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탐관오리를 소탕하고 정의를 수호해주었던 암행어사와 어사제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때 인터넷에서 조선시대 암행어사에 대한 각종 썰이 떠돌았던 적이 있죠
여러가지 썰 중에서도 암행어사를 파견 보내면 살아돌아올 확률이 30퍼센트 미만이었다
그만큼 암행어사는 죽을 확률이 높은 위험한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젊고 건강한 무인 출신의 관료를 많이 뽑았다는 내용을 가장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사실과 전혀 다른 근거 없는 의견에 불과하다고 하는데요
과연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는지 지금부터 함께 보시죠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각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이 있었고 사헌부에서 그 지방행정관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비해서 제대로 된 교통과 통신 수단이 갖춰져 있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설령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감찰을 보낸다 해도 지방관의 비리를 증언해 줄 지역 유지들이 오히려 지방관과 결탁해서 감찰관이 내려오는 동안 거짓 증거를 만들어놓고 그들을 속이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부패한 지방관들을 처벌하기도 쉽지가 않았죠
때문에 국왕이 비밀리에 어사를 임명해서 각 지방에 파견하면 변복을 하고 비밀감찰의 임무를 맡았던 것이 바로 암행어사인데요
어사란 특별한 왕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되던 임시 벼슬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파견하는 어사는 지방에 무슨 일이 있을 때 왕명을 통해 보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암행어사는 모두 비밀에 부쳐져서 은밀하게 시찰하기 때문에 왕을 포함한 극소수만이 알고 있었다고 하죠
다만 현종 12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임명된 조위봉처럼 파견지로 가는 도중에 지인들에게 자신이 가야 할 파견지역과 그곳 수령의 파직 여부를 미리 노출시켜버린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가차 없이 사헌부에서 탄핵을 당했다고 합니다
암행어사는 당하관들 중에서 왕이 평소 눈여겨보던 충직한 신하들이 뽑혔다고 하죠
참고로 당상관은 정1품부터 정3품 상계까지의 관리를 당하관은 정3품 하계부터 종9품까지를 말합니다
암행어사가 되면 받게 되는 것이 일종의 임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봉서와 자신이 맡은 임무와 파견지가 적혀있는 사목 그리고 역참에서 역졸과 역마를 징발할 수 있는 마패를 받았으며 그 외에도 놋쇠로 만든 자인 유척을 받았는데 유척은 지방 수령이 도량형을 속여서 백성을 착취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시체를 검사할 때에도 쓰였다고 하죠
이 물건들은 하나의 상자에 담긴 채로 국왕이 비밀리에 직접 주거나 하급관리를 통해 해당 인물의 집으로 직접 전달됐으며 암행어사로 선발된 관리는 봉서를 받는 즉시 출발해야만 했습니다
하급관리를 통해 전달될 경우 이 물품을 전달하는 하급관리가 중간에 내용물을 열어볼 경우 엄벌에 처해졌다고 하네요
봉서 표면에는 남대문이나 동대문 밖에 나가면 열어볼 것이라고 써서 그 내용은 반드시 한양 밖에서만 열어볼 수 있도록 했죠
만약 이 물품들 중 하나라도 잃어버릴 경우 암행어사 직에서 파직됐다고 합니다
암행어사는 정2품인 한성부판윤의 바로 아래 서열인 종2품으로 지방 수령들보다 품계가 높기 때문에 암행어사가 출두하면 해당 지방 수령들을 바로 파직시킬 수 있었죠
원칙상으로는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서 파직시킬지의 여부를 물어본 뒤 임금의 허락이 떨어지면 해당 지방관을 파직시키는 형식이었지만 한양과의 거리가 너무 먼 지역에서 일을 급하게 처리해야만 할 경우에는 먼저 파직을 시킨 후 장계로 이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암행어사는 임명받은 지방에 도착하면 먼저 그 지역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변복을 한 채 조사를 시작했는데요
사극에서는 암행어사가 주막에 가서 술과 국밥을 시킨 채 앉아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었죠
그렇게 조사를 마치면 그 고을 관가의 대청에 올라 공문서와 관가 창고를 검사했는데 이를 출도라고 불렀습니다
사극에서 암행어사가 출도 할 때는 어사 뒤에서 육모 방망이를 든 사람들이 "암행어사 출도요"라고 크게 외친 후 관청의 문을 박차고 우르르 몰려드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정체는 바로 주변 역참에서 동원된 역졸들이었다고 하죠
이후 어사가 조사를 해서 억울한 죄인이나 재판 사례가 있으면 다시 심사를 해서 잘못을 바로잡고 지방관의 비리가 발견되면 창고를 봉인하고 수령의 직책을 박탈시켜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암행어사가 품계 분류상 종2품 관찰사와 대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렇게 임무를 마치고 다시 한양으로 귀환한 암행어사는 국왕에게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보고서에는 지방 수령의 잘잘못을 상세하게 적는 것뿐만 아니라 조사 과정에서 보고 들은 그 지역 백성들의 숨은 미담이 있거나 열녀·효자 등이 있으면 그것까지 보고를 했죠
그러면 왕은 보고서를 토대로 비변사에 명을 내려 처리를 마쳤습니다
이제 암행어사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앞에서 말한 암행어사들이 파견지에서 살아돌아올 확률이 극히 낮았다는 주장에 대해 알아볼까 하는데요
그 주장에 따르면 지방관들이 자신의 비리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어사가 내려오는 길목에 사람을 보내 그들을 암살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암행어사는 오직 임금만이 뽑을 수 있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그런 암행어사를 죽인다는 것은 왕에 대한 도전인 역모죄로 여겨질 수 있는 일이었죠
만약 암행어사가 자신의 파견지로 가는 길에 죽었다면 제일 먼저 의심받게 되는 것이 그 파견지의 수령인데 굳이 목숨을 걸고 그런 시도를 하려는 미친 사람이 있었을까요?
게다가 암행어사는 파견지로 갈 때 절대 혼자서 움직이지 않았고 반드시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활동했는데 시대나 상황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1822년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임명된 박내겸 같은 경우에는 동행하는 무리가 무려 12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사들은 각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외진 곳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 위주로 다녔다고 하죠
이런 점을 볼 때 어사가 외딴곳에서 홀로 객사할 가능성은 굉장히 적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영조 시대의 전라도 암행어사인 홍양한이 독살로 추정되는 의문사를 당한 것과 순조 시대 평안북도의 암행어사인 임준상 그리고 고종시대의 경상우도 암행어사가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사망한 기록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400년간 계속되어온 암행어사 제도에서는 극히 일부분에 해당하는 희귀한 경우였다고 하네요
그리고 암행어사는 죽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젊고 건강한 무인 출신 위주로 어사들을 뽑았다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로는 암행어사들의 대부분이 경험 많은 문관 출신들이었다고 하죠
최소한 관직 활동을 몇 년이라도 겪어보고 외부 활동을 하는데 문제가 없어 보이는 30대~40대 초반의 인물들이 주로 암행어사직을 맡았다고 합니다
영조실록을 보면 공정하고 강직한 자들 중에서도 수령직을 지내본 경험이 있는 자들 위주로 암행어사를 선발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수령을 지내보지 않은 자는 지방행정의 제대로 된 실상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실제로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는 어사의 경우 제대로 된 출도 한번 못하고 돌아왔다가 처벌받은 사례가 있죠
바로 정조 때 호남어사로 파견되었던 이희갑의 얘기인데 이희갑은 나주목사 조시수의 비리 사건을 보고도 어사 출도를 하지 않은 채 그냥 복귀했다가 정조의 호된 질책을 받고 다시 파견되어 조시수를 파직시켰지만 복귀 후에는 결국 파면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암행어사 제도는 처음에는 본래의 목적대로 많은 효과를 거두었지만 숙종 시절 이후부터는 암행어사가 본래의 사명과는 달리 반대당을 공격하고 자기편을 두둔하는 성격을 띠게 된 데다가 고위관료들은 자기들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심복들로 어사의 뒤를 밟게 해서 어사를 탄핵할 만한 꼬투리를 잡거나 심지어 어사를 매수해서 자신에 대한 평가를 좋게 적도록 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하죠
그 후 암행어사 제도는 고종 33년인 1896년에 나이 74세로 마지막 암행어사가 된 장석룡의 보고서를 끝으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시기는 왕인 고종조차 암행어사가 뭣 땜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며 한탄했을 정도로 어사제도가 심하게 타락했던 시기였다고 하죠
왜냐하면 단속을 하러 간 암행어사들이 오히려 접대를 받고 부패한 관리들과 결탁하는가 하면 암행어사도 아닌 사람들이 겉으로는 진짜 암행어사인 척하면서 관의 인물들과 한통속이 되어 패악질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400년 동안 그나마 조선의 비리를 잡아내주던 어사 제도도 결국에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된 것이죠
지금까지 암행어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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