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의화단은 부청멸양을 외치며 패기좋게 서양인들에게 만행을 저질렀죠.
서구열강을 상대로 엄청난 도발을 한 대가는 어마무시했었는데요.
청나라가 나락으로 가게 된 의화단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옆 나라 중국은 드넓은 땅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옛날 금나라나 원나라가 강력했던 시절 한족들은 자신들의 수도까지 점령당한 채 영토의 대부분을 빼앗기기도 했죠.
그런데 그 당시에는 한족들이 여진족이나 몽골인들을 이민족이라 부르며 멸시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하나의 중국 원칙 아래 이들을 모두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여기고 있는 상황인데요.
간단하게 말해서 예전의 사건들은 그저 같은 중국인들끼리 치고받았을 뿐 외세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빼앗긴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죠.
때문에 현재 중국에서 자신들이 겪은 최악의 굴욕을 뽑아보라면 대부분 이 사건을 얘기한다고 하는데요.
바로 1900년에 중국이 서구 열강들을 상대로 무모한 도발을 시전했다가 무참하게 털려버리면서 중국인들의 컴플렉스로 남게 된 의화단 사건입니다.
1890년대의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연달아 패하며 당시 열강들에게 숨은 맛집으로 소문이 난 상태였죠.
그래서 미국과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다른 열강들도 줄줄이 청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중이었는데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유럽에서 건너온 기독교 단체들이 청나라인들을 상대로 좋은 말씀 전하러 왔다며 전도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청나라 사람들은 이들 또한 중국을 침략하는 세력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서양인들에 대한 그들의 반발은 점점 커져가기만 할 뿐이었죠.
몇몇 중국인들은 선교사의 활동이 더 활발해지면 중국이 이러다 기독교의 나라가 돼버리고 말 것이라며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세력이 바로 의화단이라는 단체인데요.
이들은 뒤에서 청나라 정부의 사주를 받아 "청을 돕고 함께 양이들을 물리치자!"라는 부청멸양을 구호로 내세웠고 각국의 공사관들과 외국인들에게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죠.
그 결과 188명이나 되는 서양의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무참히 살해당했고 45000명에 달하는 자국민 기독교인들마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자국민과 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의화단의 학살행위에 분개한 서구 열강들은 청나라 조정에 의화단을 진압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요.
하지만 청 조정은 그들을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의화단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당시 의화단은 극심한 잔혹 행위를 저질렀는데 학살과 고문은 기본에 서양인 여성이나 기독교를 믿는 자국민 여성을 붙잡으면 곧바로 옷을 벗기고 돌아가면서 성폭행을 한 뒤에 산 채로 땅에 묻어 죽였다고 하죠.
특히 서양인에 대한 증오가 강했던 의화단은 서양 여성의 경우 단순히 성폭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음부를 짓뭉개는 등 각종 끔찍한 고문까지 한 후에 그녀들을 죽였다고 하는데요.
이 광경을 전해 듣고 극도의 공포를 느낀 서양 여성들은 의화단에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면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는 각오를 할 정도였다고 하죠.
게다가 의화단에서는 단원들에게 서양인 여자 1명을 죽이면 은 50냥을 서양인 아이 1명을 죽이면 30냥을 상금으로 주기까지 했는데요.
때문에 상금을 받기 위해서 의화단 단원만이 아니라 다른 중국인들까지 눈에 불을 켜고 외국인들을 죽이려 치열하게 경쟁했습니다.
당시 기록된 의화단의 만행들만 봐도 서양 남녀를 사로잡으면 옷을 벗긴 후 남성은 성기를 자르고 여성은 음부를 짓뭉갠 후 죽였으며 사로잡은 이들을 굽거나 삶아서 먹기도 하는 등 차마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죠.
의화단의 만행과 이들을 방치해두는 청나라의 태도에 분노한 영국 등의 열강들은 결국 자체적으로 병력을 동원해서 의화단을 진압하기로 결정했는데요.
영국의 해군 사령관 시모어를 지휘관으로 임명한 후 그들의 병력을 베이징으로 이동시키려 했죠.
당시 청나라 최고 권력자였던 서태후는 그때까지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오히려 병사들을 동원해 서구 열강의 병력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으며 서양과 화친을 맺자는 황제 광서제의 의견을 무시하고 의화단과 손을 잡기까지 합니다.
청나라 조정은 1900년 6월 21일 열강 세력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며 베이징에 있는 외국인 지역을 포위해버렸는데요.
이에 독일 제국의 공사 클레멘스 폰 케텔러가 청나라 조정에 항의하러 가는 도중 의화단 무리의 공격을 받고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죠.
의화단의 계속되는 자국민 학살에 분노한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8개국은 서로 동맹을 맺고 청나라에 연합군을 파병하게 되는데요.
당시 치열하게 이권다툼을 하던 열강들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든 것을 보면 청나라가 도발 능력 하나만은 제대로였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나라로서는 그들 중 하나의 세력도 막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연합까지 해서 공격을 해왔으니 당연히 그들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죠.
결국 선전포고를 한지 2달이 채 되기도 전인 8월 14일에 베이징은 연합군에게 함락당하게 되는데요.
황제인 광서제는 수도에 남아 그들과 화친을 시도하려 했지만 서태후와 신하들은 그런 광서제를 반강제로 끌고 가며 장안으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렇게 무정부상태가 된 베이징에서 연합군은 대대적인 학살과 파괴를 시작했죠.
약자들을 상대로나 힘을 쓸 줄 알았던 의화단은 당연히 전멸했고 다른 중국 민간인들조차 목숨을 잃은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베이징을 점령한 후 8개국 연합군은 3일간 자유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이때 베이징의 이화원 등 많은 건물들이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었다고 하죠.
특히 독일군이 제일 심했고 그다음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군대, 러시아 군대순이었으며 미국과 일본의 군대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고 하네요.
연합군들은 수시로 베이징 시내의 거리와 집들을 돌아다니며 중국인들을 납치하거나 강간하는 등의 보복을 했다고 합니다.
납치당한 중국인들은 남자의 경우 강제 노역을 하게 되었고 여자들의 경우에는 강제로 서양인들의 첩이 되었다고 하죠.
특히 이중 프랑스군의 악행이 가장 유명한데 이들은 청나라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변발된 머리가죽을 뜯어버렸다고 하는데요.
당시의 일이 기록된 책에 의하면 프랑스군은 의화단 단원을 죽인 후 변발이 붙은 머리가죽을 트로피처럼 장식하거나 장교들이 타는 말의 꼬리를 장식하는데 썼다고 하죠.
실제로 이들 부대의 행사 사진을 보면 실제 변발로 말꼬리를 장식한 사진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박살이 나버린 청나라 정부는 굴욕적인 화친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죠.
열강들은 의화단에게 희생된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배상 그리고 의화단뿐만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관리들까지 처벌할 것을 요구했는데요.
제대로 반항할 힘조차 없었던 청나라로서는 속절없이 그들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열강들은 청나라와 신축 조약(베이징 의정서)을 체결하게 되는데요.
이때부터 열강들은 중국에 대규모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도를 장악했으며 많은 영토와 이권들을 가져가게 되죠.
이 모든 사태의 원흉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서태후는 막상 청나라가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이 모든 책임을 의화단에게 뒤집어 씌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대규모의 숙청을 행했다고 하는데요.
의화단을 지원해 준 산동순무 육현은 처형되었으며 황족 중에서 의화단을 지지했던 재의는 아들 부준과 함께 신강으로 추방되었죠.
그리고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은 독일의 외교관이 사망했던 사건 때문에 독일까지 가서 사죄를 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단순히 전쟁에서 패배하고 이권을 뺏긴 수준이 아니라 열강들의 반식민지 상태나 다름없었다고 하죠.
그래서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이대로는 안된다는 절박한 의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식인들은 서구의 문물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한편 사실상 서구의 바지 사장으로 전락해버린 청나라 정부에게 깊은 실망감을 느꼈는데요.
그 결과 한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가 새롭게 등장했고 결국 청나라는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죠.
지금까지 중국인들이 가장 굴욕적으로 느끼는 일중 하나라는 의화단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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