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는 조선과 청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폐지된 군주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중화제국의 황제에 스스로 올랐으며 수많은 악행을 일삼은 중국 최악의 매국노입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되어 명성황후는 피신을 갔다가 청나라 병사들을 끌어들여 다시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때 청나라의 병사를 이끌고 온 우장칭은 한 명의 부장을 데리고 왔는데 그는 위안스카이 라는 인물이었죠.
이 위안스카이 한 명 때문에 조선과 청나라의 역사가 뒤바뀌게 되는데요.
그의 지나친 내정간섭과 악행으로 인해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까지 조선이 자주적으로 개혁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죠.
오늘은 중국에서는 이완용, 한국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급의 악당, 위안스카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1859년 8월 20일, 청나라 허난성에서 아버지 위안바오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죠.
위안씨는 허난성 샹청의 명문가 집안이었는데요.
위안바오중의 동생이던 위안바오칭에게 아들이 없자 위안스카이를 그의 양자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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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없던 위안바오칭은 아들이 생긴 것에 너무 기뻐하며 위안스카이에게 좋은 선생님을 붙여주면서까지 공부를 가르쳤지만 그는 도통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고 무예를 익히는데 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었죠.
그래서인지 위안스카이는 진사 시험도 여러 번 떨어질 정도였는데 그 이후 과거 시험 책들을 불태워 버리고 양아버지의 친구였던 경군통령 우장칭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청나라 조정에서는 우장칭에게 군사 3,000명을 내어주어 조선으로 출병을 명령했는데 이때 위안스카이는 우장칭을 따라 조선에 오게 되었죠.
그는 임오군란을 일으킨 병사들을 진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청나라로 강제로 보내버렸습니다.
그리고 계속 조선에 주둔하는 동안에 많은 악행을 일삼으면서 조선의 마지막 자주적 근대화 기회를 가로막게 되는데요.
임오군란을 계기로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신식 군대 창설을 주도했고 2천여 병사의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1884년, 일본 공사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급진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위안스카이는 독단적으로 창덕궁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해 격파하면서 이 정변을 진압해 버렸죠.
그리고 잠깐 청나라로 돌아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위안스카이는 식민지 총독과 비슷한 '감국대신(監國大臣)' 역할을 했는데요.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역사상 청나라 관리가 조선에 살면서 온갖 내정간섭과 경제적 침탈을 했던 것은 위안스카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죠.
그는 조선 조정에서 하려는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꼬투리 잡으며 반대를 했습니다.
위안스카이가 조선에서의 행동이 얼마나 거만했냐면 그가 입궐을 할 때 그는 고종의 면전 앞에까지 가마를 타고 들어오는 만행까지 저질렀죠.
또한 조선이 청나라에게만 차관을 빌리게끔 만들었으며 전기나 통신 시설도 청나라가 독점하도록 손을 썼습니다.
게다가 조선의 바다와 강에 청나라 배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독점 운항권을 부여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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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엄청나게 많은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조선 팔도를 원하는 대로 누비며 조선의 상권을 뒤흔들어 놓았는데 이에 위안스카이는 군함까지 상인들에게 빌려주며 인삼 밀수에 밀무역까지 주도했습니다.
이 밀무역을 조선 관청에서 단속하기라도 하면 단속하는 관원들을 습격하기까지 했죠.
또한 1892년 조선 조정에서 만든 새로운 화폐인 '대조선'의 명칭에 꼬투리를 잡아 '대'자를 빼라고 요구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조선에 있던 10년 동안 조선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조선 백성들의 고혈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는데요.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경제적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 프랑스, 미국과 차관 교섭에 나섰지만 위안스카이의 방해로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청나라의 차관을 받으면 받을수록 조선 조정은 빚만 늘어나게 되었고 그렇게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이권을 하나하나 빼앗아갔죠.
거의 조선 총독 노릇을 하던 위안스카이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이는 일본이 청일전쟁을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위안스카이는 조선 여성들을 좋아해 조선에 머무는 동안 세 명의 조선 여인을 첩으로 삼았고 7남 8녀의 자식을 둘 정도였죠.
조선의 왕보다 더 높은 곳에 군림하던 위안스카이는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급하게 변장을 하고 청나라로 야반도주했는데요.
그가 중국에 잠깐 갔다가 돌아온 1885년부터 1894년까지의 10년 동안을 고종의 조정이 아니라 위안스카이의 조정이라고 불릴 정도로 청나라의 조선 침략과 간섭은 극에 달해있었죠.
이때 만약 위안스카이의 만행만 없었더라도 조선과 청나라의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조선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온 나라를 뒤흔들어댄 위안스카이는 이제는 청나라로 돌아가 청나라에서도 개판을 치기 시작하는데요.
청일전쟁의 패배로 리홍짱이 정계에서 물려나며 위안스카이는 북양군을 이끌게 되었고 광서제와 캉유웨이가 주도하는 변법자강운동에 협조하는척하다가 서태후의 측근에게 이를 밀고하면서 그 공을 인정받아 청나라 조정에서의 그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죠.
이후 서태후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와 의화단이 손을 잡고 서구 열강 8개국 연합군과 벌인 전쟁인 의화단 운동 때 청나라 편을 들지 않고 연합군의 편을 들어 그의 군대인 북양군은 아무 피해 없이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당시 연합군과 맞서 싸웠던 청나라 장군들 대부분은 청나라 중앙정부에 있던 인물들이었고 결국 연합군에 의해 이들 군대는 궤멸되다시피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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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 운동에서 살아남은 북양군은 청나라의 유일한 관군이 되었는데 그러자 그의 권력은 한층 더 강력해졌죠.
그렇게 위안스카이는 승진을 거듭하다 내각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중국 근대화와 국방개혁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얼마 안 가 자신의 든든한 빽이 되어주던 서태후가 세상을 떠나고 어린 황제 푸이를 대신해 섭정을 하던 순친왕의 압력으로 인해 모든 관직을 삭탈당한 뒤 낙향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또다시 북양군을 거느렸던 위안스카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마음속으론 청나라 조정을 없애버리고 자신이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단은 혁명군을 토벌하는 시늉을 했죠.
1912년 1월,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 초대 임시 총통이던 쑨원과 협상을 하게 되는데 위안스카이는 쑨원에게 황제도 버리고 나라도 버릴 테니 혁명 정부의 대총통 자리를 달라고 했고 쑨원은 민주주의 공화국 건설과 수도를 난징으로 바꾸자는 조건을 요구해 둘 다 조건을 받아들여 결국 협상은 타결되었습니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 있던 심복 돤치루이에게 황제를 퇴위시키라 명령했고 그는 군대를 이끌고 자금성을 점령해 1912년 2월 선통제는 퇴위되고 말았죠.
그렇게 청나라는 멸망하게 되었고 위안스카이는 혁명 정부의 대총통 자리에 취임했으며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황제가 되기를 원했던 위안스카이는 쑨원이 내걸었던 정당정치 등 민주적인 조건들을 깡그리 다 무시해버렸고 대총통이 되자마자 독재를 하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죠.
이런 위안스카이의 만행에 맞서서 쑹자오런과 쑨원은 국민당을 결성했는데 1913년 선거에서 국민당이 압승을 하고 국민당을 이끌던 쑹자오런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자 이에 위협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을 암살해 버렸습니다.
이와 더불어 위안스카이는 5개국 은행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차관을 국회의 동의도 없이 무단으로 빌렸는데 이에 격분한 국민당이 반발하여 반(反)위안스카이를 외치며 1913년 7월에 제2차 혁명인 계축전쟁을 일으키자 그는 북양군을 앞세워 단 2개월 만에 손쉽게 진압해 버렸죠.
그리고나서 의회를 박살 내버렸고 국민당 역시 강제로 해산시켜버렸으며 1914년 1월에는 중화민국 국회까지 해산시켜 버렸죠.
그 결과 중국에서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려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모든 권력을 손에 거머쥔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 신약법을 발표하며 종신 임기에 세습까지 가능하도록 법으로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이걸로도 성에 차지 않았던 위안스카이는 다시 황제 제도를 부활시켜 1915년 12월, 황제로 추대되어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최악의 악수가 되어 그에게 돌아오게 되는데요.
위안스카이의 측근들 모두가 그의 막강한 권력 때문에 눈치 보며 얼른 황제가 되라고 한 것일 뿐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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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가 황제가 되고 나서 반대파들은 물론이고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과 최측근이던 돤치루이를 비롯한 군벌들 그리고 펑궈장, 쉬스창 같은 인물들까지 황제 즉위에 불만을 가지는 결과를 낳고 만 것입니다.
이제는 거의 모두가 그에게 등을 돌려버린 것이죠.
또한 위안스카이는 황제에 오르기 직전에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서명을 하고 말았는데 21개 조의 내용을 보면 독일이 가지고 있던 칭다오의 조차권을 일본이 가져갔고 철도 부설권까지 일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당시 독일은 자신들이 마실 맥주 공장을 지어놨었는데 이 기술을 이어받아 일본의 맥주가 발달하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중국 칭다오 맥주는 유명하죠)
또한 재정, 군사, 경찰, 군수 방면에 일본인 고문을 뒀어야 했고 외국에 땅을 할양할 때에도 무조건 일본과 협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죠.
이는 사실상 나라를 팔아먹은 행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아무튼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는 사실과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걸 뒤늦게 파악한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되고 불과 3개월 만인 1916년 3월 22일에 모든 것을 급하게 철회하고 다시 중화민국 총통 자리로 복귀하지만 이미 성난 민심은 그를 떠난 뒤였죠.
결국 각 성의 대표들은 모두 위안스카이의 하야를 요구하였고 이들의 뜻을 거스를 방법이 없었던 그는 분노와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1916년 요독증이 악화되어 급사해 버립니다.
그래도 그의 장례식은 황제의 예우를 받으며 성대하게 치러졌죠.
위안스카이가 죽고 난 후 북양군벌은 분열되어 격렬한 내전이 일어났고 다른 군벌들까지 합세하며 대규모 전쟁이 터지게 됩니다.
그 이후 중국은 군벌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춘추전국시대가 다시 벌어지게 되면서 또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죠.
위안스카이는 1898년엔 광서제를 배신했고, 훗날 1911년엔 청나라를 배신했으며 1915년엔 중화민국을 배신한 중국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서구 열강과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로도 불려지고 있죠.
게다가 위안스카이는 총통과 황제를 모두 해본 사람이기도 한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끝없는 탐욕에 의해, 결국에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인물입니다.
조선 후기, 조선과 청나라, 이 두 나라를 뒤흔들어 놓았던 인물, 위안스카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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