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귀족으로 자란 탓에 싸가지는 겁나 없지만 무예는 출중해 20대의 어린 나이에 나라를 괴롭히던 흉노를 개박살 내버린 한나라 명장 곽거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중국의 역사기록을 보면 허풍과 과장이 심한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그중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몇몇 뛰어난 장수들도 있죠.
우리에게도 유명한 서초패왕 항우는 엄청난 무력과 지휘능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장수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그런데 중국의 한나라 시절에 이 항우 못지않은 어쩌면 그보다 더 놀라운 업적을 보여준 엄청난 장군이 있었다고 하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믿을 수 없는 전공을 세우며 끊임없이 자신의 조국을 괴롭히던 흉노를 박살 내버린 한나라의 명장 곽거병입니다.
곽거병은 기원전 140년 한나라의 하동군 평양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그리 대단하다고 할만한 가문은 아니었다고 하죠.
그의 아버지인 곽중유는 하급 관리에 불과했고 그의 외할머니는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 공주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였다고 하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곽거병의 이모인 위자부가 당시 황제였던 한무제의 후궁이 되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지게 되죠.
곽거병은 어렸을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으며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었는데 한무제는 자신의 친족이 된 곽거병의 그런 능력과 성품을 마음에 들어 하며 아꼈다고 합니다.
기원전 123년 한무제는 위자부의 동생인 위청을 대장으로 삼고 흉노 정벌을 시도하게 되는데요.
이때 곽거병 또한 표요교위라는 직책을 받고 흉노 공격에 참여하게 되죠.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한무제의 친족이라는 이유로 그가 공을 세울 기회를 받은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곽거병은 첫 출전부터 그런 의심과 걱정을 단숨에 날려버렸습니다.
흉노의 군대와 벌인 첫 전투에서 8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무시무시한 돌격을 보이며 2천 명 이상의 흉노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인데요.
게다가 흉노의 최고지도자인 선우의 할아버지뻘 되는 자약후산이라는 장수와 선우의 막내 숙부인 나고비를 사로잡는 등 믿을 수 없는 공을 세웠습니다.
자신의 처조카가 한고조 유방 시절 자신들에게 큰 굴욕을 안긴 흉노의 부대를 무참히 박살 냈다는 소식을 들은 한무제는 곽거병을 크게 칭찬하며 1600호의 토지와 관군후라는 벼슬을 내렸다고 하죠.
관군후는 지금으로 치면 사단장의 직위와 비슷하다고 하니 곽거병은 무려 18살의 나이로 사단장에 오른 것인데요.
하지만 그의 활약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죠.
3년이 지나 그의 나이 21살이 된 기원전 121년 곽거병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쌓기 시작합니다.
표기장군으로 봉해진 곽거병은 농서 지방에서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출정해서 6일 동안 무려 1천 리를 나아가며 백병전을 벌인 끝에 적을 모두 박살 내버렸는데요.
전투 중 사로잡은 흉노의 절란왕과 노호왕을 참수해버렸고 그 외에도 죽이거나 사로잡은 병사가 무려 8천여 명이 넘었다고 하죠.
또한 흉노 휴저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금인까지 빼앗아버리며 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줬습니다.
놀라운 점은 그 당시 기록을 보면 '우리 군은 갑옷 하나 잃지 않고'라는 식의 표현이 돼있다는 것인데요.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과장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곽거병의 부대가 아닌 다른 장수들의 흉노 원정 기록을 보면 "우리가 흉노 놈 10명을 족쳤다 그런데 우리 병사 3명이 죽었다" 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 봤을 때 단순히 과장이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곽거병이 그만큼 완벽한 승리를 거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죠.
이때 세운 공으로 곽거병은 2천 호를 더 받아 무려 3,600호나 되는 식읍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해 여름 한무제는 표기장군 곽거병과 합기후 공손오를 북지지역에서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장건과 이광이라는 장수를 파견해서 흉노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광이 4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흉노군 수만 명이 나타나 그의 부대를 포위해버렸는데요.
치열한 전투 중에 무려 절반이나 되는 2천여 명이 전사해버렸는데 그나마 이광이 당황하지 않고 용맹하게 흉노군과 맞서 싸운 덕분에 장건의 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내며 간신히 포위를 벗어나게 되죠.
장건은 늦게 도착한 탓에 참형을 받을 처지가 되었지만 속죄금을 내면서 겨우 죽음을 면하고 서민으로 강등됩니다.
속죄금이 아마 지금의 보석금과 비슷한 개념이라 볼 수 있겠죠.
북지에서 출발한 부대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는데요.
당시 곽거병은 이미 흉노 땅 깊숙이 진격을 한 상태였는데 그의 뒤를 따르던 공손오가 길을 잃어버리면서 곽거병과 합류하지 못한 것이죠.
연락이 끊긴 공손오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곽거병은 과감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바로 공손오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흉노 땅 한복판으로 진격을 해버린 것인데요.
곽거병은 거침없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기련산에 있던 흉노군을 공격했습니다.
그 결과 흉노의 추도왕과 흉노군 2500여 명을 사로잡았고 3만 명이 넘는 적군을 몰살시켜버렸죠.
이후에 이어진 전투에서도 흉노의 다섯 왕을 포함해 그들의 아내와 아들들 그리고 수백여 명의 장수를 사로잡았고 자신들과 맞붙었던 흉노군의 7할을 몰살시켜버리는 경이적인 전과를 올리게 되는데요.
곽거병의 승전 소식을 들은 한무제는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5000호의 식읍을 추가로 하사했다고 합니다.
곽거병을 따라 전투에 참여했던 다른 장수들도 큰 상을 받았고 중간에 길을 잃었던 공손오만이 참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죠.
그도 앞서 말한 장건처럼 속죄금을 내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하네요.
당시 곽거병에게 계속 박살나고 있는 지역의 수비를 맡고 있던 사람이 흉노의 혼야왕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흉노의 선우가 몹시 화를 내며 혼야왕을 죽이려 했죠.
도저히 곽거병을 이길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선우에게 목숨까지 위협받게 된 혼야왕은 차라리 한나라에 항복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이후 벌어진 곽거병군과의 전투에서 8천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죽는 모습을 보자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수만 명의 병사들과 함께 곽거병에게 아예 항복을 해버립니다.
이에 한무제는 자신의 근심거리가 없어졌다면서 곽거병의 공을 크게 칭찬하고 1700호의 식읍을 하사했다고 하죠.
이 모든 승리가 곽거병이 고작 1년 만에 거둔 성과라고 합니다.
곽거병은 군에 몸을 담은지 3년 만에 표기장군이 되었고 5년째에는 아예 대장군과 같은 녹봉을 받았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행보였다고 하죠.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음에도 곽거병이 세운 공이 너무나 컸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고 하네요.
기원전 119년 한무제는 흉노의 땅에서 전투가 오래 지속되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아예 크게 대군을 일으켜 단기전을 노리게 되죠.
그렇게 그해 봄 한나라의 명장 곽거병과 위청은 각각 5만 명의 기병과 수십만의 보병 그리고 이광과 공손하 등 흉노와의 전쟁 경험이 많은 장수들을 모조리 거느리고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그중 위청의 부대가 사막을 건너려던 흉노의 부대를 발견하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곽거병은 가로막는 모든 것을 꿰뚫어버릴 기세로 오직 앞으로 돌격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곽거병은 무려 1천 리를 행군해서 고비 사막을 지나 흉노의 영역을 완전히 가로질러 진군했는데요.
그렇게 미칠듯한 질주를 보여준 그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남쪽에 있는 바이칼호였습니다.
중국 왕조의 장군들 중에서 기원전에 이와 같은 돌진을 보여준 것은 곽거병이 유일했다고 하죠.
세월이 한참 지난 당나라나 명나라 시절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해진 장거리 원정을 그 시절에 해내버린 것인데요.
그 원정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업적이라고 할만한데 더욱 놀라운 것은 제대로 보급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험난한 사막의 모래폭풍을 뚫고 가면서도 부대의 전투력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진격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가로막는 흉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선우가 아끼던 신하인 장거를 사로잡고 흉노의 왕중 하나인 비거기의 목을 베어버렸죠.
이후 흉노 좌대장의 군대와 싸워 그들을 물리치고 그들이 쓰는 깃발과 북을 빼앗았으며 산과 강을 건너 흉노의 왕 3명을 더 죽이고 83명 이상의 주요 장수들을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그렇게 곽거병군이 죽이고 사로잡은 흉노의 숫자만 무려 7만 4천여 명이나 됐다고 하죠.
원정을 떠나면서 사람들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바로 원정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을 먹일 식량문제였는데요.
곽거병은 황당하게도 흉노군을 박살내고 그들이 가진 식량을 빼앗는 것으로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로만 하면 굉장히 간단하고 쉬워보이지만 주변 지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적들의 홈그라운드에서 자칫 잘못하면 사막 한가운데서 말라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죠.
그런 극한상황에서 성공을 거둔 곽거병의 용병술과 상황 판단 능력이 그만큼 대단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젊은 나이로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운 곽거병은 어느 날 24살의 나이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는데요.
전쟁터에서 싸우다 적들의 손에 죽은 것도 아니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기록마저도 없어 아직까지도 그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고 하죠.
원정 중에 오염된 물을 마신 탓에 전염병으로 죽었다는 것이 그나마 가장 유력한 썰이라고 하네요.
곽거병의 용병술은 병법 책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적인 것이었다고 하죠.
한무제가 그에게 오자와 손자의 병법을 배우라고 권했을 때에도 "용병술이란 구체적인 상황에 맞춰 작전을 짜는 것이지 책에 있는 병법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라며 거절했다고 하는데요.
전투에서도 늘 병사들보다 앞장서서 전투에 임할 정도로 용감했지만 어려서부터 궁중에서 자라난 귀하신 몸이라 그런지 병사들을 아낄 줄은 몰랐다고 하죠.
그래서 병사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도 자신은 호화로운 막사에서 연회를 즐길 정도였지만 이상하게도 병사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곽거병의 오만한 카리스마와 그가 가진 뛰어난 능력이 합쳐지면서 병사들에게는 그가 더없이 믿음직하고 용감한 장수로 보인 것이 아닌가 싶네요.
지금까지,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장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 곽거병의 이야기였습니다.
'중국역사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목의 변. 업신여기던 오랑캐에게 명나라 황제가 포로로 붙잡혔던 중국 3대 치욕 사건 (0) | 2022.02.23 |
---|---|
영가의 난. 중국 3대 치욕 사건의 하나로, 흉노족에 의해 한족이 중원에서 쓸려나가고 그 자리에 16개의 나라가 세워진 사건 (0) | 2022.02.21 |
정강의 변. 중국 3대 치욕 중 하나로 오랑캐라고 개무시하던 금나라에 개털린 송나라의 휘종과 흠종 (0) | 2022.02.18 |
의화단 사건. 패기 좋게 서구열강을 상대로 만행을 저지르며 도발했다가 완전 개박살나버린 청나라 (0) | 2022.02.10 |
정덕제. 주색+남색+국고탕진+방탕 등등 암군의 기본 소양을 모두 갖춘 명나라 멸망의 원흉이 된 황제 (0) | 2022.01.12 |
송나라 휘종. 천재 예술가이자 북송멸망의 주역이 된 황제.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암군 (0) | 2021.12.30 |
만력제. 무려 30년 동안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서 명나라를 말아먹은 중국사 통틀어 최악의 암군 (0) | 2021.12.22 |
위안스카이. 두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자 폐지된 군주제를 부활시키려고 스스로 황제가 된 매국노 (0) | 2021.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