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역사 탐구

만력제. 무려 30년 동안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서 명나라를 말아먹은 중국사 통틀어 최악의 암군

by 사탐과탐 2021. 12. 22.
반응형
만력제는 황제가 되고 나서 무려 30년 동안이나 놀고 먹으면서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일을 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해주기 위해 원조를 해준 것입니다.
자기 나라는 말아먹고 조선은 구해줬던 중국사 통틀어 최악의 암군 만력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중국의 그 넓은 땅덩어리에서 폭군이나 성군 등 수많은 왕과 황제가 거쳐갔지만 오늘 이야기할 이 인물만큼 독특한 암군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폭군이나 암군이라고 하면 폭정을 일삼거나, 아니면 괴상한 짓거리를 하거나 정치적으로 무리수를 두는 등 뭔가 열심히 하지만 그 일이 잘 안되기도 하고 이상한 길로 빠져 나라를 망치기 마련인데요.

 

이 인물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해서 나라를 망쳤죠.

그는 바로 명나라의 13대 황제 만력제입니다.

 

그는 명나라 황제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명나라를 통치했는데요.

48년 동안의 재위 기간 중 30년 동안 국정을 손 놓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죠.

그중 10년은 자신이 어릴 적 섭정을 통해 다른 인물이 정치를 했기 때문에 약 7~8년간만 잠깐 일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명나라의 암군을 조선에서는 나라를 구해주신 황제라며 오랜 기간 제사까지 지내줬을 정도였죠.

만력제,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는 1563년, 유왕 주재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형들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유왕세자에 봉해졌죠.

그런데 아버지가 황위에 오르자 그는 태자가 되었고 1572년에 10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즉위 초반에는 자성황태후와 재상이던 장거정이 섭정을 하면서 별다른 문제는 없었죠.

심지어 나라를 통치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며 명군의 자질까지 보였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헌도 만력제 즉위 초에 조선의 사신으로 자금성에 가 만력제를 보고 훌륭한 군주의 자질이 보인다며 칭찬하기도 했죠.

 

그런 만력제의 어릴 적 스승은 자신을 도와줬던 재상 장거정이었습니다.

장거정의 교육방식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엄격했죠.

가르친 내용을 쭉 외워 나가면 칭찬을 했지만 자칫 더듬거리거나하면 엄청나게 분노하며 거의 폭언이나 다름없는 정도의 말로 만력제를 혼냈다고 하죠.

 

그만큼 만력제의 숨통을 조이기 일쑤였고 거의 학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아버지 융경제가 붙여놓은 환관 풍보 때문에 사생활 또한 엄격하게 통제 당했는데요.

만력제가 공부 안 하고 좀 놀려고만 해도 풍보는 장거정이나 황태후에게 일러바쳤고 이에 황태후는 황제에게 반성문을 써서 제출하라고까지 했었습니다.

 

그렇게 너무나도 엄격하다 보니 어린 만력제의 눈에 장거정은 한편으로는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죠.

어쨌든 만력제에게 장거정은 신하로써도 선을 넘었다 할 정도로 엄청나게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모든 국정을 장악하다시피한 장거정은 거침없이 개혁을 추진했고 국내외로 수많은 업적을 남기기까지 했으며 덕분에 그나마 명나라가 굴러가긴 했죠.

하지만 워낙 막무가내식의 개혁정치 때문에 그의 반대파이던 사람들의 불만이 굉장히 커져만 갔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만력제가 즉위한지 10년이 되던 해 장거정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그러자 정적들이 마구잡이로 장거정의 치부를 고발하면서 대단히 엄격한 스승이자 존경하던 대학자였던 장거정이 사실 엄청나게 부정축재를 한 탐관오리에 불과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그렇게 그는 정치에 뜻을 잃게 되었다고 하죠.

그리고 장거정의 재산이 황제인 자신보다 많다는 것 또한 알게 된 만력제는 완전 열받은 나머지 장거정을 부관참시하고 작위를 박탈한 뒤 전 재산을 몰수해 버렸습니다.

 

또한 장거정의 아들은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게 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옥에 가둔 채 먹을 걸 주지 않아 굶겨 죽여 버렸죠.

그리고 이후부터 만력제는 무려 30년 동안 국정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 그대로 그냥 방치해 둬 버립니다.

 

만력제가 막장으로 치달은 이유가 황태후와 장거정, 그리고 환관 풍보가 너무 지독하게 그를 통제하고 숨통을 조이며 억압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죠.

그리고 그는 몸이 좋지 않아 국정을 수행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부축없이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만이었으며 등이 심하게 굽어 움직이기 힘들어했기 때문에 정치를 손놓았다는 의견도 있으며 또한 아편에 중독되어 있었고 무기력증과 우울증이 겹쳐서 그렇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온갖 이유를 들며 국정을 손놓아 버리기 시작했는데요.

명나라 전역에서 매일 올라오는 수천 건의 상소를 단 하나도 보지 않았고 그 상소들을 쌓아둔 채 그 위에서 잠만 퍼질러 잤습니다.

이에 신하들은 땡볕에서 황제에게 똑바로 하라는 시위를 벌였지만 만력제의 대답이나 어떠한 행동도 없다 보니 신하들은 황제의 대답을 기다리다 지쳐 쓰러지기까지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의 이런 어이없는 행동은 태자를 책봉할때도 이어졌는데요.

만력제는 활발한 성격의 후궁 정귀비를 총애했는데 그래서 그녀의 소생인 주상순을 태자로 책봉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로 무산되었죠.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첫째 아들인 주상락의 태자 책봉을 늦추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자 자리를 비워둔 채 무려 19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첫째 아들 주상락이 성인이 되자 어쩔 수 없이 태자 자리에 그를 책봉했죠.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인 자성황태후도 궁녀 출신이었는데 황태후가 왜 주상락을 태자로 책봉하지 않냐는 질문에 주상락의 어머니가 미천한 궁녀 출신이라 좀 그렇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에 황태후도 너 또한 궁녀의 아들이란걸 잊지 말라고 말했다고 하죠.

 

그는 국정을 돌보지 않는 것 외에도 심한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는데요.

심지어 나라가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는 전쟁이 벌어져도 자신의 재산에서는 돈 한 푼 내놓지 않는 구두쇠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직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데만 열중했고 그렇게 점점 국고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죠.

 

황제 스스로가 돈만 밝히니 신하들도 관직을 사고팔며 사리사욕을 챙기는데 급급했으며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 보니 자신에게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을 재상에 앉혀 놓았다고 합니다.

또한 술과 여자까지 밝혔는데요.

자금성의 궁 깊은 곳에서 궁녀 10만 명의 시중을 받으며 살았다고 하죠.

 

만력제는 후궁들과 목욕을 같이 하는 것을 즐기기도 했으며 나비놀이라 하여 연못에 배를 띄우고 부채를 든 궁녀들을 태운 뒤 자신이 나비를 풀어 그 나비가 날아가 부채 위에 앉으면 그날 밤은 그 부채를 들고 있던 궁녀와 뜨밤을 보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는 정력에 좋은 음식은 모조리 챙겨 먹기까지 했는데요.

잉어를 두들겨 패면 눈물을 흘리는데 이 눈물을 정력제로 먹기도 했고 주둥이가 긴 병에 고기를 넣고 여우에게 주면 고기는 먹지 못하고 침만 질질 흘리는데 그 침을 받아먹었다고 하죠.

또한 산딸기와 복분자를 밤마다 엄청나게 먹어치웠습니다.

 

그런데 그가 단지 사치와 향락만 즐긴 것이 아니었는데요.

매우 잔인한 기질도 다분해 자신이 기분이 나쁘면 궁녀들과 환관들을 몽둥이나 채찍으로 때려죽이며 즐거워했다고 하죠.

그러다보니 언제 황제의 기분이 나빠져 자신을 죽일지 모르는 환관이나 궁녀들은 항상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죽으면 묻힐 무덤까지 엄청난 돈을 들여 만들기 시작했는데요.

명나라에 필요한 1년 예산에 2~3배를 뛰어넘는 비용이 들기까지 했다고 하죠.

이런 황제에 뒤질세라 당시 관직에 있던 신하들은 너무 심각하게 부패해 백성들의 고혈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고 그렇게 명나라는 점점 쇠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만력제가 30년간 일을 하나도 안한 덕분에 많은 관리나 대신들도 황제의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였고 꽤 높은 직책의 관리들도 황제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도 많았죠.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냐면 당시 명나라 중앙 부처 9부의 관직 31개 중에 24자리가 공석이었으며 국가의 중대한 제사나 의식도 생략해버리거나 다른 관리들이 대행하게 해버렸습니다.

 

심지어 재상이던 이정기는 너무 힘들어서 재상직을 때려치울려고 황제에게 사직서를 올렸지만 만력제가 그 사직서 마저 처리해 주지 않았다고 하죠.

그래서 이정기는 절에 짱박혀 5년간 152번의 사직서를 보냈지만 황제에게 '된다', '안된다'라고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고 이에 완전 빡친 이정기는 황제에 대해 쌍욕을 한 뒤 스스로 낙향해서 살다가 불과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조정의 운영이 마비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지만 만력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노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었죠.

재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는 현재까지도 존재하는 중국의 사형제도가 이때 잠시 없어졌는데요.

 

그 이유는 황제가 직접 승인해야 사형을 할 수 있었는데 만력제가 모든 국정을 나 몰라라 해버리자 사형 승인이 나질 않았고 그렇게 집행도 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사형을 받아야 할 극악한 죄인들이 오랜 기간 감옥에만 갇혀있다가 풀려난 경우도 많았고 가벼운 사건으로 잡혀왔는데 그에 대한 처결이 없어 옥에 갇혀 죽어간 죄인도 많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북방에서는 여진족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는 중요한 시점에 30년 동안이나 명나라는 어떠한 제도 개선이나 사회개혁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멸망의 길로만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죠.

심지어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보니 스스로 "짐은 무위의 도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력제가 재위 기간 중 황제로써 한 유일한 일이 있긴 있었는데요.

바로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을 그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이죠.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에 수많은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고 엄청난 양의 곡식을 원조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황제가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다 보니 수많은 야사도 만들어졌는데요.

어느 날 만력제의 꿈에 관우가 나와서 만력제는 유비의 환생이고 선조는 장비의 환생이니 어서 동생을 도와주라는 말을 하고 사라졌고 이를 굳게 믿은 만력제는 처음에는 조선의 생사에 별 관심 없다가 갑자기 적극적으로 돌변했다고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죠.

어쨌든 그렇게 조선을 도와준 덕에 조선에서는 재조지은이라고 하여 그를 기리는 만동묘와 대보단을 만들어 20세기 초까지 그의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왜군은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조선에서의 명나라군 약탈이 왜군만큼이나 굉장히 심했고 훗날 나라를 구해줬다는 것을 빌미로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면 정작 조선 입장에서는 마냥 고마운 인물은 아니었죠.

 

만력 41년인 1613년 9월 어느 날, 이민족 여인이 자신을 습격하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깜짝 놀란 그는 대신들을 불렀고 이에 대신들은 황제가 자신들을 불렀다는 사실에 굉장히 의아해했다고 하죠.

심지어 고위 관료들 중 황제를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황제의 꿈 이야기를 들은 신하들은 그 꿈의 해몽을 했는데 바로 '누군가에 의해 명나라의 강산을 빼앗긴다' 라는 뜻이라고 했죠.

 

그러거나 말거나 만력제는 계속 놀기만 했는데요.

누르하치가 중국의 동북부 쪽에서 등장했을 때도 만력제는 관심이 없었죠.

하지만 이런 심각한 상황에 움직인 사람은 바로 신하들이었는데요.

 

만력 47년인 1619년 9월, 문무백관들은 황제가 있던 문화전 앞에 모여 만력제가 조회에 참여해 정사를 논의할 것을 부탁했지만 하루가 다 가도록 황제는 나타나지 않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하들은 괴로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루 종일 문화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보니 지쳐 쓰러져가던 신하들에게 환관을 시켜 황제가 내린 한마디는 "모든 관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였습니다.

또한 조회에 참석하라는 신하들의 요청에는 두 글자로만 대답했는데요.

바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말라는 뜻의 '면담(免談)' 이었죠.

 

그만큼 국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던 그는 전혀 태도를 바꾸지 않았으며 관리들을 귀찮아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초고도비만에 평생 놀고먹기만 하다가 그가 황제가 된 지 48년째가 된 1620년 8월 18일, 아주 무난하고 평안하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가 죽은 뒤 3명의 황제가 명나라를 다스렸지만 불과 24년 후 명나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역사학자 대부분은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라고 이야기 한다고 하죠.

 

만력제에 대한 연구는 그 이후로도 이어졌는데요.

그는 등이 굽은 곱추에 발 모양이 다른 기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홍위병들에 의해 유골이 훼손되어버려 더 이상의 연구는 불가능하다고 하죠.

 

30년간 국정에 손을 떼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때 명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더 신기하네요.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따져도 베스트 쓰리에는 들어갈 정도의 최고의 암군 만력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