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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곽자의. 망할 뻔한 당나라를 몇 번이고 되살린 전설적인 당나라 최고의 무장

by 사탐과탐 2022.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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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뻔한 당나라를 몇 번이고 되살린 전설적인 당나라 최고의 무장 곽자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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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토사구팽이라는 단어를 알고 계시나요?

토사구팽이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 그 목적에 이용된 도구나 사람이 쓸모 없어지면 미련 없이 제거해버린다는 뜻입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를 세운 후 한고조 유방에게 죽임을 당한 명장 한신과 조조에게 빈 도시락 통을 받고 목숨을 끊은 순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들과는 다르게 엄청난 공을 세운 전쟁영웅이었음에도 처신을 너무나도 잘해 황제에게 변함없는 믿음을 받으며 죽는 그 순간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다 간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요

바로 당나라가 낳은 희대의 먼치킨이라 불리는 곽자의입니다

 

곽자의는 전쟁터에서 지휘관으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상대와의 교섭에도 능한 뛰어난 외교력 그리고 문무를 겸비한 다재다능함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인재로 평가받고 있죠

하지만 그런 엄청난 평가를 받는 것에 비해 58살까지 그의 행적은 매우 평범했다고 하는데요

 

애초에 곽자의의 집안부터가 그저 그런 가문이었다 보니 그가 관직생활을 언제 시작했는지조차 뚜렷하게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가 관직생활을 하게 된 것은 측천무후가 만든 '무거'라는 시험에 합격하면서부터라고 하죠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살던 곽자의의 나이 59세 때 그와 당나라 모두에게 큰 전환점이 되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난이 일어날 당시 안록산은 3개의 절도사직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려 18만 명의 병사들을 부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죠

게다가 돌궐과 거란, 발해에서 항복한 병사 등 여러 이민족 병사들까지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755년 겨울 안록산의 15만 대군의 진격을 개시하자 태수 안진경이 지키는 평원 지방을 제외한 하북의 모든 지역이 안록산에게 항복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황제였던 현종은 그때까지도 안록산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부하들이 알아서 난을 진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죠

 

그 사이에 안록산은 하북을 지나 진류, 형양 등 중원지역까지 모조리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안록산이 황제가 있는 수도 장안에서 멀지 않은 낙양으로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때서야 봉상청이라는 장수를 대장으로 삼고 5만 명의 병사를 소집해서 보냈지만 그마저도 급하게 긁어모은 조잡한 병력이었기 때문에 최정예인 안록산군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죠

 

봉상청은 허접한 병사 5만과 최정예 병사 15만의 싸움이라는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버텼지만 결국에는 낙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뒤늦게 합류한 고선지라는 장수와 함께 장안으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인 동관만이라도 지키고자 그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후 안록산군이 동관을 공격했지만 고선지는 이를 잘 막아냈죠

 

그런데 이때 고신지와 같이 왔던 변령성이라는 환관이 고선지와 봉상청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 채 낙양을 포기했다며 거짓으로 보고를 올리게 되는데요

멍청한 황제와 조정 신료들은 환관의 말만 믿은 채 고선지와 봉상청을 처형해버렸고 얼마 후 동관에 이어 수도인 장안까지 함락당하게 되죠

 

거짓 보고를 올린 환관 변령성은 안록산에게 항복해버렸으며 황제와 신하들은 급하게 사천지방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나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롭던 당나라를 구하게 된 인물이 바로 곽자의였죠

안록산은 처음 난을 일으킬 당시 병사들을 둘로 나눠 사사명이라는 장수에게 5만 병력을 줘서 태원 방향으로 보냈으며 자신은 낙양으로 진격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사사명을 지원하기 위해 고수암이라는 인물을 추가로 보냈는데 이때 곽자의가 순식간에 고수암의 부대를 격파해버리며 전투가 시작된 이후 당나라에 처음으로 승리를 안겨주게 되죠

얼마 후 곽자의는 하동지역에서 대동병마사 설충의가 이끄는 부대를 박살내고 756년에는 사사명이 이끄는 5만 명의 정예부대마저 격파해버립니다

 

이후 하북지역의 모든 성들을 다시 빼앗은 곽자의는 아사나종례가 이끄는 이민족 부대마저 물리쳤는데 무려 3만 명의 이민족 병사가 목숨을 잃고 만명이나 되는 포로를 사로잡았다고 하죠

757년에는 하동지역까지 회복하는데 성공한 곽자의는 안수경의 2만 기병과 안경서의 10만 대군까지 모두 격파하며 마침내 장안과 낙양을 모두 되찾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눈부신 전공을 세우면서 마침내 군부 내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 곽자의였지만 그를 시기하는 주변 인물들의 견제 때문에 잠시 고난을 겪기도 하는데요

758년 안록산의 부하였던 사사명이 또다시 난을 일으켰고 다음 해에 벌어진 상주 안양하 전투에서 사사명의 5만 부대가 명나라의 60만 대군을 박살내버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워낙 말도 안 되는 패배였다 보니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비난의 화살이 곽자의에게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죠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곽자의가 패전의 책임자로 거론될 이유는 거의 없었습니다

곽자의는 연합군에서 후방 수비를 맡았으며 앞에 있던 선봉부대를 뚫고 진격한 사사명의 군을 상대로 후방을 지키고 아군의 퇴로를 유지한 끝에 하양을 지켜내는데 성공함으로써 오히려 장수들 중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된 공적을 세웠기 때문이죠

 

황제였던 당숙종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곽자의에게 동쪽 지역의 군권을 책임지는 총사령관 직위를 내리고 그곳의 관리를 맡기려 했지만 그를 시기하던 어조은이라는 신하를 비롯한 다른 간신들이 계속해서 곽자의를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곽자의는 가지고 있던 직책마저 내려놓은 채 장안으로 돌아와 4개월이라는 시간을 날려버리게 되죠

 

하지만 그 당시 당나라의 상황은 곽자의가 계속 쉴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763년 무려 20만이나 되는 토번군이 당나라를 침공해왔고 당은 또다시 수도인 장안이 함락당한 채 황제인 대종마저 섬주로 피난 가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인데요

당 대종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쉬고 있던 곽자의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곽자의는 급히 병력을 모집해 봤지만 그 수는 4천 명에 불과했고 20만인 토번군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죠

하지만 곽자의는 거침없이 장안을 되찾기 위해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다만 곽자의도 이 정도 병력으로 장안에서 토번과 정면 승부를 하기엔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치 많은 수의 병사로 그들을 포위하는듯한 위장전술을 펼치며 적들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를 기다렸죠

 

마침 당시 토번군이 점령하고 있던 장안은 적들에게 많은 약탈을 당하며 제대로 된 도시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던 데다 심지어 토번의 병사들 사이에서는 전염병까지 퍼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유명한 곽자의가 자신들을 상대하러 온다는 소문을 듣자 토번군은 얻을게 별로 없는 싸움을 하느니 차라리 퇴각하는게 낫다고 생각하며 결국 장안에서 철수하게 되죠

 

불과 수천의 병력밖에 없는 상황에서 곽자의의 명성만으로 20만의 토번군을 퇴각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당나라의 고난은 여전히 계속되었는데요

바로 다음 해인 764년에 사사명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복고회은이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죠

당나라에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곽자의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공교롭게도 복고회은을 따르던 삭방군의 병사들은 평소 곽자의를 마치 자신의 아버지처럼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곽자의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의 사기는 빠른 속도로 떨어졌으며 많은 병사들이 곽자의에게 항복하기 위해 도망치기 시작했죠

복고회은은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이끌고 태원과 유차라는 지역을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마저 부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자 300명의 병사만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렇게 이번에도 곽자의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난이 진압되는 듯 보였죠

하지만 복고회은은 포기하지 않고 위구르와 토번까지 끌어들여 1년 뒤 수십만 명의 연합군을 끌고 또다시 당나라를 침공했습니다

압도적인 병력 앞에 절망하던 황제와 신하들은 결국 또다시 곽자에몽을 찾게 되는데요

그렇게 조정의 요청을 받은 곽자의는 병사 수의 차이가 워낙 심각해서 이번에도 정면 승부를 하기는 힘들다고 판단 상대편이 연합군이라는 사실을 이용해 그들을 분열시키려는 계책을 세우게 됩니다

 

이후 곽자의는 위구르족에 대화를 요청하게 되는데 위구르족은 연락을 보낸 사람이 정말 곽자의가 맞는지 믿을 수 없으니 진짜 곽자의가 맞다면 혼자서 자신들의 진영으로 오라는 청을 하게 되죠

당나라의 모든 장수들은 너무 위험하다며 곽자의를 말렸지만 곽자의는 어차피 싸워서 이기기는 힘든 상황이니 이 방법밖에 없다며 오히려 부하들을 설득하고 홀로 적진으로 출발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안록산의 난 시기부터 곽자의에게 상당한 호감과 존경심을 갖고 있던 위구르족은 협상을 하러 온 인물이 정말로 곽자의라는 것을 알게 되자 크게 놀랐고 협상 끝에 결국 곽자의와 당나라의 편에 서게 되죠

이 사실을 알게 된 토번군은 그 길로 도망가기 시작했는데 곽자의와 위구르 연합군은 이들을 끝까지 추격해서 5만 명을 죽이고 1만 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리게 이로써 곽자의는 모두가 인정하는 당나라의 수호신과 같은 존재가 되죠

 

이후 781년에 곽자의가 사망할 때까지 16년 동안 당나라의 어느 누구도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그에게 감히 대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곽자의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당시 황제였던 당대종은 자신의 딸 승평공주를 곽자의의 아들 곽애와 결혼시켰는데 하루는 곽애가 승평공주와 부부싸움을 하던 도중 "네가 그토록 건방지게 구는건 네 아버지가 황제이기 때문이냐? 내 아버지는 황제 자리에도 오를 수 있지만 굳이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소리치게 되죠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승평공주는 아버지인 대종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모두 일러바쳤는데 보통의 경우라면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집안이 몰살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죠

하지만 대종은 오히려 딸을 달래며 "네 남편의 말이 맞다 그가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천하는 그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된 곽자의가 황제를 찾아와 죄를 청했지만 황제는 아녀자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쓸 것 없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하죠

 

이후 곽애는 아버지로부터 직접 곤장 수십 대를 맞는 벌을 받았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당나라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곽자의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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