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왕 영정은 조나라에서 태어나 수많은 암살 위협과 왕이 된 후에도 수많은 반란을 제압하고 우여곡절 끝에 중국 대륙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가 됩니다.
하지만 황제가 된 후로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하는데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시황제 영정의 아버지는 영이인 이라는 인물로 조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영이인은 진나라의 세자 안국군의 서자 출신으로 왕위 계승에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영이인은 당시 각 나라를 다니며 무역을 하던 거상인 여불위의 눈에 띄게 되었고 여불위의 후원을 받게 되었죠.
여불위는 영이인을 진나라 왕으로 올릴 계획을 세우고 안국군의 정부인인 화양부인을 포섭해 훗날 영이인을 세자로 세우기로 약속을 받았죠.
그러던 중 여불위 집에 놀러 간 영이인은 거기서 여불위의 첩이었던 조희를 보자 한눈에 반하게 되었고 여불위에게 청하여 조희를 자신의 아내로 맞게 되었습니다.
영이인과 조희가 사랑하여 기원전 259년 정월(음력 1월 15일)에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훗날 시황제가 되는 영정이었죠.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에 여불위 열전에는 여불위의 첩인 조희가 임신을 했는데 그녀를 영이인에게 바쳤고 임신한 사실을 숨기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영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황제 영정이 영이인의 자식이 아닌 여불위의 자식이라고 적혀 있던 것이죠.
하지만 정확한 근거가 있지는 않아서 진나라 멸망 후에 진나라를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기> 본기에는 '시황제는 장양왕(영자초)의 아들이다'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고 하죠.
아무튼 영정은 줄곧 조나라에서 자라다가 가족들과 함께 조나라를 탈출하게 되었고 탈출 후 영이인은 화양부인의 권유로 이름을 영자초라고 바꾸게 되었죠.
당시 진나라 왕이었던 소양왕이 세상을 떠나고 안국군이 다음 왕인 효문왕이 되었지만 그도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죽고 말았고 이를 이어 영자초가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그 또한 불과 3년 만에 세상을 떠나 영정은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영자초가 왕이되자 그를 후원했던 여불위는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는데요.
영정이 왕이 된 후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상방이라는 직위에 올라 섭정을 하며
무소불위의 권세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어린 영정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고 사실상 진나라는 여불위의 나라가 되었죠.
여불위는 상방의 자리에 오른 후 예전 자신의 첩이자 현재 진왕 영정의 어머니인 조태후와 간통을 하였는데 이 사실을 들킬까 두려워한 여불위는 조태후에게 노애라는 강력한 정력을 가졌던 남자를 소개시켜줬습니다.
조태후와 노애가 간통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조태후는 두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들을 몰래 키우면서 영정을 몰아내고 노애와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 모략을 꾸미게 됩니다.
훗날 그들의 모략이 영정에게 들통나고 말았고 반란을 일으킨 노애는 처형당하며 조태후와 여불위는 쫓겨나게 되면서 영정은 22세의 나이에 진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죠.
이후 영정은 우수한 신하들과 함께 6개국을 멸망시켜 대륙을 통일시킬 계획을 세웠고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230년에는 진나라 장군 '등'이 한나라를 멸망시켰고 뒤이어 기원전 228년에 장군 '왕전'이 조나라 수도 한단을 함락시키며 조나라도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를 멸망시켰으며 그 뒤 왕전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침공해 기원전 223년 초나라 또한 멸망하게 되었죠.
기원전 222년에는 연나라를 기원전 221년에는 제나라를 차례대로 멸망시켜 진왕 영정은 39살의 나이로 정복전쟁을 시작한 후 고작 10여 년 만에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성시켰습니다.
영정은 통일 후 진왕이라는 호칭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며 대체할 호칭을 찾는데 신하들이 태황이라는 호칭을 주장했지만 영정은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란 칭호를 만들었고 최초이자 첫 번째를 의미하는 '시'자를 붙여 시황제라고 부르라 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국 전역을 통치하는 이념으로 법가 사상을 내세웠는데 바로 나라를 법으로써 통치한다는 사상이었죠.
하지만 10여 년 만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통일을 이루면서 오랜 시간 서로 다른 나라에서 다른 생활 방식과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 하루아침에 여태껏 하던 거 다 버리고 법으로만 통치하겠다고 하면 혼란이 올 것이 당연했죠.
그로 인한 분란이나 분열을 막기 위해 시황제는 문자와 화폐를 통일했고 치수나 길이를 재는 도량형과 법 등도 통일하며 통일된 대륙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죠.
그리고 나라를 군과 현으로 행정 지역을 쪼개어 중앙 정부에서 관리들을 파견해 나라를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해서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였습니다.
또한 수도와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큰 도로를 만들었는데 이 도로 덕분에 군대 파견도 수월해졌고 상인들도 안전하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죠.
하지만 너무나도 급진적인 개혁 정치들은 정복당한 6국의 백성들에겐 굉장히 적응하기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진나라의 법은 사회를 안정되고 질서 있게 유지하기 위한 목적의 법이 아니라 무조건 법을 지키는게 목적이 되었고 이 지나치게 엄격한 법과 너무 가혹하고 무거운 형벌 때문에 법치주의 국가에 적응을 못한 백성들에게는 지옥이나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게 했죠.
대륙을 통일하고 긴장의 끈이 살짝 풀렸는지 시황제의 다음 행보는 진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합니다.
시황제의 최측근 신하이던 이사는 "옛 사상과 제도에 얽매여 있으면 앞으로의 통치에 해로울 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에 혹한 시황제는 의학이나 천문, 점술, 농업, 법률에 관한 책 이외에 유학에 관학 책들, 진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의 역사서들, 시경, 서경 등의 서적들과 쓸데없이 정치를 비판만 하는 학자들의 저서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지시합니다.
이 과정에서 유학자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자신을 비난하던 유학자나 사상가들 460여 명을 땅속에 생매장해 버립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분서갱유' 인데 사람들을 땅속에 매장해버린 사건은 사실이 분명하지 않아서 후대의 유학자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시황제는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엄청나게 벌였는데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아방궁'을 건설하였습니다.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수십만 명의 인력이 수시로 동원되어 국력이 낭비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른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여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죠.
오죽하면 황태자였던 부소가 아버지인 시황제에게 과도한 토목공사들을 중단하고 백성들을 돌보라 간언했지만 시황제는 부소를 만리장성 건설 현장으로 쫓아버리기도 했습니다.
시황제는 나이가 들어서는 미신에 집착하기 시작했는데요.
수십 년간 70만여 명의 인력을 동원해 진시황릉이라는 자신의 초대형 무덤을 짓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는 못했죠.
그리고 한 점쟁이가 진나라는 '호' 때문에 망한다는 '망진자호야(亡秦者胡也)' 라는 점괘를 내자 그 '호'가 오랑캐를 뜻한다고 생각한 시황제는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해 흉노를 정벌했고 언제나 진나라의 위협을 끼치던 북방 민족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만리장성까지 만들게 됩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는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공사 중 죽은 인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아방궁과 만리장성, 진시황릉 등 초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죠.
또한 그 당시 불로장생약으로 여겨지던 값비싼 수은을 지속적으로 복용해 엄청난 국고를 낭비하게 되죠.
수은에 장기간 노출이 되면 우울증이나 의욕상실 등 정신적인 장애를 유발하고 심할 경우에는 환각이 보이기도 하며 기억상실, 정신착란 등의 증상도 있는 독극물입니다.
시황제는 수은을 장기간 복용한 후유증으로 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그의 삶 후반부에는 정신지체장애인 수준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나중엔 이 불로장생약이라 믿었던 수은 때문에 사망하게 되죠.
그만큼 불로불사에 집착을 했는데요.
점점 늙어가던 시황제는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는 걸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늙지 않기 위해 불로초를 구하러 온 사방으로 신하들을 보내기도 했고 사기꾼들이 가져온 잡초를 불로초라 믿어 비싼 값에 사기도 했죠.
또한 불로불사의 명약을 구해오겠다며 시황제에게 돈을 뜯어내 그대로 도망가 버리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와 관련이 있는 전설도 있는데요.
서복이라는 사람이 시황제에게 나타나 "바다 중간에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라 불리는 세 개의 신산이 있는데 그곳에 신선이 살고 있습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거느리고 불로장생약을 구하러 가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시황제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3천여 명과 3년 동안 먹을 식량과 옷 등을 실은
대규모 선단을 서복에게 내어 주었고 서복은 그 선단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떠나게 되었죠.
그가 앞서 말한 '영주산'은 바로 제주도의 옛 지명으로 제주도에 도착한 서복은 한라산에서 자신이 불로초라 여기던 영지버섯과 금광초, 시로미 등을 구했고 서귀포 앞바다에 있는 정방폭포 암벽에 '서복이 이곳을 지나간다' 라는 뜻의 '서불과지(徐市過此)' 라는 글자를 새겨놓고 다시 중국이 있는 서쪽으로 떠났는데 그곳을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 라고 해서 서귀포 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서복이 구해온 것들도 불로초는 아니었죠.
시황제의 불로불사에 대한 끝없는 집착은 엄청난 국고를 탕진하게 만들었고 진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는데 크게 일조했습니다.
그리고 시황제는 어릴 적부터 수많은 암살 위협도 받았는데요.
통일을 한 이후에도 가혹한 통치를 한 탓에 멸망한 6국의 백성들의 미움과 증오를 한 몸에 받았고 수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암살을 두려워한 시황제는 누구를 만나든 환관 조고를 거치고 나서 만났죠.
이 암살 위협 때문에 더욱더 불로불사에 집착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덕에 환관이던 조고의 권력은 승상의 위치였던 이사 마저도 두려워할 정도로 강력해졌습니다.
조고는 훗날 시황제의 유서도 위조해서 부소가 아닌 호해가 제위를 물려받게 되었고 마음대로 진나라를 갖고 놀다가 진나라가 망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점쟁이의 점괘 '망진자호야(亡秦者胡也)'의 '호'가 오랑캐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시황제 다음 황제였던 호해의 '호'를 뜻하는 것이었나 봅니다.
시황제는 재위 기간 중 자신이 통일한 대륙을 둘러보고자 여러 차례 전국 순행을 다녔는데요.
다섯 번째 순행 도중에 병에 걸려 회복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그렇게 기원전 210년 7월 사구라는 곳에서 병사하게 되면서 파란만장했던 50년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시황제가 죽은 후에 2세 황제인 호해가 여러 동물과 시황제의 후궁들, 자녀들 그리고 진시황릉을 건설했던 인부들을 함께 순장하며 그놈에 진시황릉 공사를 끝냈죠.
진시황릉은 아직 발굴이 다 되지도 않았지만 부장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덤인데요.
무덤 주변만 발굴했을 뿐인데 흙으로 만든 병사와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훗날 발굴이 끝났을 때는 얼마나 엄청난 부장품들이 나올지는 상상이 안 간다고 합니다.
시황제가 죽고 난 뒤 겨우 4년 만에 진나라는 멸망해버렸습니다.
말년에 시황제가 행한 여러 폭정들이 없었다면 진나라는 제도도 잘 정비되어 있었고 왕권도 매우 강했던 만큼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잘 다스려졌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넓은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훗날 폭정으로 인해 그 모든 업적을 스스로 없애버린 두 가지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 진시황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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