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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마오안잉. 한국전쟁 한가운데서 명령을 무시하고 계란 볶음밥을 해먹다 죽은 마오쩌둥의 아들

by 사탐과탐 2022.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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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안잉은 마오쩌둥의 아들인데요.
중국 최고의 지도자의 아들이다 보니 너무 건방졌습니다.
그러던 중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명령을 무시하고 계란 볶음밥을 해먹다 죽어버린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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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4일 중국의 파워블로거이자 요리사인 양강은 한국에도 잘 알려진 요리인 양저우 볶음밥을 만드는 법을 소개하는 영상을 올렸다가 중국의 네티즌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필 그 영상을 올린 날이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마오쩌둥의 큰아들 마오안민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조롱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된 것이죠.

 

그런데 볶음밥과 마오안민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중국인들이 저렇게나 화를 냈던 것일까요?

 

마오안민은 1922년 10월 24일, 마오쩌둥과 그의 두 번째 부인 양카이휘 사이의 첫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마오쩌둥은 1927년 추수봉기 사건을 일으켰다가 봉기가 실패한 탓에 다른 지역으로 도망갔고 그의 어머니 양카이휘는 1930년 마오쩌둥과 대립하던 국민당에 사로잡히며 처형당하게 되죠.

 

때문에 마오안민과 그의 동생은 국민당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도망갔으며 이후 그곳에서 공산당 비밀조직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1936년 마오안잉은 파리로 건너갔다가 얼마 후 다시 모스크바로 갔고 그곳에서 세르게이 마오라는 가명으로 공부를 하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소련군에 들어가 동부전선에 참전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중국으로 돌아와 1949년 10월에 류쓰치라는 여성과 결혼하게 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 마오안민은 자신의 똘끼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는데요.

6.25전쟁이 일어난 후 중국에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인민지원군의 파병이 결정되자 마오쩌둥은 마오안민을 인민지원군에 입대시키기로 결심합니다.

 

마오안민이 자신의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게 참전 경력을 쌓도록 할 생각이었죠.

1950년 10월 7일 밤에 마오쩌둥은 바로 다음날 출정을 앞두고 있는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를 초대했습니다.

펑더화이는 단순히 자신을 격려하기 위한 자리 정도로 생각하고 나왔지만 마오쩌둥은 갑자기 마오안잉을 데려가라는 말을 꺼냈죠.

 

펑더화이는 처음에 마오쩌둥이 농담을 한 줄 알고 "저는 주석님의 집에 병사를 모집하러 온 게 아닙니다. 주석님을 모병관으로 임명한 적도 없습니다." 라며 웃어넘겼는데요.

그런데 그 자리에 같이 있던 마오안잉이 저는 사령관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인재라고 허세를 부리며 정말로 지원을 할 생각이라고 진지하게 나섰고 그때서야 장난이 아니란걸 깨달은 펑더화이는 기겁을 하게 되죠.

 

혹시라도 마오쩌둥이 가장 아끼는 맏아들을 전쟁터에 데리고 나갔다가 사고라도 터지면 여러 사람이 피를 볼게 뻔했기에 통역병 정도면 몰라도 전투원으로 참전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끝에 결국 사령부의 통역장교로 그를 데려가기로 합니다.

그렇게 하고도 펑더화이는 불안한 마음에 밤새 잠을 못 이뤘다고 하죠.

 

다른 공산당 고위 간부들도 마오안잉이 위험한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걱정하며 마오쩌둥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 봐달라고 건의했지만 마오쩌둥은 "내 아들을 참전시키지 않으면 누가 전쟁터에 간단 말인가? 그는 어쨌든 마오쩌둥의 아들이다." 라고 하며 참전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오안잉은 사령관 비서 겸 러시아어 통역관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죠.

 

마오안잉이 마냥 허세만 부린 것은 아니었던지 생각보다 뛰어난 러시아어 실력을 보이면서 그가 활동할 당시 인민지원군 지휘부와 소련 군사고문단과의 의사소통은 아주 자연스럽게 잘 이뤄졌다고 합니다.

다만 보안상 그가 마오쩌둥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고 하죠.

중국 인민지원군은 참전 이전부터 미국 공군의 압도적인 제공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한반도에 진입한 이후 미군의 정찰기와 폭격기에게 포착되지 않기 위한 많은 대책을 세웠다고 하는데요.

인민지원군의 사령부 또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부사령관 홍쉐즈는 사령부 요원 전체에게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다 마치고 이후 날이 밝으면 절대 난방이나 요리를 위해 연기를 피우지 말아야 하며 공습경보가 내려지면 방공동으로 신속히 대피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중국 최고 지도자의 아들로 태어나 이전부터 개념이 없었던 마오안잉은 이런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다고 하죠.

툭하면 늦잠을 자는 것은 물론이고 방공동으로 대피하는 것도 마지못해 설렁설렁 움직이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총사령관인 펑더화이를 사석에서 '라오터우'(영감, 늙은이)라고 거리낌 없이 불러댈 정도로 똥오줌을 못 가렸다고 하죠.

 

게다가 마오안잉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압도적인 화력을 갖춘 적들의 무서움을 알고 있던 고위 장교들과 달리 독소전쟁 말기에 이미 소련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진 후에 뒤늦게 참전해 깔짝댄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미 공군의 위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1950년 11월 24일 늦은 오후 미 공군의 P-61 정찰기 2대가 인민지원군 사령부 상공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목격되었는데요.

 

미 공군이 사령부 위치를 정확히 알고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홍쉐즈는 다음날 날이 밝는 대로 폭격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비상 경계령을 내렸습니다.

지시에 따라 사령부 요원들은 모두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밥을 챙겨 먹고 방공동으로 피신했죠.

그나마 이때까지는 마오안잉도 홍쉐즈의 지시에 따라 방공동에 들어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오전 10시가 넘도록 폭격이 이뤄지지 않자 사실은 미군 정찰기들에게 들키지 않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며 경계가 느슨해지기 시작했죠.

때마침 그때 인민지원군의 총사령관인 펑더화이에게 북한군의 전선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박일우가 고생이 많으시다며 바구니에 계란 10알 정도를 담아 선물로 보냈습니다.

 

고작 계란 10알이 무슨 선물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전시상황이었던 데다가 중국군이나 북한군 모두 제대로 된 물자 보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선한 계란은 생각보다 더 귀한 식재료였다고 하죠.

하지만 펑더화이는 그 귀한 계란을 자신이 먹지 않고 부관에게 명령해 '부상병들에게 이걸로 계란죽을 쑤어먹게 하라'라며 양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오안잉이 사령관 펑더화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그 계란 바구니를 들고 가버렸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감히 동맹군 부사령관이 총사령관에게 보낸 선물을 일개 장교가 중간에서 가로채가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그 선물은 총사령관이 부상병들을 위해 양보한 것인데 말이죠.

하지만 그가 마오쩌둥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마오안잉을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계란을 자신의 개인 막사로 가져온 마오안잉은 조그만 화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피워 계란 볶음밥 요리를 하고 있었다고 하죠.

마오안잉의 동료인 가오뤼신은 아직 경보가 해제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며 그를 말렸지만 마오안잉은 "예전에 내 아버지 마오쩌둥은 국민당의 비행기가 자주 공습을 오는 상황에서도 방공동에 대피하지도 않은 채 계속 일을 했다고 한다.

 

나도 그런 아버지를 본받아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뻘소리를 하며 계속해서 요리를 했지만 마오안잉은 그의 아버지처럼 운이 좋지 못했죠.

때마침 그 위를 날고 있던 미군의 B-26 4기가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수상하게 여기고 그곳에 폭격을 퍼부어버린 것인데요.

 

당시 마오안잉과 같이 있다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청푸는 "마오안잉은 난로 옆에서 계란 볶음밥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문밖에서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빨리 도망치라고 소리쳤지만 마오안잉과 가오뤼신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탁자 밑으로 숨었다가 폭탄 세례를 맞았다 일찌감치 도망쳐 나왔더라면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라며 당시를 회상했죠.

 

마오안잉의 죽음을 두고 중국 정부에서는 그는 사령부 건물에 두고 온 기밀서류를 챙겨오기 위해 용감하게 뛰어들었다가 숭고한 죽음을 맞은 전쟁영웅이라며 그를 포장하기 바빴다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빼먹은 기밀서류가 있었다고 해도 폭격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무려 수십 분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서류를 가져오는 것 자체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릴 일도 아니었다고 하네요.

 

서류를 가지러 갔다가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계란 볶음밥이라도 해먹은게 아니었다면 말이죠.

지금까지 마오쩌둥의 장남인 마오안잉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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