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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이재명. 나라를 위해 한 몸 다 바쳐 친일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려한 독립운동가

by 사탐과탐 2021.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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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처단하려한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이지만 기개가 대단하고 패기가 남달랐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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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 재판정에서 일본인 판사가 한 젊은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피고와 같이 암살을 준비한 흉악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그 젊은 청년은 눈을 부릅 뜨고 일본인 판사를 쳐다보며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야만스러운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일본인 판사는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청년은 또 소리쳤습니다.

"2천만 조선동포들이다!"

 

그러자 재판정 밖에서 그 재판을 구경하고 있던 조선인들이 "옳소!" 라고 외치며 유리창을 부수었습니다.

 

젊은 청년은 또다시 일본인 판사에게 소리쳤습니다.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조선인들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러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청년의 사형이 선고되어 형이 확정되자 그 청년은 “왜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라고 일본인 판사를 꾸짖으며 다시 교도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1910년 9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패기가 남다른 젊은 청년의 이름은 이재명이라는 조선인이었습니다.

 

이재명 독립운동가

 

이재명은 1887년 10월에 평안도 선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에는 평범하게 살다가 1904년 미국에 이민을 가게 되었죠.

 

하지만 제1차 한일 협약과 을사늑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자 빼앗긴 국권을 다시 회복하는데 힘써야겠다는 생각에 1907년 10월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재명의 첫 타겟은 일제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과 함께 서북순행이란 이름으로 평양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죠.

이때가 이토를 암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긴 이재명은 만반의 준비를 하며 이토가 평양에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지나 1909년 2월 1일. 서북순행 중 평양 만수대에 모습을 드러낸 이토 히로부미를

이재명은 총으로 암살하려 했지만 바로 옆에 순종이 서있기도 했고 오발로 인해 이토 외에

생각하지 못한 사상자가 나올 것이 염려스러웠던 도산 안창호는 적극적으로 이재명을 뜯어말리기 시작했죠.

혈기 왕성하고 조국을 위해 한 몸 다 바치기를 원했던 이재명은 결국 안창호의 말을 듣고 훗날을 기약하게 되었습니다.

 

평양 만수대에서의 순종황제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그 해 10월에 안중근에 의해 죽임을 당하죠.

어차피 이토는 그 해에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토가 처단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재명은 타겟을 다시 정했습니다.

그 타겟은 바로 친일 민족반역자 이완용이었죠.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내 오인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친 것이었죠.

급기야 큰 부부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는데 이재명은 아내에게 '이놈의 여편네가 나라가 중한 것을 모른다' 라며 면박을 주다 총 격발 사고가 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김구는 황해도 재령군에 있었는데 이재명이라는 또라이가 총을 쏘며 난동을 부리면서 아내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김구는 노백린과 함께 이재명을 찾아갔죠.

 

김구는 단순히 자신의 말을 안 듣는 아내를 죽이려는 미친놈인 줄 알고 총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사실 실수로 총알이 발사된 사고였는데 말이죠.

 

이재명은 이완용을 죽일 때 쓸 총이라며 돌려달라고 했지만 치기 어린 젊은이의 헛된 열정 정도로만 생각한 김구는 총을 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렸습니다.

 

이재명은 총이 없으면 칼로라도 거사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언제 이완용을 처단할지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909년 12월 22일에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을 서울 종현 천주교회당 (현 명동성당)에서 하게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거기 참석자 명단에 이완용이 있었던 것이죠.

 

친일파 매국노

 

이재명은 신문을 보고 이 정보를 입수했고 이때를 거사의 날로 잡았습니다.

 

이윽고 1909년 12월 22일이 되자 이재명은 속에 칼을 숨긴 채 군밤장수로 변장해 이완용이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오전 11시 30분이 되자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는 이완용을 발견하고 그대로 달려들어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를 칼로 세 번이나 찔러 쓰려트렸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잡히게 되었죠.

이때 이재명은 주위에 몰려든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기도 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중에 이완용과 이재명의 사이에 있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칼에 찔려 사망하게 되었고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곧바로 대한의원으로 실려갔는데 대수술을 받은 뒤 결국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되었죠.

 

그 소식을 들은 김구는 자신이 이재명의 총을 빼앗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 후 이재명은 재판을 받게 되었고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재판

 

이완용 암살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재명의 칼을 맞은 이완용은 남은 생을 폐렴으로 인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고통받다가 죽게 되었죠.

 

다만 안타까운 점은 인력거 꾼이었던 박원문이 희생당했다는 일입니다.

정작 죽어야 했던 인간은 이완용이었는데 살아남았고 살아있어야 할 박원문은 안타깝게 희생되었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었죠.

 

이재명은 훗날 1962년 3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서 독립운동을 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웅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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