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며 또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강감찬의 귀주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이라 불린다고 하죠
그리고 세계 4대 해전에도 들어가는 한산도 대첩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너무나도 극적인 전개 덕분인지 총 관객수 약 1760만명을 기록하며 국내 상영 영화 중 최고 관객수 1위에 오르게 되었죠
그 이후 8년이 지난 2022년 지금, 영화 명량의 후속작이자 프리퀄인 '한산 : 용의 출현'이 7월 27일에 개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영화 한산은 이 영화 한산은 명량해전 전에 있었던 사건을 다루는 영화로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에 대한 영화라고 하죠
오늘은 이 한산도 대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592년 4월 14일. 왜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카는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그리고 부산진과 동래성, 탄금대 등에서 조선군과 맞붙어 승리했고 파죽지세로 진격해 불과 20일도 안되어 한양이 함락되고 말았죠
하지만 이미 도망간 선조를 잡으려고 뒤를 쫓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 발발 60일만에 평양성마저 함락시켰습니다
그가 평양에 도착했을때 선조에게 한장의 서찰을 보냈는데요
그 내용은 바로 "우리 수군 10만 명이 곧 서해로 도착할 것인데 임금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라는 굉장히 오만방자한 내용의 서찰이었던 것이죠
이는 즉 수군이 도착하면 보급도 하고 얼마안가 의주까지 점령할텐데 선조 니가 어디까지 도망갈수 있겠냐 하며 선조를 조롱했던 것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이런 거만한 내용의 서찰은 얼마안가 개소리임이 밝혀지는데요
서찰을 보낸 이후로 그는 아무데도 못가고 평양성에 갇히고 만것이죠
왜냐하면 기다리던 수군 10만은 커녕 식량보급이나 전쟁물자 보급도 전혀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한산도 앞 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왜의 수군을 개작살내고 조선의 바다를 전부 장악해버렸기 때문이죠
당시 조선군은 육지에서 왜군에 맞서 싸웠지만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왜군은 빠른속도로 한양으로 진격해 선조를 잡아 순식간에 전쟁을 종결시켜버리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이순신에게 쳐맞기전에는 다들 그럴싸한 계획이 있는 법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함대가 사천과 당포, 당항포, 그리고 율포 등에서 왜의 수군을 일방적으로 아작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왜의 수군은 한발짝도 지나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자 다급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고자 수군의 병력을 늘리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용인 전투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에게 대승을 거둔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부산으로 급파 했으며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왜의 수군 최강자로 불리던 '구키 요시타카'를 비롯한 '가토 요시아키'도 부산으로 데려온 뒤 조선 수군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70여척의 배와 구키 요시타카의 40여척의 배, 그리고 가토 요시아키까지 왜의 수군은 구키 요시타카를 중심으로 부산포에 집결했죠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진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48척의 배를 거느리고 출진하자 경상우수사 원균이 함선 7척을 가지고 합세해 조선의 수군 전력은 전함 55척이 되었죠
그런데 용인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조선군과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음력 7월 7일 자신의 함대 70여척을 이끌고 단독으로 출격해 견내량으로 옮겨 그곳에서 정박을 했습니다
왜의 수군이 견내량으로 옮겨왔다는 정보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군 간부들을 소집해 전략회의를 하고 견내량에서 한산도 근처 바다까지 적을 유인한 뒤 일시에 섬멸할 계획을 세웠죠.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는 바다로 길이는 약 4km에 폭이 600m도 안되는 좁은 해협이었던 데다가 심지어 암초도 많고 조류의 흐름도 역류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이 서로 부딪힐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적들과 전투를 벌이기에는 좋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1592년 7월 8일. 이순신은 먼저 판옥선 6척을 왜의 수군이 주둔하고 있던 견내량으로 보냈죠
판옥선을 발견한 적군은 조총을 쏘며 공격을 해댔는데요
이에 판옥선이 슬금슬금 도망치려는 제스쳐를 보이자 그것을 본 적군은, 곧바로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충분히 함정이란것을 눈치챌수 있었겠지만 이미 병력 1500명만으로 조선군 5만명을 격퇴한 용인전투를 경험했던 와키자카는 이미 조선 수군을 얕보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가는 판옥선 6척을 뒤도 안돌아보고 곧장 따라갔던 것이죠
그렇게 좁은 견내량을 지나 거침없이 쫓아오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는 결국 이순신이 파놓은 함정에 제대로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도망치는척 하던 판옥선이 작전 수역인 한산도 앞바다에 진입하자 한산도 좌우의 섬에서 숨죽여 대기하던 조선의 전 함대가 한순간 배를 돌려 학익진을 펼쳤고 와키자카의 함대를 포위한뒤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죠
이에 와키자카의 배들은 모조리 다 격침되었고 왜 수군은 다시 견내량으로 배를 돌리려 했지만 견내량의 좁은 해협을 줄줄이 지나와 길게 늘어선 일본의 함대들은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앞쪽에 있던 함선들은 뒤로 돌리지도 못한채 이도저도 못하고 조선수군의 집중 포화 공격만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조선의 판옥선이 그들의 배로 다가가 화약이 담긴 폭발탄을 던져 넣어 왜의 함선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죠
사방에서 날아드는 포탄에 왜군의 주력선 세키부네는 물론이고 일본군의 주요 인물들이 탑승해 있던 아타케부네 까지 줄줄이 격침되어 전부 한산도 앞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이때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가신인 '와키자카 사헤에'와 '와타나베 시치에몬' 등 중요 지휘관 여럿이 전사했죠
심지어 총대장이던 와키자카 본인도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으며 그는 쾌속선으로 배를 바꿔타고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불화살을 쏘아대며 와키자카를 집요하게 쫓기 시작했죠
와키자카와 왜 수군 400여명은 조선 수군에게 쫓기다가 결국 당시 무인도이던 한산도에 배를 대고 육지로 도망쳐버렸는데요
쫓아오던 조선수군은 왜군들이 버리고간 배들을 불태워 버렸죠
그러자 와키자카의 휘하 장수이던 마나베 사마노조는 자신의 배가 불타버리자 살아 돌아가 아군을 마주할 면목이 없다며 그곳에서 할복해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섬에 갇혀버린 왜군은 먹을게 없어 13일동안 미역과 솔잎만 뜯어먹고 살았고 조선 수군의 눈치를 보면서 숨죽여 지내다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타 뗏목을 만들어 5km나 되는 거친 바다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김해 지역까지 도망칠수 있었다고 하죠
이때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14대손인 와키자카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와키자카는 일본으로 돌아가고나서 이 날의 패배를 기억하기 위해 한산도 대첩이 일어났던 날만 되면 가족들과 다른것을 먹지않고 미역만 먹었다고 합니다
그 전통이 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어져 내려와 한산도 대첩의 날을 '집안 사람들이 미역만 먹는날' 로 기억하고 있다고 하죠
이 한산도 대첩의 결과, 왜선 47척을 불살라버렸고 12척을 나포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피해는 부상 10명에 전사 3명이 다였고 전함의 손실은 전혀 없었죠
이렇게 조선수군의 대 승리로 한산도 대첩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와키자카의 패전 소식을 들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는 와키자카를 구원하기 위해 황급히 함선을 몰아 쫓아오지만 이들 역시 안골포에서 조선의 판옥선 함대에 의해 개박살이 나버렸고 이때도 왜의 전함 40여척을 격침시켜 버렸죠
이 전투가 바로 '안골포 해전' 인데요
고작 3일만에 총 100여척에 달하는 왜의 대함대가 격침되는 치명타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 을 내리게 되었고 조선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완전히 되찾는 결과를 낳게 되었죠
만약 바다에서까지 승전이 없었다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말대로 순식간에 의주까지 밀릴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한산도에서의 대승 덕분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말했던 수륙병진계획도 좌절시켜 버렸고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이 확보하자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 등의 주요 곡창지대도 지켜낼수 있었습니다
또한 육지를 장악하고 있던 왜군때문에 전라도와 충청도의 식량을 운반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 덕분에 해로를 통해 조선군과 명나라군에 식량을 조달할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일본은 제해권을 빼앗기면서 식량과 전쟁물자 보급, 그리고 중요한 병력 충원까지 모조리 막혀버린 것인데요
육로는 의병들에 의해 막혀버리고, 바다는 이순신에게 막혀버리면서 이덕에 기고만장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군대는 이듬해에 평양성을 다시 빼앗길 때까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추위와 싸우며 세월만 보내야하는 상황이었다고 하죠
또한 한산도에서 대승했다는 소식이 조선 각지로 퍼지면서 사기가 꺾여 있던 조선군과 의병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이에 의병 활동도 더욱 활발해 졌죠
해안가에서 거주하던 백성들은 수군 의병이 되어 이순신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으며 근처의 지형이나 바닷물의 조류와 흐름 등을 알려줘 이순신이 전략을 짤 때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수군 의병들은 이후 명량해전에도 많은 도움을 줬는데요
이순신이 그들에게 육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따르지 않고 판옥선 뒤에 자신들의 어선을 대어 배가 많아보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했죠
그렇게 한산도대첩은 조선군이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할수 있었던 정말 중요한 전투였던 것입니다
이순신은 한산도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 되었죠
이 한산도 대첩은 세계의 다른 해전들에 비해 군사학적으로 굉장히 가치가 높은 전투로 바다에서 이토록 정교하게 적들을 유인하고 포위해 섬멸한 전투는 세계사적으로도 드물다고 합니다
한산도 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며 또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강감찬의 귀주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이라 불린다고 하죠
한산도에서 그 유명한 학익진을 펼쳐 단 3일만에 100여척의 왜군 함선을 다 때려부숴버린 한산도 대첩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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