아들인 세손에게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허물하겠냐고 하면서 우리가 살아 있는건 모두 전하 덕분이고 앞으로 우리 목숨을 맡길 분도 전하 뿐이라며 전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영조도 혜경궁 홍씨를 찾아간 적이 있는데 "저희 모자가 살아있는건 다 전하의 은혜 덕분입니다" 라며 영조가 벌인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영조도 흡족해하면서 그녀가 효성스럽다며 칭찬했다고 하죠

그리고 당시 자신과 세손은 창덕궁에, 영조는 경희궁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아직 어렸던 세손을 경희궁에 머물게 해달라고 영조에게 부탁했습니다

어린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 택한 어쩔수 없는 방법이었죠

 

그렇게 아들과 떨어져 살던 어느 날 자신을 찾아왔던 어린 세손이 다시 경희궁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자 이 모습을 본 영조는 "이렇게 어미를 그리워 하니 놔두고 가는게 좋지 않겠냐" 라고 했는데요

혹시나 영조가 섭섭해 할까봐 염려되었던 혜경궁 홍씨는 여기 있으면 아버님을 더 그리워 한다며 세손을 메몰차게 떼냈다고 합니다

 

그러다 1776년 영조가 83세에 세상을 떠나고 드디어 아들 정조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죠

정조는 어머니에게 '혜경궁' 이라는 궁호를 내렸습니다

당시 혜경궁 홍씨는 왕실 여인중 가장 연장자였지만 대비가 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왕실의 서열 1위이자 최고어른은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왕대비 정순왕후 였죠

그리고 원래 서열2위는 중전이었던 효의왕후 였는데요

 

정조는 어머니에게 '자궁(慈宮)'이라는 칭호를 내리면서 정순왕후보다는 낮지만 효의왕후보다는 높은 대우를 했고 그렇게라도 대비에 준하는 대접을 해서 어머니를 위로했다고 하죠

그녀는 예전에 사도세자가 죽고나서 영조로부터 혜빈이라는 빈호를 받아 그렇게 불렸었지만 이때부터는 궁호인 혜경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정조가 즉위하고나서 그녀의 친정은 반대파들의 엄청난 공격을 받아 모진 수난을 받았지만 정조가 적극적으로 보호해준 덕분에 친정도 정적들의 공격을 잘 넘겼고 자신도 극진한 효도를 받으며 평온한 시절을 보냈죠

그렇게 시간이흘러 1796년에 혜경궁 홍씨는 환갑을 맞았는데요

그때 아들 정조와 함께 화성으로 행차하면서 무려 33년만에 남편 사도세자의 무덤을 방문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녀는 한중록에 임오화변 당시엔 앞날이 막막했지만 당시 11살이던 아들이 왕이 되었고 딸들은 모두 장성하여 40세가 넘었다며 마음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라고 기록했다고 하죠

하지만 아들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손자이던 순조가 왕위를 잇고나서 그녀의 고난은 또다시 시작되었는데요

 

당시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던 풍산 홍씨와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인 경주 김씨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죽자 정순왕후는 혜경궁 홍씨의 남동생인 홍낙임을 쳐내려 했던 것입니다

이에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반대하고 나섰고 며느리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도 함께 반대하자 결국 정순왕후는 홍낙임을 처벌하려던뜻을 잠시 접었죠

 

하지만 그는 1801년 신유박해때 체포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사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정조가 죽고나서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실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는데요

정순왕후의 기세가 얼마나 강했는지 순조는 물론이고 며느리이던 효의왕후나 수빈박씨마저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문후조차 오지 않았었죠

 

이후 정순왕후가 죽고나서 혜경궁 홍씨는 친정에 대한 신원을 요구했고 1814년, 그의 친정은 복권되었습니다

그리고 1816년 1월 13일,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훗날 고종 때에 사도세자가 장조 황제로 추존 되면서 자신도 헌경의황후로 높여지기도 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워낙 깐깐하고 편집증 환자에다가 의심도 많았고 남편은 광증에 걸려 수많은 죄없는 사람들을 죽였으니 의지할 곳 이라고는 한군데도 없었던 혜경궁 홍씨는 정말 우여곡절 많은 인생을 산것 같네요

그래도 아들 정조는 살려내 왕으로 만든걸 보면 대단한 여인인것 같기도 하죠

 

지금까지 조선시대 손에 꼽히는 비극적인 인물 혜경궁 홍씨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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