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서태후에 의해 황제가 되어 평생을 여기저기 치이고 휘둘리고 평생을 갇혀 살았던 비운의 마지막 황제 푸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08년 12월 8일. 청나라를 쥐고 흔들었던 서태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죽기 전 다음 황제로 순친왕의 3살짜리 아들 푸이를 지목했죠.
그렇게 푸이는 황제가 되었고 평생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불행하고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순친왕의 집으로 푸이를 데리러 온 황궁의 관리들은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던 푸이를 억지로 황궁으로 데려왔고 푸이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로 1908년 12월 2일에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죠.
푸이는 긴 즉위식을 지루해하고 칭얼거리면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이때 순친왕은 "울지 마세요. 곧 끝납니다. 곧 끝나요." 라고 하면서 푸이를 달랬는데 중국어 발음으로 곧 끝난다(快完)는 말이 곧 망한다(快亡)는 말과 발음이 비슷해서 대신들은 푸이가 우는 것을 청나라의 불길한 징조로 보았다고 하죠.
그 불길한 징조는 얼마 안 가 현실이 되어버리는데요.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912년 2월 12일 중화민국의 실권을 장악했던 위안스카이에 의해 푸이가 황제가 된지 고작 3년 만인 6세에 황제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가 망하며 나라가 혼란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질 것을 우려한 것인지 황제의 예우는 그대로 유지 되었던 덕분에 푸이는 자금성에서 청나라 소조정의 황제로 지낼 수 있었죠.
하지만 이때 푸이는 퇴위당한 사실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금성에만 갇혀 빈 껍질 황제로 살던 푸이가 11살이던 1917년 7월 1일. 장쉰이 청나라 황실에게 국권을 돌려주자는 복병운동을 실행했지만 쑨원의 국민당은 이를 반역이라고 규정해 토벌을 감행했고 결국 황제로 복위된 지 12일 만에 다시 폐위되었죠.
16살에는 만주족 출신 '완룽'과 결혼을 했지만 둘 사이는 좋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15년 동안 자금성 안에서만 갇혀살던 푸이는 1924년 11월 5일 북경정변을 일으킨 펑위샹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핍궁사건도 일으켜 청황제의 존호를 없애고 청나라 황실 일가들에 대한 예우를 폐지하면서 푸이와 청나라 황실의 일족들 모두를 자금성에서 내쫓아 버렸죠.
그렇게 아무 저항도 못하고 쫓겨나온 푸이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순친왕의 집인 순왕부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푸이는 아버지 집에서의 생활을 참지 못하고 1925년 2월, 결국 텐진의 일본 공사관으로 도망쳐 버렸죠.
일본은 이를 기회로 삼아 푸이에게 정말 잘 대해주고 일본 조계지에 장원을 내주며 거기서 살도록 했습니다.
그러던 1928년 7월 어느 날. 국민혁명군의 군벌이던 쑨덴잉은 동릉을 도굴하는 사건을 벌였는데요.
국민당에게 조상의 묘를 파헤쳐 지는 사건을 당한 푸이는 격노했고 이후 일본에 더 협조적으로 나가는 계기가 되었죠.
그리고 1931년 9월 18일에 일본 제국 관동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만주를 불법으로 침략하고 점령한 전쟁인 만주사변이 발발했습니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들었고 1934년 3월 1일 푸이는 만주국 황제에 즉위해 강덕제로 불렸지만 그는 일본제국의 꼭두각시 황제일 뿐이었죠.
청나라 황제로 재위했던 기간은 고작 3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만주국 황제로 재위했던 기간은 11년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철저히 통제된 생활을 했고 아무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했을 뿐이었죠.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국으로 쳐들어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푸이는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만주국을 해산하며 황제에서도 퇴위했죠.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가려던 푸이는 공항이 소련군에 의해 점거되면서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릴 적에는 자금성에 갇혀 있다가 만주국 황제일 때는 일본에 의해 갇혀 있었고 이번에는 소련군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죠.
푸이는 전범이 되어 바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소련군은 푸이에게 특별대우를 해주었는데요.
그가 수감된 수용소의 소장은 푸이를 위해서 작은 파티를 열어주기도 하고 밥도 하루에 4끼씩 주었습니다.
또한 라디오도 있는 독방에서 지내게 했고 푸이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고 하니 피아노도 마련해 줄 정도였죠.
거기다가 나중에는 수용소 밖을 나가 산책이나 등산을 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만주국의 허수아비 황제를 할 때보다 더 자유롭게 밖을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함께 수감된 만주국 때의 시종들에게 아침저녁으로 황제로써 문안인사도 받았고 황제 대접을 받고 살았죠.
이렇게 잘 먹고 잘 싸고 잘 살다 보니 건강도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이런 소련의 호의에 푸이는 너무 고마워 했는데요.
나중에는 중국으로 송환되는 것이 걱정되어 소련군 관계자에게 뇌물을 주며 중국 송환을 막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고 스탈린에게 소련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스탈린은 처음엔 그에게 호의적인 반응이었으나 나중에는 푸이의 편지를 무시했고 결국엔 마오쩌둥이 집권한 중국으로 그를 돌려보냈죠.
그렇게 푸이는 1950년 10월 중국으로 이송되어 만주에 있던 푸순 전범 교도소에 수감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중국 공산당의 수중에 넘어가게 된 것이죠.
그렇게 푸이는 바로 처형당할 거라 여겨 모든 걸 내려 놓았지만 중국 공산당은 그를 사회주의 동지로 개조하는데 성공했다는걸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를 죽이지 않고 감옥에 가둬 사회주의 교육을 다시 시켰습니다.
중국 감옥에서 수감되는 동안 별다른 위해를 받지는 않았지만 소련 감옥에서 누리던 특별대우는 없었죠.
이곳에서는 시종들의 도움 없이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했어야 하는데요.
혼자 신발 끈 하나 묶을 줄 모르고 옷의 단추도 잘 잠그질 못했으며 손 씻고 나서 수도꼭지도 잠글 줄 몰랐고 변기에 물도 내릴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수감자들에게 엄청 괴롭힘을 당하거나 욕을 먹었죠.
그는 푸순 감옥에서 공산당의 사상교육을 받았고 완벽한 공산주의자로 개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공산당 넘버2 였던 저우언라이 수상의 권고로 쓴 자서전 「나의 반생」에 비굴할 정도로 마오쩌둥과 공산당을 숭배하는 내용을 담았죠.
1959년 12월 9일, 마오쩌둥의 특별 사면령으로 53세의 나이로 출소한 그는 더 이상 황제나 특별한 존재가 아닌 평범한 인민 중 한 사람으로 사회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석방된 후 푸이는 베이징에 있는 여동생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눈치는 있었는지 여동생의 작은 집에서 머물며 최대한 집안일을 도우려 했죠.
하지만 서툰 그의 손재주 때문에 자주 그릇을 깨거나 난장판을 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여동생의 집 근처를 청소하다가 길을 잃어버렸는데요.
그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저는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이입니다. 친척 집에 머물고 있는데 길을 잃었습니다." 라고 하소연해 겨우 여동생 집을 찾아 돌아왔다고 하죠.
또한 그는 어릴 적 자신이 살던 자금성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요.
1924년 자금성에서 쫓겨난 후 30여 년 만에 다시 찾았던 깨끗이 복구된 상태의 자금성을 보고 굉장히 감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석방된 다음 해인 1960년, 푸이는 북경에 있던 식물원에서 장미를 재배하는 일을 부여받았는데요.
서툰 손재주 때문인지 나중에는 청소일만 주어졌다고 하죠.
그런데 중국 공산당 2인자였던 저우언라이는 푸이와 그의 일족을 매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푸이에 대해서 항상 동정적이었습니다.
저우언라이의 목적은 황제였던 푸이를 사상적으로 전향 시키고 또한 공산주의는 모든 인민이 평등하고 이것은 전 황제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선전하기 위해서였기도 했죠.
그는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1962년에는 리수셴이라는 38살 한족 여성과 결혼하기도 했는데요.
그전 아내였던 여자들은 모두 이혼한 상태였죠.
리수셴과는 나이 차이가 18살이나 났지만 둘은 평범하고 다정한 결혼생활을 보냈습니다.
시간이 지나 1964년, 전국 정치협상회의 문사연구위원회의 전문위원이 되어 문사자료를 연구하다가 나중에는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조화를 목적으로 저우언라이에 의해 만주족을 대표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으로 선출되었죠.
그렇게 그는 중국 공산당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사는 내내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허수아비 황제였지만 인생의 후반기는 새로운 아내를 맞이해 평온한 삶을 지내고 자신의 동생들이나 일족들 또한 무사하게 지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죠.
그런데 1966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 난리가 날 무렵 푸이는 암에 걸리고 맙니다.
하지만 홍위병들에겐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그 또한 공격 대상이었기 때문에 푸이가 입원을 했을 시 홍위병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 두려웠던 병원들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죠.
다행히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베이징 내의 병원에 입원은 가능했지만 이미 암이 말기로 진행된 상태였고 얼마 안 가 의식을 잃어버려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신장암과 심장병으로 인해 6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푸이의 유해는 팔보산 혁명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그가 죽고 나서 28년이 지난 1995년 1월 26일에 허베이성에 있는 청서릉으로 이장되었죠.
푸이는 3살 때부터 항상 누군가에게, 또는 어딘가에 갇혀 살다시피 했죠.
자금성에서도 일본 영사관으로 도망갔을 때도 만주국 황제일 때와 소련과 중국 공산당의 감옥에서도 계속해서 통제받고 갇힌 채 너무나도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만주국에서는 천황을 찬양하고 소련 감옥에서는 공산주의를 미화했으며 중국 감옥에서는 마오쩌둥을 숭배하며 살아남았죠.
푸이의 시종을 하던 사람 중 한 명은
푸이는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아남은 사람이다.
나중에 그가 보인 겸손은 살아남기 위해 가식적으로 개조된 것처럼 보이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통제받으며 비참한 삶을 살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것이죠.
서태후 그 여자가 죽기 전에 황제로 지목을 하지 않았으면 그나마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도 결국 살아남아 61세의 나이로 죽은 걸 보면 참 대단하다고도 느껴지네요.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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