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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영가의 난. 중국 3대 치욕 사건의 하나로, 흉노족에 의해 한족이 중원에서 쓸려나가고 그 자리에 16개의 나라가 세워진 사건

by 사탐과탐 2022.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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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대 치욕 사건이면서 흉노족에 의해 한족이 중원에서 쓸려나가고 그 자리에 16개의 나라가 세워진 사건인 영가에 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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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중국사의 3대 치욕 중 하나라 불리는 정강의 변에 대해 알아봤었죠.

송나라의 권력자들이 아침 드라마급 막장을 보여주며 나라를 말아먹은 끝에 황제 일가가 금나라에 모조리 포로로 끌려갔던 치욕적인 사건인데요.

 

오늘 이야기는 3대 치욕의 또 다른 사건 중 하나로 북방민족에게 탈탈 털린 한족들이 중원까지 빼앗기면서 강남지방으로 쫓겨나게 된 영가의 난 사건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삼국지는 한나라 말기에 세력을 일으켰던 조조와 유비 그리고 손권의 치열한 다툼에 대한 내용이죠.

하지만 정작 최후의 승리자는 그들이 아니라 조조의 신하였던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었는데요.

 

사마염은 셋으로 나눠진 중국 땅을 통일하고 서진이라는 나라를 세웠지만 이 서진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사마염의 아들 사마궤가 갑자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둘째인 사마충을 후계자로 삼으면서 첫 단추부터 심하게 잘못 꿰어졌기 때문인데요.

 

사마충은 훗날 학자들 사이에서 지적장애를 가졌던 것으로 의심되는 인물로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린다는 말을 듣고는 "곡식이 없으면 고기죽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 라는 명대사를 날릴 정도로 멍청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사마염도 사마충이 워낙 어리석은 인물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아들이 아닌 자신의 동생 사마유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죠.

하지만 갑작스럽게 사마유가 독살당하면서 그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마충에게 자리를 물려줘야만 했던 사마염은 아들에게 정말 나라를 맡을만한 능력이 있는지 시험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사마충의 부인인 가남풍이 자신의 남편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장홍에게 뇌물을 먹이고 시험 답안을 대신 쓰게 했는데요.

그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사마염은 답안지를 보고는 안심하며 사마충을 정식 황태자로 인정하게 됩니다.

 

게다가 사마염은 지방 호족들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서 같은 사마씨 일족에게 군권을 나눠 줬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서진 멸망의 큰 원인이 되죠.

애초에 사마염이 세운 서진은 시작부터가 근본이 없는 나라였는데요.

사마염의 할아버지 사마의는 무력 쿠데타로 정권을 뒤집었고 그의 아버지인 사마소는 아예 대낮에 황제를 시해해버렸죠.

 

당시의 상식으로는 인간 말종인 폭군이 아닌 이상 특별한 잘못이 없는 황제를 시해하는 짓은 민간인 학살 못지않은 큰 죄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초대황제부터 별다른 명분없이 즉위가 가능했던 나라다보니 사마염이 죽은 후로는 군권을 나눠 받은 황족들이 너도나도 황제가 되겠다며 권력 다툼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팔왕의 난이라는 사건입니다.

 

그때부터 서진은 그야말로 막장 상태로 치닫게 되는데요.

문제는 이 사태를 바로잡아야 할 황제 사마충이 정신지체자에 가까워 중앙에서 아무런 통제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그 결과 각지에서 사마씨들이 서로 권력을 가지려고 싸워댔으며 황후인 가남풍마저 권력을 장악하고 미쳐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 시기에 가뭄과 홍수 등의 온갖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서진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죠.

 

이때 오호십육국시대를 통합하고 전조라는 나라를 건국한 유연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요.

그는 서진이 팔왕의 난을 간신히 진압하고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자신의 아들 유총을 대장으로 삼아 군사들을 일으켰고 유총군은 순식간에 서진의 수도인 낙양을 사방에서 포위해버렸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유총은 과거 낙양을 공격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낙양을 공격하기 전에 주변의 길을 미리 철저하게 틀어막으며 낙양을 완벽하게 고립시켰는데요.

당시 서진의 황제는 307년에 급사한 사마충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회제 사마치였는데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을 깨닫고 탈출을 시도했죠.

하지만 유총이 이미 근처의 배를 모두 불태워버렸고 육로는 병사들을 시켜 모두 차단해버렸기 때문에 그가 빠져나갈 방법 따윈 없었습니다.

 

311년 5월, 결국 낙양성에 유총의 군대가 들이닥치자 서진군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불리한 상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는데요.

결국 1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인 6월경에 낙양성이 함락되었죠.

성을 점령한 유총군은 서진의 황태자이자 회제의 외아들인 사마전을 포함해 무려 30,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무참히 살해했고 수도인 낙양을 약탈한 후 불을 질러버리며 완전한 폐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황제 회제는 포로가 되어 전조의 수도인 평양으로 끌려갔죠.

이후 회계공에 봉해진 회제는 313년 전조의 황실 새해맞이 행사에서 엄청난 굴욕을 당하게 되는데요.

유총이 회제에게 노예 복장을 입힌 채 고급 포도주를 들고 관리들을 접대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굴욕적인 모습을 본 서진의 관리 출신 유민과 왕준은 감정이 복받쳐 올라 크게 울어버리고 말았다고 하죠.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유총은 크게 화를 내며 유민과 왕준을 포함한 서진 출신의 관리들에게 반역의 혐의를 뒤집어씌워 사형에 처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군이었던 회제에게까지 불똥이 튀면서 결국 313년 봄에 회제는 독살당하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회제가 죽은 후 장안에서 염정과 가필이라는 신하가 사마업을 황제로 추대하며 서진의 명맥을 이어가려 했는데요.

하지만 서진은 이미 낙양이 함락된 순간 사실상 멸망한 상태나 다름없었고 사마업이 직접 통치한 지역도 장안과 그 주변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당시 화북 지역은 전조의 땅이었고 강남 지역은 또 다른 황족인 사마예가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마업의 서진 조정은 사실상 작은 지방 정권 수준에 불과했다고 하네요.

사마업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최후의 발버둥을 쳐봤지만 그들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316년 가을 전조의 장군이자 유총의 친척이었던 유요가 사마업의 영토에 대규모의 침공을 개시했고 얼마후 수도인 장안을 포위하게 되죠.

포위당하며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장안의 식량은 곧 바닥났고 밥 대신 죽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사마업은 결국 항복을 하게 되죠.

그는 이후 전조의 수도 평양으로 압송되었고 318년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렇게 서진은 멸망하게 되고 멀리 장강 너머 강남에 있었던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진 사마예가 동진을 건국하면서 그나마 명맥을 이어갔다고 하네요.

영가의 난으로 인해 한족은 중원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쫓겨나게 되었으며 화북지방은 이후 본격적인 오호십육국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죠.

이후 남북조시대를 거친 중국 대륙은 다시 수나라로 통일되기까지 26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분열되어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토록 무시하던 이민족들에게 나라의 수도를 빼앗긴 데다 뿔뿔이 흩어지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면 왜 영가의 난을 3대 치욕이라 부르는지 알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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