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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대약진운동. 수천만명의 아사자가 생긴 중국 역사상 최악의 정책

by 사탐과탐 2021.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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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은 중국 공산당을 이끌며 영국의 경제력을 뛰어넘기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하는데요.
하지만 이 정책은 중국 역사상 최악의 정책이 되고 마는데 바로 대약진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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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스탈린이 죽고난 뒤 소련 공산당내에서는 여러 분파들의 피튀기는 권력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니키타 흐루쇼프란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죠.

 

흐루쇼프는 중공업에 치중했던 스탈린의 정책과는 달리 경공업을 중시했으며 대규모 농지를 조성하고 '미국의 경제력을 넘어서겠다' 라고 선포 했습니다.

흐루쇼프의 이 말을 들은 중국공산당 주석 모택동은 스스로 경쟁심을 느끼며 '흐루쇼프는 소련이 15년안에 미국을 따라잡을거라고 했지만 우리는 15년안에 영국을 추월할것이다! 라고 선포하면서 드디어 역사에 길이 남을 '대약진운동'을 펼치게 되었죠.

 

다만 다른 산업혁명들과는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다른 산업혁명들은 도시에서 주도하고 이루어낸 반면 모택동이 말한 대약진운동은 '농촌에서 혁명을 이루어내보자' 라는게 다른점이었죠.

 

주은래, 등소평, 류소기 등 최측근들은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을 적극 반대했지만 모택동은 이미 소련에 경쟁심이 폭발한 상태여서 간부들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죠.

하지만 산업화에는 반드시 도시의 인구가 증가 하면서 생산시설도 같이 발전 해야 했는데 첫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대약진운동은 처음부터 죽을 쑤기 시작했습니다.

 

대약진운동 시기였던 1950년대 말에 중국이 잡은 밀 수확 목표량은 처음 1958년 2월에 1헥타르당 4.2톤으로 정했다가 모택동에게 잘보이려 자기네들끼리 서로 경쟁하는 바람에 연말에는 1헥타르당 밀 수확 목표량이 37.5톤이라는 말도안되고 터무니없는 목표량을 잡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과거보다 월등히 뛰어난 농업기술을 가진 현재의 영국에서 2015년에 1헥타르당, 밀 수확량이 16.52톤이었던걸 생각해보면 당시 중국에서 잡은 목표량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무의미한 목표치인걸 알수가 있죠.

 

그리고 먼저 모택동은 소련식 집단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토지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를 위해서 인구이동을 금지시켰고 재산이 있거나 음식을 저장했던 집이 있으면 반동분자로 몰아 강력하게 처벌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론 밥을 여기서 먹으라며 공용 급식소를 만들었는데 급식소의 밥이 맛도없고 품질도 떨어지고하니 사람들이 급식소 이용을 하지 않았죠.

 

그 일을 보고받은 모택동은 급식소의 품질 향상이나 음식을 맛있게 만들기 위한 생각은 하지못하고 사람들이 다른곳에서 밥을 먹지 못하게 하기위해서 기존에 있던 식당이나 객잔등을 모두 폐쇄시켜 버렸습니다.

게다가 일반 가정집의 식량과 각종 조미료, 소금, 숟가락과 젓가락, 그릇, 냄비까지 모두 압수했으며 음식을 할수있는 부엌까지 다 때려부숴버렸죠.

 

그리고 모든 국민들의 개인적인 취사를 금지시켰고 오로지 식사는 공용급식소에서만 할수있도록 만들어버렸는데요.

공용 급식소에서 주는 식사도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메뉴가 맛때까리 없는 죽과 빵등으로 통일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짓을 한 이유는 농사를 하는 농민이든, 공장에서 일하는 공민이든 자신이 하는 일에만 집중하지 음식의 맛 따위를 따지지 말라는 그런 이유와 개인 취사를 한다는것은 식량을 비축하게 되고 이는 곧 계급이 되어 공산주의 원칙에 위배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토지개혁과 집단화로 인해 중국 전체의 생산량은 30%이상 떨어지게 되었고 이 공용급식소 역시 1년도 못가서 문을 닫게 되었는데 그 이후 더이상 공용급식소에서 밥을 못주니 앞으로는 국민들 알아서 밥을 해먹어라라는 명령이 떨어졌죠

그런데 취사에 필요한 식재료나 각종 조미료, 수저, 냄비, 그릇 등 모든걸 빼앗겼던 사람들은 취사도구부터 구하는데 애를 먹을 지경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벌써부터 모택동이 하는 개혁들이 개폭망 조짐을 보였지만 모택동은 이제 공업부문의 개혁을 단행하는데요.

공업을 발달시키려면 일단 철이 필요했고 '집마다 마당에 토법고로를 지어서 강철을 생산하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철강 증산 운동이 전국적, 조직적으로 전개됐는데 곳곳에 우후죽순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제철방식인 '토법고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철이란것은 상당한 기술이 필요한 작업으로 철에 함유된 아주 작은 차이의 탄소량에 의해 불량인 잡철과 강철로 나뉘는데요.

 

이 토법고로에서 철을 생산하던 사람들은 단한번도 그런 작업을 해본적 없는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강철을 만들수 있는 기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정부에서 각 마을마다 철 생산 할당량을 주었으며 할당량을 못채우면 그 마을을 처벌한다고 했죠.

 

각 마을에서는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어쩔수없이 멀쩡한 강철 농기구와 강철로 된 각종 도구들을 녹여 불순물 가득 섞인 잡철을 열심히 만들어냈고 계속해서 불을 때야 하는 토법고로의 연료를 구하기 위해 근처 산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 땔감으로 다 써버렸으며 이에 산과 숲들은 점점 민둥산이 되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철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듯 보였죠.

하지만 멀쩡한 강철을 녹여 잡철을 마구 만들어 낸것이었고 엄청난 양의 잡철이 만들어진 것을 본 모택동은 수행원에게 "이처럼 작은 뒤뜰 용광로에서 이렇게 많은 철을 생산할수 있는데 왜 외국인들은 거대한 제련소를 만들지? 참으로 한심하구만!" 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모택동은 이렇게 만들어진 잡철들로 농기구와 각종 도구들을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불순물 가득 섞인 잡철로 만들어진 농기구와 도구들은 당연히 예전에 쓰던것만 못했죠.

금속 대야는 금이 간채로 팔렸고 부엌칼은 쓰다가 휘어졌으며 농기구들은 그냥 뚝뚝 부러졌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토법고로의 연료로 쓴다고 인근산의 나무들을 모두 벌목해버리자 비가오면 대규모 홍수와 산사태까지 일어났죠.

이런 잡철로 만들어진 농기구로 인해 농업 생산량은 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택동은 생산량이 떨어진 이유를 찾겠다며 농촌으로 시찰을 갔는데 지나가던 참새를 보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참새는 해로운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죠.

그러고난뒤 며칠후 정부에서는 중국의 농업발전을 위한 정책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제사해운동'으로 4가지 해를 제거하라는 정책이었습니다.

 

제거 해야할 4가지 해로운것은 모기, 파리, 쥐 그리고 참새였는데 이때부터 중국 전체가 대대적으로 참새박멸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죠.

더 신기한것은 참새를 잡는 수법이 굉장히 특이했는데요.

 

총이나 새총, 잠자리채, 올가미 등으로 참새를 잡는것이 아니고 하루 '전투' 날을 잡고 마을 사람 전체가 나가서 참새들이 앉을만한곳에 사람들을 배치한뒤 계속 시끄럽게 징을치며 참새가 내려앉지 못하게 하는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참새들은 땅에 내려와 쉬지못하고 계속 하늘만 날다가 결국 탈진해서 추락했고 그런식으로 참새들을 잡았던 것이죠.

 

참새 잡는것도 참 중국 스러운데 상하이에서는 단 한번의 '전투'만으로, 참새 약 100만여마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투의 결과는 1959년에 나타났는데 1958년 한해 동안만 참새 2억 1천만 마리가 학살당해 멸종 위기에 이르렀고 그 때문에 참새가 잡아먹었던 애벌레나 메뚜기 등 각종 해충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 외에도 농사 지을 사람이 참새, 쥐 잡는다고 농사도 짓지 못했고 잡철로 만든 농기구도 문제였으며 메뚜기떼나 홍수, 산사태등, 여러 악재들이 겹쳐 중국역사상 역대끕 대흉년이 발생했죠.

 

이때 굶어죽은 사람이 공식발표로는 약 2,000만명, 비공식적으로는 최대 4,500만명~6,000만명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당시 우리 대한민국의 인구가 약 2,500만명이었는데 만약 이게 우리나라 였다면 인구 전체가 굶어 죽을 만큼 심각했다는 것이죠.

 

결국 공산당 지도부는 소련의 흐루쇼프에게 부탁해 20만마리의 참새를 수입하는 수밖에 없었고 참모들이 모택동에게 '이 참새전쟁을 계속 하실겁니까?' 하고 물으니 모택동은 '됐어' 라고 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수천만명의 국민을 굶겨죽인 이 무식하기 짝이없는 참새대학살극은 모택동의 '됐어' 두음절로 막이 내리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러한 대흉년을 정면으로 맞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자 전학삼 박사는 신박한 아이디어를 내는데 그것은 이름하야 '심경밀식'이었습니다.

전학삼 박사의 아이디어를 들은 모택동은 '정말 신묘한 계책'이라며 실험도 해보지 않고 전국적으로 실시했는데요.

 

심경밀식이란 논에다 벼를 아주 빽빽하게 심어 수확량을 늘리자는 아주아주 대단하고 획기적인 방법이었죠.

농알못이었던 전학삼 박사는 최소한 가로 12cm 세로 20cm 는 되어야할 모와 모간의 간격을 가로10cm 세로15cm로 좁혀서 모를 심자는 이야기 였는데요.

 

가로 12cm 세로20cm의 간격도 계단식 논에서나 어쩔수 없이 사용하는 최소한의 간격이었고 그 이하로 간격을 좁혀 모를 심게되면 벼와 벼끼리 경쟁을 해서 서로 생장을 방해하고 해충들이 숨을곳이 많아져 병충해의 피해도 입기 쉽습니다.

 

그리고 수확량도 엄청나게 줄어드는데 벼들이 자라면서 서로 경쟁을해 더 크게 자라기 위해 벼의 낟알을 줄이고 광합성을 더 하려고 잎을 크게 키우기 때문이었죠.

결국 기존 파종법으로 심은 쌀보다 양도 적고 영양가도 떨어지며 맛도 없는 쌀이 생산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바로 모택동 본인이었는데요.

모택동은 심경밀식을 실시했으니 앞으로 수확량이 확 늘껏이기 때문에 수확철이 되면 아마도 농민들이 이 엄청난 수확량 때문에 너무 힘들것이다 생각하여 평소 농사를 짓던 땅의 3분의 1은 경작을 하지말라고 제안한것입니다.

이 때문에 경작도 적게하고 심경밀식때문에 수확량도 떨어져 농업은 총체적 난국이 되었죠.

 

계속해서 사람들이 굶어죽어가는 마당에 중국정부는 대약진운동이 잘되고 있고 식량이 비축되고 있다는 선전을 하며 다른나라에 식량을 무상으로 원조하기도 했습니다.

대약진운동이 대실패로 돌아갔다는걸 다른나라에 들키는게 싫었던 모택동은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국민들이 굶어 죽어나가더라도 어떻게든 식량 수출이나 원조를 계속 이어나가야 했고 전국의 곡물 수확량 중 3분의1을 징발하라고 지시 했습니다.

 

계속 굶어 죽어가는 국민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는지 모택동은 "중국인은 초식동물이다!" 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육류를 수출 했고 "우리는 풍년이 들었다" 라는 거짓말을 하며 농산물도 소련에 상환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택동의 만행에 피해를 보는건 국민들이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중국 국민들은 나무 껍질로 죽을 쒀먹기도했고 어쩔때는 살인을 해서 그 고기를 먹거나 굶어죽은 시신들을 먹는 사건이 전국에서 벌어지게 된것이죠.

대약진운동의 결과는 너무나도 처참했습니다.

 

수천만명이나 되는 국민들이 굶어죽게되는 대참사가 벌어졌고 1961년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27%까지 떨어졌죠.

'대약진운동은 인재가 70%, 천재가 30%였다' 라고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처참한 결과로인해 대약진운동은 전면적으로 철회되었으며 모택동은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서 떨어져나가게 되었죠.

하지만 지지리도 무능한 모택동은 다시 권력을 잡게 되는데 자신을 비판하던 지식인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 세계 역사에 길이남을 초대형 사건을 또 터트리게 됩니다.

 

아무튼 아직까지 이해안되는 한가지는 왜 중국의 모든 화폐에는 모택동 사진이 있나 하는것이죠.

중국역사상 유래없는 최악의 참사, 대약진운동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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