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의 난, 토목의 변과 함께 중국 3대 치욕으로 여겨지는 정강의 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랑캐라며 개무시하던 금나라에 탈탈 털린 송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중국의 한 언론에서 "중국은 지난 5천 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미중 무역전쟁에서도 결국 승리할 것이다"라는 멘트를 남겼는데요.
하지만 그들의 주장과 다르게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중국이 외세에 의해 치욕을 당한 기록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흔히 3대 굴욕 사건이라 불리는 정강의 변과 토목의 변 그리고 영가의 난인데요.
그중에서도 오늘 다룰 내용은 1126년 북송 시절 중국이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패해서 수도가 함락되고 송나라의 황제와 황족들이 모두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정강의 변입니다.
이 사건의 이름이 정강의 변이 된 이유는 당시 북송이 정강이라는 연호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이 사건이 발생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11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당시 여진족의 지도자였던 완안아골타는 통일국가인 금나라를 건설하며 초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죠.
그리고 망해가고 있던 거란족의 요나라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는데요.
그러자 북송의 황제 휘종은 요나라에 바치던 공물을 금나라에게 바치면서 같이 손을 잡고 요나라를 협공하자고 제의했죠.
금나라 입장에서도 딱히 손해 볼 것은 없는 제안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이를 승낙했습니다.
당시 휘종과 송나라 조정은 여진을 이용해 거란을 제압하고 자신들의 오랜 소원이었던 연운 16주 지방 되찾기를 성공해 북송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하지만 당시의 송나라 군대는 단순히 머릿수만 많았을 뿐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 북송은 기본적으로 학문을 최고의 가치로 두며 무인들을 낮춰보는 문치 위주의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요.
때문에 국방력이 약해진 송나라는 외세의 침입을 제대로 막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가까운 나라들에 은이나 비단 같은 조공을 매년 몇 차례나 보내면서 그들의 침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니 송의 재정상태는 갈수록 나빠질 수밖에 없었고 조공을 마련하느라 삶이 피폐해진 농민들은 방랍의 난 같은 농민반란을 계속 일으키게 되죠.
여러 번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송나라의 군대는 더욱 약해져서 망해가기 직전인 요나라조차 이길 수 없는 수준이 돼버렸는데요.
때문에 송나라는 금나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요나라를 공격했지만 싸움을 거는 족족 패배하기만 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심지어 이때 당시의 요나라 군대는 제대로 된 정규군도 아닌 피난민들로 이루어진 임시 군대에 불과했다고 하죠.
이런 임시 부대 수천 명에게 무려 10만 명의 송나라군이 패배했다고 하니 당시 송나라군의 전투력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짐작이 됩니다.
먼저 협공을 제안해놓고 요나라에 털리기만 하는 송나라의 꼴을 본 금나라는 화를 펄펄 내며 바로 사신을 보내 송에 항의했는데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던 송나라는 여태 보내던 공물의 양을 훨씬 많이 늘려서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겨우 금의 화를 가라앉히는데 성공했죠.
그렇게 1125년 요나라는 금과 송의 협공을 받아 마지막 황제였던 천조제가 금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히며 멸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송은 요가 멸망하자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꿔버렸는데요.
금에게 바치기로 약속한 공물은 바치지도 않은 데다 요나라의 천조제에게 사람을 보내서 금의 내분을 조장하는 정치공작까지 펼쳤던 것이죠.
이 모든 사실이 드러나자 참고 참았던 금의 분노가 드디어 폭발합니다.
그길로 즉시 군대를 출발시킨 금나라는 자신들을 막으러 온 북송의 군대를 가볍게 쓸어버리고 수도인 변경(개봉)을 포위해버렸는데요.
평소 나랏일은 신하들에게 맡긴 채 사치품과 미녀에만 관심을 보이며 풍류천자라 불리던 송의 황제 휘종은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에서조차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휘종은 곽경이라는 사기꾼 도사에게 육갑신병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진법을 전수받고는 이 진법만 있으면 금나라군쯤은 가볍게 이길 수 있다며 무모하게 덤벼들었다가 무참히 박살이 나버렸죠.
믿었던 육갑신병마저 무너지자 휘종은 잽싸게 자신의 장남인 흠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는 남쪽 지방으로 피난을 가버렸는데요.
얼떨결에 황제가 된 흠종은 하북과 하동지방의 영토를 내주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겨우 금나라와 화친을 맺게 되죠.
이후 흠종은 사태를 이지경까지 만든 주범인 간신들을 모두 처형하거나 유배 보내버립니다.
그렇게 흠종은 아버지 휘종보다는 좀 나은 모습을 보이는듯했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는데요.
자신들의 처참한 상황도 모르고 계속해서 금과 싸우자고 주장하는 멍청한 대신들의 의견을 결국 받아들이며 금과의 약속을 파기해버린 것이죠.
이 소식을 들은 금은 크게 분노해 즉시 군대를 보냈고 단순히 포위만 하던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바로 변경을 공격해버립니다.
그렇게 8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끝에 1126년 11월에 결국 송의 수도 변경이 함락돼버렸죠.
이후 금나라는 송나라의 재상이었던 장방창을 협박해 '위초'라는 괴뢰정권의 황제로 즉위시키고 그를 바지 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휘종과 흠종을 포함한 북송의 황족들과 관료들 3천 명을 모두 포로로 끌고 갔는데요.
이때 변경에서 붙잡힌 송의 관료와 황족들은 반강제로 장방창의 즉위를 지지하는 서명을 해야만 했다고 하죠.
그중 딱 한 사람만이 '송나라의 황제가 될 수 있는 건 오직 조 씨뿐이다'라며 반대했는데 재밌는 사실은 이 인물이 바로 훗날 송의 명장 악비에게 누명을 씌우며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간신 진회라는 것입니다.
금나라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비참한 포로생활을 해야만 했고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휘종은 도교에 심취해 나랏일을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의 혼덕공이라는 모욕적인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어머니와 황후들은 모두 기방으로 보내져 여진족에게 희롱당하는 수치를 당하게 되죠.
이후 송의 수도였던 변경을 비롯한 화북 지역은 금나라가 점령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애초에 금나라의 바지사장 역할로 세워진 장방창의 위초는 송의 백성들에게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했죠.
때문에 장방창은 금나라로 끌려가지 않았던 황족들 중 과거 폐위당했던 소자성헌황후 맹씨를 다시 황태후로 복위시키고 이를 통해 정통성을 가져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황태후 자리에 오른 맹씨는 정강의 변 당시 다른 지역에 있었던 탓에 포로 신세를 면한 휘종의 아홉째 아들 강왕 조구에게 "장방창은 정통성과 명분이 없는 황제이니 그대가 황제가 되어달라"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데요.
이후 강왕은 남쪽으로 탈출한 신하들의 추대로 황제 자리에 올랐고 황태후에게 받은 편지를 읽으며 자신의 정당성을 알렸습니다.
그렇게 송나라는 완전한 멸망을 간신히 피한 채 남쪽에서 명맥을 이어나가게 되죠.
자신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송의 움직임에 격노한 금나라는 또다시 송을 침공하게 되는데요.
새롭게 송의 황제가 된 고종은 필사적으로 저항해 봤지만 애초에 송의 군사력으로 금에 대항한다는 것은 무리였죠.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금나라에 당한 송나라는 결국 피난을 가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분노한 금은 곱게 그들을 보내주지 않았죠.
장강을 건너 계속해서 고종을 추격한 그들은 양주와 남경 등의 영토를 연달아 점령해버리면서 도망친 고종을 아예 바다 너머로 쫓아낼 기세였는데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금나라 병사들은 드넓은 평야가 많은 북쪽 지방과 달리 강과 하천이 많은 남쪽 지방의 지리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송의 명장 악비와 한세충 등이 그들의 공격을 잘 막아내는 사이에 여진족들이 비어있던 북쪽 지역을 약탈하며 쑥대밭을 만들어버린데다 한족들이 반란까지 일으키게 되면서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되죠.
할 수 없이 금나라는 기껏 차지한 개봉과 황하 이남의 땅을 포기하고 다시 하북으로 퇴각하게 되는데요.
이후 송나라와 화친을 맺으면서 북쪽 지역은 금나라가 그리고 남쪽 지역은 송나라가 차지하는 형세를 이루게 됩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나왔다고 평한다고 하죠.
지금까지 중국 역사상 최대 치욕 중 하나라 불리는 정강의 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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