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제는 암군의 기본 소양을 모두 갖춘 교과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여자는 싫증나서 남자까지 탐했던 골치 아픈 황제였는데요.
결국 그로 인해 명나라는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죠.
명나라의 홍치제는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해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홍치제와 효성경황후는 아들을 낳기 위해 관계를 가질 때 온몸을 정결히 하려는 목적으로 목욕재계를 하고 천지신명께 기도를 드렸을 만큼 정성을 다했죠.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전혀 효과가 없었고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면서 시간은 정처 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신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1491년,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죠.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태어난 아기가 바로 오늘 이야기할 인물 정덕제입니다.
정덕제의 이름은 주후조 인데요.
홍치제는 천신만고 끝에 낳은 아들 정덕제가 명나라 4대 암군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테죠.
왜냐하면 주후조는 어릴 적부터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너무 총명해 홍치제와 조정 중신들이 하늘에서 보내준 진명천자라 여기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훗날 그가 황위를 이어받으면 명나라는 무조건 태평성대겠구나 하는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였죠.
하지만 그는 자라면 자랄수록 삐뚤어지면서 방탕하게 놀아나기 시작했는데요.
주후조가 어릴 때부터 그를 보좌하던 환관 유근은 일찍부터 주후조의 방탕한 기질을 눈치채고 그가 좋아하는 진귀한 동물들이나 온갖 놀이기구 같은걸 선물하며 주후조가 하루 종일 노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했고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죠.
그렇게 태자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하니 홍치제의 걱정도 이만저만한게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아들이 하나밖에 없으니 태자 자리에서 폐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시간이 흘러 홍치제는 조정 중신들에게 놀기 좋아하는 아들이 성군이 될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주후조는 15세의 나이에 황제로 즉위했죠.
그는 황제가 된 후부터는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방탕하고 유별난 행동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어릴 적부터 정덕제의 최측근이던 환관 유근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충신들을 조정에서 몰아내버렸으며 그렇게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 온갖 횡포를 휘두르자 당시 사람들에게 '입지황제'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권력을 손에 거머쥐었죠.
유근은 어린황제 정덕제를 꼬셔 자금성 서쪽에 화려하고 웅장한 별궁을 짓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별궁에서 표범을 길러 표방(豹房)이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표범 외에도 호랑이와 각종 동물들을 길러 마치 동물원 같았죠.
또한 200여 채의 전각들 모두 호화스러운 놀이터처럼 꾸몄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자금성에 다시 돌아가지도 않고 그곳에서 조정 업무도 봤다고 하죠.
어쨌든 이렇게 뒤에서 황제를 조종하는 환관 유근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그가 없으면 자신이 누리던 온갖 환락들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근을 처단하지 못한 채 상소들을 계속 모른척하고 있었는데요.
어느 날 천문을 본 양원이라는 신하가 유근을 처단하지 않으면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정덕제에게 아뢰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유근은 정덕제를 찾아가 자신의 반대파이던 조정 중신들을 모함했죠.
그러자 정덕제는 유근의 말을 모두 믿었고 유근을 처단하려고 했던 유건과 사천의 관직을 삭탈했으며 왕악은 귀양 가는 도중에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거의 모든 정적을 없애버린 유근은 대놓고 매관매직을 일삼았죠.
자신에게 바친 뇌물 액수에 따라 관직의 높낮이를 정했습니다.
또한 황제를 알현하려는 신하가 있으면 그에게도 뇌물을 받았으며 신하들이 황제를 알현할 때도 계속해서 감시를 늦추지 않았죠.
유근의 뜻에 반하는 사람은 모조리 모함을 받아 파면 당했고 좌천당하거나 파면 당한 사람도 뇌물을 추가로 바치면 다시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유근이 모은 재물과 권력은 황제에 버금갈 정도가 되었죠.
그의 욕심은 한없이 올라가 모반을 일으켜 자신이 황제가 되려다 발각되어 능지처참에 처해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간신들과 어울려 논 것 외에도 황제로써 체통을 잃는 행동까지 서슴치 않았는데요.
정덕제는 스스로 "주수"라는 이름을 만들어 자신의 부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케에 위무대장군의 직위를 내린 뒤 군대를 이끌고 나갈 때는 주수 이름으로 출진했죠.
또한 주수 이름으로 황제에게 글을 올리기도 했고 황제는 주수에게 상을 내리기도 하는 등
혼자서 주고받고 난리를 쳤습니다.
또한 주수를 태사에 임명하기까지 했는데요.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치자 그들을 투옥시키기도 했죠.
그렇게 그는 어쩔 때는 황제가 되기도 했고 어쩔 때는 대장군 주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불꽃놀이를 엄청 즐겨 하기도 했죠.
1514년 정월에는 엄청난 양의 화약과 폭죽을 준비했다가 폭발해버리는 사고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황제의 침실이던 건청궁이 불에 타버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불에 탄 건청궁을 보고 정덕제는 "멋진 불꽃놀이였다" 라는 어이없는 소리를 했다고 하죠.
그리고 건청궁을 다시 짓기 위해 백성들에게 많은 돈을 걷기도 했습니다.
정덕제는 여느 암군, 폭군들처럼 여자도 엄청 밝혔는데요.
그중에 방중술에 능한 '우영'이라는 색목인이 있었죠.
색목인이란 원나라에서 서역인을 가리키던 말로 터키인, 이란인, 아랍인 등을 일컫는 말이었는데요.
우영은 정덕제에게 "색목인 여자는 하얀 살결이 비단처럼 부드럽고 옥처럼 청결하니 중원의 여자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취하면 분명히 만족하실 것입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정덕제는 크게 기뻐하며 색목인 미녀들을 데려오라 했고 그렇게 12명의 색목인 미녀들과 뜨밤을 보냈죠.
색목인 여자들에 심취한 정덕제는 각지의 제후들에게 집안에 색목인 여자들이 있으면 입궁시키라는 명을 내렸고 신하의 아내나 첩이라 하더라도 색목인 미녀면 강제로 자신의 놀이터인 표방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러자 간신들은 너도나도 색목인 여자들을 정덕제에게 바쳤고 그렇게 표방은 색목인 여자들로 넘쳐나게 되었죠.
색목인 미녀들과 환락의 세월을 보내던 정덕제는 싫증이 나기 시작했는지 임산부와 남자들에게 자신의 성욕을 풀기도 했습니다.
정덕제는 특이하게도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에게도 굉장히 관심이 많았는데요.
전녕(錢寧), 강빈(江彬)등 몇몇 남자들과도 관계를 가졌습니다.
또한 마음에 드는 미소년이 있으면 양아들로 삼았고 정덕 7년에는 그해 한해 동안에만 127명의 미소년을 양자로 삼은 뒤 성까지 주씨로 바꾸기도 했죠.
이렇게 정덕제는 남색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사실 과거 중국 황제들 사이에서는 호남풍(好男風)이라 해서 허구헌날 있는 여자들과의 뜨밤에 싫증이난 황제들이 미소년들에게 눈을 돌린 것인데요.
어느 날 야심한 밤, 정덕제는 강빈의 꼬임에 넘어가 심복들을 데리고 북경을 빠져나간 뒤 선부라는 도시로 갔습니다.
선부는 변방에 위치한 군사 요충지였죠.
그런데 그가 선부로 간 이유는 조정 대신들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 이기도 했고 이런 희희낙락한 삶을 즐기기 위해서는 수도보다는 변방에서 하는게 이목이 덜 집중되기도 했으며 조상이던 주원장과 주체 처럼 자신도 몽골족을 제압하여 대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몽골군이 응주로 공격해 왔을 때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우기도 했었다고 하죠.
어쨌든 그는 반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술과 여색을 탐했습니다.
황제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에 신하들이 간언하자 열받은 정덕제는 150여 명이나 되는 신하들에게 태형을 내리기도 했죠.
나이가 많은 신하들 중에는 이때 매를 맞고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정덕제는 선부 외에도 유림, 서안, 태원 등으로 가서 놀고먹기도 했는데 가는 길에 예쁜여자가 있으면 그녀가 지체 높은 가문의 여식이라 할지라도 모조리 잡아갔고 수시로 민가로 들이닥쳐 부녀자들을 강간하기도 했죠.
그리고 이동 중에 큰집이 나오면 그곳으로 들러 술과 음식 그리고 여자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오기라도 하면 그곳에서 며칠 동안 머물다 가기도 했을 정도였죠.
이렇게 순행하면서 하는 짓에 재미들린 정덕제는 또다시 여러 곳에 순행을 다니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난징까지 내려오는 일이 있었는데 어느 지방에서 머물다 낚시와 뱃놀이를 하기 위해 어느 호수에 들렀죠.
그렇게 뱃놀이를 하며 낚시를 하는 도중 실수로 물에 빠지게 되었고 급하게 신하들이 그를 구출해 주었지만 폐에 물이 차서 염증이 생기는 바람에 병에 걸려 몸져 눕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작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는 죽기 전 남긴 유언은 자신이 하던 행실과 정반대의 말이었는데요.
"지금까지 짐이 한 짓들은 전부 짐에게 책임이 있다. 너희는 짐의 행동을 보고 근신하며 이후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정덕제가 했던 난잡한 생활에 비해서 죽을 당시엔 아들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요.
그에게는 형제 조차 없어서 다음 제위는 사촌동생인 주후총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죠.
주후총은 훗날 가정제가 되는데 정덕제와 마찬가지로 명나라 4대 암군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인물입니다.
그가 죽은 후 명나라는 본격적으로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되죠.
그런데 정덕제는 명나라 4대 암군에 속해있긴 하지만 좋은 평가와 나쁜 평가가 둘 다 있기는 한데요.
비록 노는걸 좋아하고 본인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긴 했지만 어리석은 황제는 아니었고 당시 뛰어난 신하들도 많았었는데 그만 좀 놀아라는 말 외엔 그들의 간언도 대부분 받아들였던 것이죠.
그리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온갖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녔지만 신하들에게서 올라오는 국가의 중요 정책이나 중대사는 자신이 직접 결정했을 정도로 정사를 돌보긴 했습니다.
그리고 국방에 관심이 많아 놀러도 가는 겸 자주 변방을 순찰했으며 스스로 갑옷을 입고 전장으로 나가 군대를 지휘하기도 했죠.
하지만 백성들에게 한 악행들이나 그가 죽고 나서 명재상이던 양정화에 의해 그의 측근들이 대규모로 숙청당했던 것을 보면 후대의 암군들에 비해서는 조금 나았을 뿐 명나라의 멸망에 불씨를 지핀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볼 때 잘한 점도 있지만 결국엔 암군이라 불리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이죠.
명나라의 앞날이 점점 저물게 되는 그 시발점이 된 인물, 암군 정덕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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