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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왕소군. 중국 4대 미녀로 흉노 왕에게 시집간 비운의 여인

by 사탐과탐 2021.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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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지색의 미모를 가진 왕소군은 궁녀로 살아가다 어느 화가 때문에 흉노 왕에게 시집가게 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을 흉노의 땅에서 살아가게 되는데요.

 

 

오늘은 중국 4대 미인 편의 마지막으로 왕소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중국사에 등장하는 많은 미인들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든지 희대의 악녀라든지 대부분 선한 이미지가 아닌 경우가 많죠.

하지만 왕소군은 나라의 평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숭고한 이미지의 절세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흉노 왕의 첩으로 한 평생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절세미인. 왕소군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의 황제인 진시황이 죽고 대 혼란에 빠진 중원을 한나라의 유방과 서초패왕 항우가 결전을 벌인 초한전쟁에서 한나라의 승리로 기원전 202년에 다시 한번 천하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초한전쟁으로 한창 중원이 혼란스러울 시기에 북방의 흉노는 서서히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묵돌이 선우(=왕)가 되면서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죠.

만리장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넓은 중국 영토를 모두 커버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진나라도 그랬고 한나라도 북방의 오랑캐를 항상 경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통일을 이룬 후 겨우 여유가 생긴 유방은 강성해진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최측근 중 한 명이었던 '한신'을 북방으로 보내게 되었죠.

(토사구팽의 한신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동명이인의 한신이며 '한왕 신'으로 불리기도 함)

묵돌 선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자 제대로 쫄아버린 한신은 나름 살기 위해 평화 협상으로 자주 뇌물과 함께 사신을 보내게 됩니다.

 

의심 많고 귀 얇은 유방은 한신이 묵돌에게 뇌물과 사신을 자주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놈이 협상하려는게 아니고 혹시 배신하는거 아니야?' 라며 또 의심병이 도져 버립니다.

그러고는 한신에게 사람을 보내 한소리하게 되었죠.

한소리 들은 한신은 '황상께서 이미 날 배신자로 보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는 묵돌에게 항복해버립니다.

 

그 소식을 들은 유방은 노발대발 극대노하며 32만의 대군을 이끌고 직접 출정하게 되었죠.

하지만 이전의 만만한 오랑캐 잡졸들과는 차원이 달랐던 묵돌은 유인책을 써서 평성 부근 백등산에서 한나라 군대를 순식간에 포위하여 선발대와 본대를 고립시켜 버립니다.

7일간이나 고립되어 어찌할 방도가 없자 책사 진평의 계략대로 묵돌의 왕비에게 다량의 뇌물을 주어 묵돌을 설득하게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묵돌은 선우로써 체면이 있었던지 병사를 거두지는 않고 포위망을 살짝 느슨하게 만들어주었는데 유방은 그 틈으로 겨우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유방은 흉노에 금, 은, 비단 뿐만 아니라 처녀들까지 공물로 보내면서 형제 관계의 화친을 맺게 되었죠.

 

이 화친은 7대 황제였던 한무제 때까지 이어졌으나 한무제의 강경책으로 대대적인 흉노 정벌을 벌였던 시기를 제외하면 이후로도 양국 간의 화친 관계는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11대 황제인 한원제 치세기 당시에 흉노는 분열되어 3명의 선우가 서로 치고받는 상황이었죠.

그중 호한야 선우는 한나라를 등에 업어 세력을 키우기 위해 화친을 맺고자 수많은 공물을 가지고 한원제를 찾아갑니다.

이에 한원제는 크게 기뻐하며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했죠.

 

연회가 무르익자 호한야 선우는 한나라의 공주와 결혼해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한원제는 흉노를 손쉬운 방법으로 견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시원하게 수락하죠.

다만 오랑캐 왕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냥 대충 후궁이나 궁녀들 중에 한 명 골라서 흉노로 보내버릴 생각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한편 한원제는 엄청난 호색가였는데 황궁에 있던 후궁들로는 성에 안 찼는지 전국에 후궁을 추가로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린 적이 있었는데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궁녀들의 수가 수 천명에 달했다 합니다.

 

이때 어렸을 때부터 절세 미녀로 소문난 왕소군도 18세의 나이로 입궁하게 되었죠.

그녀의 본명은 장으로 성과 합쳐 왕장이 본명이지만 자가 소군이기에 흔히 왕소군이라 불렀다 하네요.

한원제는 워낙 궁녀들이 많았던 터라 화공인 모연수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어떤 궁녀와 동침할지를 그 초상화를 보고 결정했다고 하죠.

그러자 수많은 궁녀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황제의 승은을 입기 위해 화공인 모연수에게 초상화를 예쁘게 그려달라며 엄청난 뇌물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왕소군은 뇌물을 받치지 못했고 그럴 마음도 없었죠.

당연히 뇌물을 좋아한 모연수는 괘씸죄로 왕소군의 외모를 가장 추하게 그렸습니다.

그렇게 되어 왕소군은 영문도 모른 채 입궁한지 5년이 지나도록 황제의 얼굴도 못 봤다고 하네요.

 

연회가 끝난 후 한원제는 초상화를 보면서 흉노로 보낼 궁녀를 고르고 있었는데 순간 한 초상화가 눈에 확 띄었죠.

"세상에나 이런 추녀가 궁녀로 뽑혔다니 쯔쯧.. 그래도 오늘에야 네가 할 일이 생겼구나"

라고 감탄하면서 왕소군을 선택합니다.

왕소군은 흉노의 왕에게 시집가게 된 소식을 듣고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는데 어차피 평생 황제의 승은은 커녕 얼굴도 못 볼 처지인데 차라리 오랑캐 왕의 아내가 되리라 결심한 것이죠.

 

흉노로 떠나기 전 호한야 선우와 왕소군의 결혼 피로연이 성대하게 열리는데 호한야 선우는 한원제에게

"이렇게 아리따운 절세미인을 저에게 주시어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고 한나라를 어른의 나라로 받들며 모시겠나이다."

라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죠.

이에 한원제는 속으로 '암~ 오랑캐 주제에 한나라의 추녀도 감지덕지지' 라며 비아냥거리는 찰나 그의 눈앞에 평생 동안 못 본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게 아닙니까.

헛것을 본 게 아닌지 눈을 비벼봐도 그 여인의 광채는 사라지지 않았죠.

한원제는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왕소군을 보내기로 했으니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렇게 왕소군은 머나먼 이국의 땅인 흉노로 시집가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한원제는 평생 아끼던 보물을 도둑이라도 맞은 듯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자 왕소군의 초상화를 그린 화공 모연수를 잡아다가 처형시켜버렸죠.

왕소군을 잊지 못한 영향 때문은 아니겠지만 우연히도 몇 개월 후에 한원제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장안에서 흉노의 땅까지는 너무도 고되고 험했으며 머나먼 여정이었습니다.

아마 왕소군도 괜히 흉노로 시집가겠다 했나 싶었을 거 같네요.

아무튼 수개월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산을 넘고 거친 사막을 지나 어딘지도 모를 초원에 다다라서야 겨우 흉노의 땅에 도착할 수 있었죠.

 

한나라의 여인을 그것도 천하의 절세미인을 아내로 맞이한 호한야는 그녀를 지극 정성으로 잘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흉노 백성들도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온 이국적인 여인이 선우의 정실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신기해하면서도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지만 왕소군을 아내로 맞이한 호한야는 이미 노쇠한 상태였고 금방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남편인 선우가 죽자 왕소군은 고국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한나라 황실에서는 흉노로 시집간 이상 그곳의 풍습을 따르라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흉노에는 '부친이 죽으면 계모를 처로 삼으며 형제가 죽으면 그의 처를 모조리 처로 삼는다' 라는 야만족스러운 풍습이 있었죠.

 

호한야와 왕소군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 후계자가 될 수 없었고 호한야 본처의 아들이었던 복주루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왕소군은 남편의 배다른 아들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나라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말이 안 될 일이었으나 흉노의 법이 그러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을 테죠.

 

이후 왕소군은 아들이면서 동시에 남편인 복주루와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두 딸도 낳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왕소군이 양국 간 평화의 가교 역할을 잘한 덕분에 흉노에 중원의 발전된 문화와 기술을 많이 전파할 수 있었고 두 민족 간 전쟁도 없었으며 근 반세기 동안 평화가 찾아왔다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복주루 선우가 일찍 죽으면서 그녀도 다음 해에 겨우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녀는 죽은 뒤 흉노 땅에 묻혔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녀의 묘 주변에는 언제나 마르지 않는 초목이 무성했다고 하여 '청총'이라 부른다네요.

다른 설로는 호한야가 죽은 후 그의 아들과 재혼하는걸 거부하고 독약을 마셔 자살했다고도 합니다.

 

후대 중국인들이 절세미녀이면서 비극적인 삶의 스토리가 있는 왕소군을 소재로 한 다양한 문학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 동방규가 왕소군의 원한이라는 의미의 '소군원'이란 시를 지었는데 거기서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뜻'의 '춘래불사춘'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게 되었죠.

- 소군원 일부 -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자연히 허리띠가 헐렁해지는데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허리 날씬하게 하려던 것 아니라네

 

그리고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을 갈 때 고향 생각에 비파를 연주하자 기러기가 그 소리에 취해 떨어졌다고 하여 낙안(落雁)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중국 4대 미인도 - 왼쪽부터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사실 이 말은 <장자>의 제물론 편에 나오는 진헌공의 애첩인 여희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면서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물고기가 가라앉고 기러기가 떨어지며 달은 숨어버리고 꽃도 고개를 숙이는 미모' 라는 의미이죠.

이것을 유래로 각각 침어(=서시), 낙안(=왕소군), 폐월(=초선), 수화(=양귀비)로 분류되면서 중국의 4대 미녀가 정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미인도에 나오는 많은 여인 중에서 호복(오랑캐 옷)을 입고 비파를 들고 있으면 거의 왕소군을 묘사하는 거라 하네요.

 

지금까지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인 왕소군에 대해 이야기해보았습니다.

다만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왕소군 스스로 흉노로 시집을 갔는지 정말 자신을 희생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중국인들에게는 평화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숭고한 여인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듯합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꽃다운 나이에 홀로 외로이 이역만리 흉노의 땅으로 가야만 했던 왕소군이 참 가련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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