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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저우언라이. 마오쩌둥의 2인자로써 그가 싸지른 똥을 수습했던 현대 중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

by 사탐과탐 2023.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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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주은래)는 마오쩌둥의 오른팔이자 2인자로써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망할뻔한 중국을 수습했던 현대 중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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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십 년간 중국의 정치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이렇게 졸렬한 국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주변국들에 민폐를 끼치면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국민들도 겉으로 내색만 하지 않을 뿐 실제로는 정치인들을 매우 혐오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죠 

하지만 그런 중국의 근대 정치인들 중에서도 한 명 만은 많은 중국인들에게 존경할만한 인물로 꼽히고 있으며 주변국에서도 충분히 그럴만하다며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요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중국의 초대 국무총리였던 저우언라이입니다

 

1898년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난 저우언라이는 굉장히 머리가 좋아서 장학금을 받으며 일본과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했을 정도라고 하죠 

프랑스 유학생활 중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1921년 파리에서 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었고 1924년 중국으로 귀국한 그는 국민당에서 군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당시 국민당 정부는 너무나도 막장인 상태였던 데다 장제스가 1차 국공합작을 멋대로 폐기해버리기까지 하자 큰 실망감을 느낀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투신하게 되죠

 

저우언라이는 중국 공산당의 1대 지도자인 천두슈의 지휘 아래 리다자오, 주더, 마오쩌둥, 취추바이 등과 함께 상하이 쿠데타 난창 봉기, 광저우 코뮌 등의 사건을 극복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34년에는 중국 공산당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근거지를 이전하는 대장정을 마오쩌둥 등과 함께 주도했으며 시안 사건 때는 중국 공산당의 대표로 국공합작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와 온갖 고난을 같이 극복했던 탓인지 최고권력자가 된 후 저우언라이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죠

그리고 이런 그의 신뢰 때문에 저우언라이는 훗날 마오쩌둥의 광기로부터 중국의 문화재를 지켜내는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사실상 공산당의 2인자가 된 저우언라이는 탁월한 외교와 보급으로 국공내전을 공산당의 승리로 이끌었고 내전이 종료된 후에는 총리와 외교부장직을 맡아 중국정부의 핵심이자 뛰어난 외교관으로서도 능력을 인정받았죠

특히 저우언라이는 1954년 중국이 앞으로 다른 나라와의 외교노선을 어떻게 할지 원칙을 정한 평화공존 5원칙이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주변 국가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상대방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하며 내정 간섭을 하지 않고 서로 침략을 하지 않는 등 상대를 존중하며 중국의 입지를 다지고 국력을 키우자는 주장입니다

 

만약 저우언라이의 계획대로 중국이 노선을 정했다면 중국은 어쩌면 지금보다는 훨씬 주변국가에 좋은 이미지를 챙기면서 한편으로는 국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중국의 최고지도자는 바로 마오쩌둥이었죠

1958년 마오쩌둥은 중국역사에 길이남을 희대의 뻘짓인 대약진운동을 추진하면서 중국이 가진 산업과 농업 분야의 잠재력을 자기 손으로 날려버리는 동시에 무려 2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굶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미친 계획을 듣고 필사적으로 반대했지만 인간불도저 마오쩌둥은 그의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혔고 그 결과는 처참했죠

 

너무나도 끔찍한 결과에 마오쩌둥이 책임을 지고 잠시 물러나는가 했지만 1965년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이 명나라의 폭군 황제인 가정제를 비판한 연극, 해서파관이 마오쩌둥을 간접적으로 비난한 내용이라는 칼럼을 쓰면서 마오쩌둥의 지지자들을 다시 끌어모으는 사건이 벌어졌고 그동안 다시 일어날 기회만 기다리고 있던 마오쩌둥은 자신의 지지세력인 홍위병들을 앞세워 중국의 역사를 20년 이상 퇴보시켰다고 평가받는 문화 대혁명을 일으켜 그야말로 중국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홍위병들은 당대 중국의 지식인들을 반동분자라는 명목으로 처형해 버리기 시작했고 자기들의 행보를 비판하는 사람도 집단 구타 후 살해해 버렸죠

이때 중국 사회의 엘리트 층이 모두 사라지면서 향후 중국의 30년을 책임질 인재풀이 모두 증발했을 정도였으며 심지어 현 중국의 지배자인 시진핑도 이때 반동분자로 몰리면서 시골로 강제로 낙향해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홍위병들은 중국의 역사와 종교, 유적, 전통 무술, 각종 스포츠, 식문화 그리고 영화, 음악, 연극 등 그야말로 중국문화의 모든 것을 스스로 때려 부수기 시작했는데요

그렇게 수천 년간 쌓아온 중국문화의 모든 것이 다 날아가는 순간 어떻게든 중국의 문화를 지키려 발버둥 친 사람이 바로 저우언라이였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일단 중국의 근본인 문화재라도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저우언라이는 1700년 전 인도의 승려가 지은 절인 영은사에 홍위병들이 들이닥치기 전 입구에 마오쩌둥의 사진을 걸어두게 지시하면서 영은사를 지켜냈으며 명나라와 청나라 왕조 때 지어진 중국의 황궁인 자금성에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홍위병들로부터 자금성을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에게도 경호병력을 보내며 푸이를 노리는 홍위병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죠

 

뿐만 아니라 티벳인들의 정신적 고향이자 역대 달라이 라마의 거주지인 포탈라궁, 중국 불교문화의 정수라 불리는 둔황 막고굴 중국 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의 무덤인 건릉 등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며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릉비 같은 고구려 발해 유적까지 저우언라이가 직접 언급을 하며 보호했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소개해드렸던 것들은 일부에 불과할 뿐이며 저우언라이에 의해 보호된 유적과 유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합니다

 

만약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에게 직접적으로 반발했다면 성난 홍위병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어찌 보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저우언라이를 두고 마오쩌둥의 문화 대혁명을 막지 못한 채 그에게 간접적으로 동조한 비겁자라고 평가를 하기도 하죠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선민의식에 찌들었던 다른 공산당 간부들과 다르게 한족중심주의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중국 내에 있는 소수민족들은 완벽한 평등을 누리고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등 여러 소수민족 자치구와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소수민족 정책과는 정반대의 행보라고 볼 수 있죠

이렇게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도 별로 없이 마오쩌둥과 홍위병이 싸놓은 똥을 수습하다 보니 건강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한 저우언라이는 결국 방광암 선고를 받게 되었고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음에도 점점 건강이 나빠지면서 1976년 1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저우언라이는 현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시진핑 조차도 저우언라이에 대한 칭송을 금지하지 않을 정도라고 하죠

하지만 문화 대혁명 시기 중국의 최고권력자 중 한 사람으로서 마오쩌둥에게 맞서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목숨을 챙긴 위선자라는 평도 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다만 저우언라이는 대약진운동과 문화 대혁명을 초기에는 적극 찬성했지만 뒤늦게나마 이런 잘못된 정책들을 자신의 권한 내에서 또는 마오쩌둥이 노여워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바로잡으려 노력했다고 하는데요

때문에 비록 저우언라이가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오직 자신들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다른 공산당 간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국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우언라이는 한국과도 많은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고 하죠

3.1 운동을 지켜보면서 조선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그는 난카이 대학에 다닐 때 안중근 의사에 대한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으며 황푸군관학교에서 일할 때는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친해졌고 많은 조선인 제자를 두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즘 툭하면 역사를 왜곡하려 시도하는 일부 중국인들과 다르게 발해와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던 중국사회과학원에 역사왜곡행위를 그만두라는 경고를 하기도 했으며 그 일에 관해 북한 측에 공식적으로 사과까지 했다고 하죠

 

1963년 6월 28일 저우언라이는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과의 공식만남에서 중국이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왜곡하려 한 것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중국의 동북쪽에 있는 요하지역이 고구려와 조선의 땅이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역사왜곡이며 이는 모두 중국역사학자의 농간이라며 그들을 비판하기도 했죠

 

그리고 신생 공화국인 중국과 북한이 국경지대를 어디로 할지 협상하는 조중변계조약 때 저우언라이는 사실상 중국의 영토였던 백두산 천지가 조선인의 땅이라는 이유를 들며 백두산 천지의 54.8%를 북한에게 양도했고 두만강 상류 유역의 경계지역을 정하는 것도 북한에게 유리하게 해 줬으며 압록강에 있는 섬들도 대부분 북한에게 내어주는 등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전쟁 때 저우언라이는 북한이 불법으로 일으킨 한국전쟁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전이라 주장했고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삼팔선을 넘어서 반격했을 때는 남조선과 유엔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정에 간섭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보면 그가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 대상은 어찌 보면 같은 공산국가인 북한에 한정된 것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저우언라이를 그리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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