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목의 변 또한 중국 3대 치욕 사건입니다.
업신여기던 오랑캐에게 명나라 황제가 포로로 붙잡혀버린 사건이죠.
먼 옛날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들은 강대한 권력을 바탕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절대자들이었죠.
황제가 다스리는 영토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떠받들어 모셨기 때문에 가히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그런 황제들이라고 해서 굴욕을 당하는 일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로 옆 나라인 중국의 황제들만 해도 다른 민족들의 침입을 받고 수모를 당한 기록을 의외로 자주 볼 수 있죠.
오늘 영상에서 소개할 내용도 무려 제국의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민족이라 무시하던 오이라트 족에게 포로로 잡히는 참사가 발생하며 중국의 큰 흑역사 중 하나로 남게 된 토목의 변 사건입니다.
15세기 중반 명나라는 북서쪽에 있는 유목 민족들의 국가인 오이라트와의 무역분쟁 때문에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죠.
1406년 영락제가 몽골 부족과의 무역을 허락한 이후부터 명나라에서는 그들에게 비단과 의류, 식량 등을 수출하고 몽골 부족들은 말과 모피 등을 수출하는 시장이 자주 열리게 되었는데요.
그런데 초기에는 기껏해야 수십 명 단위의 소규모에 불과했던 시장이 점점 커지면서 수천 명 단위가 되어버렸고 여기에 위구르족 상인들까지 가세하면서 무역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져버렸습니다.
게다가 오이라트족 상인들은 실제 말 숫자보다 장부상의 말 숫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말 값을 몇 배나 후려쳤고 그 외에 밀무역까지 자주 벌어졌기 때문에 정통제가 다스리던 시절에는 이곳의 무역시장이 명나라의 큰 골칫거리가 되었죠.
그래서 명나라에서는 무역을 점차 제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환관 왕진이 나서서 조공을 바치는 행위 외의 다른 무역을 일체 금지했으며 오이라트에도 실제 숫자에 해당되는 말 값만을 지불하도록 했죠.
명나라의 등을 처먹으며 달달하게 꿀을 빨고 있던 오이라트는 갑작스러운 무역 금지 조치를 당하자 양심도 없이 크게 분노했는데요.
결국 1449년에 그들의 지도자인 에센 타이시는 2만의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의 산서성을 공격하게 됩니다.
명의 변경 수비대 4만 5천 명은 기존에 지어져있던 방어시설에 의지해 맞서 싸웠지만 결국 오이라트군에 대패하며 명군의 대부분이 몰살당하게 되죠.
그렇게 명나라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군사 요충지인 대동까지 오이라트의 손에 넘어가면서 수도 북경마저 위험한 상황에 놓여버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환관 왕진이 황제를 모시고 대책 회의를 열었는데 이 회의에서 나온 결론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는데요.
왕진은 오랑캐들이 감히 겁도 없이 명의 땅을 침범했으니 황제 폐하께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황제인 정통제는 그걸 또 좋다고 허락한 것입니다.
병부상서 광야와 호부상서 왕좌가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반대했지만 왕진에게 모함을 당하면서 처벌을 받게 되죠.
그 외에도 수많은 관료들과 장수들이 필사적으로 반대했지만 정통제는 황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겠다며 기어이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게 됩니다.
황제가 직접 이끄는 부대다보니 그의 안전을 위해 보통 토벌군의 몇 배나 되는 50만의 대군이 편성되었는데요.
정통제의 군대는 수도 북경을 수비하는 최정예 부대였던 데다 이들을 지휘할 능력 있는 장수들도 많았기 때문에 충분히 승리를 자신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정통제가 군의 지휘를 자신이 총애하던 환관 왕진에게 맡겨버린데다 전투에 별 도움이 되지도 않는 문신들을 잔뜩 데리고 가는 바람에 그 정예군들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죠.
능력 있는 장수들을 제쳐두고 군대를 제대로 지휘해 본 경험도 없던 정통제와 왕진이 지휘를 하다 보니 오이라트가 기다리는 전장으로 행군하는 과정부터가 무리하게 진행됐으며 식량과 무기 등의 보급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병사들의 전투력은 시간이 갈수록 떨어졌고 정통제도 무리한 행군으로 피로가 극심해져 토목보라는 지역에 일단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게 되죠.
그렇게 정통제의 본대를 뒤에 남겨둔 왕진은 그때까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감에 넘쳐 사령관 주면이 이끄는 선발 부대를 먼저 보내 오이라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비정상적인 행군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있던 선봉부대는 오히려 오이라트군에게 처참하게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그 참담한 현장을 목격한 왕진은 그제서야 겁이 났던지 황제에게 북경으로 철수할 것을 건의했고 기세 좋게 출발했던 정통제는 그렇게 제대로 된 싸움 한번 못해보고 후퇴를 하게 되죠.
그나마 그길로 빠르게 북경으로 돌아가기라도 했다면 다가올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철수하는 길이 자신의 고향 지역을 지나친다는 것을 알게 된 왕진은 자기 고향에 피해를 줄 수 없으니 멀리 돌아서 후퇴하라는 멍청한 명령을 내렸죠.
그렇게 꾸물대던 명나라군은 에센군이 보낸 추격대에 걸려 박살이 났고 정통제는 급한대로 가까운 토목보에 몸을 숨기게 됩니다.
하지만 토목보는 작은 성에 불과했기 때문에 병사 수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병사들이 마실 물조차 제대로 준비돼있지 않은 곳이었죠.
그렇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시들시들해진 명나라군은 갈증을 참지 못하고 근처에 있는 강으로 나갔지만 에센군은 이미 명나라군이 처한 상황을 알고 그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명나라군은 에센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수많은 병사들과 장수들이 사망하게 되죠.
오이라트군에게 완벽하게 포위당해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자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왕진에게 분노한 근위대 장군 번충이 철퇴를 휘둘러 그를 때려 죽여버렸는데요.
그리고 황제 정통제는 에센군의 포로로 사로잡히는 수모를 당하게 되죠.
황제가 이민족에게 포로로 잡히고 조정의 수많은 대신들과 장군들이 전사했으며 수도를 지키는 정예부대마저 전멸하는 바람에 명나라의 수도 북경은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면서 대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에 명나라 조정에서는 남경으로 천도하자는 주장까지 나왔지만 병부시랑 우겸이 그 옛날 남쪽으로 도망간 송나라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느냐며 그들을 설득한 끝에 간신히 진정되었다고 하죠.
이후 그들은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는 대신 북경에 방어태세를 갖추는 동시에 정통제의 이복동생인 경태제 주기옥을 새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겸의 주장은 옳았다고 볼 수 있었죠.
이후 에센은 정통제를 앞세우고 명나라 변방을 돌아다니면서 각지의 요새들을 점령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명나라에서는 이미 새로운 황제인 경태제가 추대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나라는 정통제를 깔끔하게 손절해버리며 그가 포로로 잡힌 것을 본 후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북경은 이미 요새화가 진행된 도시여서 앞선 전투와 달리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는데요.
남쪽에서는 지원군들이 계속 올라왔기 때문에 오이라트는 결국 북경을 포기하게 되죠.
최후의 수단으로 정통제를 이용해 협상을 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잘 먹히지 않자 에센은 어쩔 수 없이 밥만 축내고 있던 정통제를 그냥 풀어주게 됩니다.
오이라트 입장에서는 북경으로 돌아간 정통제가 새로운 황제와 갈등을 일으키며 내란이라도 일으켜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를 풀어준 것인데요.
하지만 정통제는 아무런 권력투쟁 없이 조용히 별궁에 처박히며 오이라트의 마지막 희망마저 깔끔하게 짓밟아버립니다.
몇 년 뒤 경태제가 갑작스런 병에 걸려서 위독해진 후에야 정통제는 자기를 따르는 군사를 모아 쿠데타를 일으켜 경태제를 퇴위시킨 후 다시 황제의 자리를 되찾게 되죠.
정통제가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힌 사건은 토목보의 변 또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정통의 변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때 명나라가 입은 피해는 현대로 따지면 대통령부터 3스타까지 싸그리 몰살당하고 수도방위사단까지 처참하게 박살 난 수준이었다고 하죠.
지난 역사를 돌이켜볼 때마다 중국의 흑역사가 생각보다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네요.
지금까지 영가의 난, 정강의 변과 함께 중국 한족사 3대 치욕 사건으로 꼽히는 토목의 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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