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66세때 15살의 나이로 중전으로 간택이되어 궁에 들어온 정순왕후는 훗날 노론 벽파의 수장이되어 모든 정권을 거머쥐는데요.
그녀는 조선을 망친 악녀였을까요? 아니면 망해가던 조선을 살리려던 여걸이었을까요?
1757년, 영조의 아내였던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아버지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들 중에서 새 왕비를 뽑지 않고 새로 중전 간택을 하기로 마음먹었죠.
그렇게 새로운 중전을 간택하는 도중 눈에띄는 한 처자가 있었습니다.
삼간택으로 뽑힌 3명의 처자들에게 영조가 "어떤 물건이 가장 깊은가?" 라고 물었죠.
그러니 한명은 산이 또 한 명은 물이 깊다고 했지만 마지막 한명은 사람의 마음은 예측할수가 없으니 가장 깊다고 하는것이었습니다.
그 대답에 감탄해 마지않던 영조는 또다시 셋에게 물었죠.
"그러면 어떤꽃이 가장 아름다우냐?" 라고 물으니 한명은 복사꽃이, 한명은 모란꽃이 아름답다고 했는데 마지막 한명은 실을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목화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것이었습니다.
그녀의 그런 대답에 감동을 받은 영조는 그녀를 새로운 중전으로 간택을했고 6월 22일 창경궁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죠.
이런 총명하고 재치있는 답변을 했던 그녀가 바로 오늘 이야기할 인물 정순왕후 입니다.
그녀는 1745년 11월 10일, 명망있던 가문인 경주김씨 집안의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로 태어났죠.
그녀가 영조에게 시집을 왔을때가 영조의 나이 66세, 정순왕후의 나이가 15세 였다고 합니다.
정순왕후는 의붓아들인 사도세자보다 10살이나 어렸고 심지어 손자뻘인 정조보다 고작 7살 많은 나이였죠.
또한 왕비로 간택될 당시 그녀의 할아버지인 김선경도 살아있었는데 그의 나이보다 남편인 영조의 나이가 5살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어린나이에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오게 된것이죠.
정순왕후는 어리지만 왕비로써 굉장히 강인한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녀의 옷을 만들기위해 한 상궁이 치수를 재다가 정순왕후에게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그녀는 단호하게 "니가 돌아가면 될것을 감히 누구보고 돌아서라고 하느냐!!" 라고 호통을 치자 주위 궁녀들이 덜덜 떨었다는 야사도 있습니다.
영조는 다 늙은나이에 어린 여자를 아내로 삼은것이 못내 미안해 했다고 하죠.
그것이 너무 애처로웠는지 정순왕후를 특히 더 예뻐하고 잘해줬는데요.
하지만 영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죠.
그런데 그녀가 궁에 들어온지 고작 3년이 된 시점에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굶겨죽인 사건이죠.
당시 정순왕후는 중전의 자리에 앉은지도 얼마안됐고 친정의 힘도 크지 않았던 시기였을 뿐만아니라 그녀가 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세자를 왕비로써 보호해주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영조의 편을 들면서 그를 밀어내지도 못했었습니다.
그만큼 그녀의 영향력은 큰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죠.
그렇게 사도세자도 세상을 떠나고 그녀도 영조의 비호아래 무럭무럭 힘을 키우고 있던 정순왕후는 친정오빠이던 김귀주와 경주김씨 가문도 힘을 얻으면서 세자빈이던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풍산홍씨 가문과 계속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세손이 영조 다음왕이 되는건 기정 사실화 되어 있었고 풍산홍씨 측이나 경주김씨 측 둘다 세손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세손의 팔을 한짝씩 잡고 서로 끌어당기는 형국이었죠.
그러나 세손은 정순왕후 쪽인 경주김씨 측과 친하게 지내자 풍산홍씨 측과 세손의 사이가 벌어지게 된것입니다.
오히려 정조가 외가집이던 풍산홍씨와 손잡지 않고 정순왕후와 경주김씨 측과 편을 먹은것이죠.
그러자 혜경궁홍씨의 숙부이던 홍인한은 당시 떠오르는 실세이던 정후겸과 손을잡고 서로 극렬하게 대립하게 된것입니다.
하지만 나이든 영조가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자 홍인한은 격렬히 반대를 했고 영조가 승지에게 전교를 쓰라는 명을 내렸을때도 승지의 앞을 막아서며 어명을 받들지 못하게도 하는등 정조에게 왕위가 넘어가는것을 엄청나게 방해를 했는데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영조도 승하하면서 세손이었던 정조가 즉위하게 되었고 그렇게 정순왕후는 어린나이에 왕대비에 오르게 되었죠.
정조는 왕위에 오른후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홍인한, 정후겸을 유배 보내버렸고 홍인한은 훗날 사사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정조는 김귀주가 혜경궁 홍씨에게 문안인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귀주까지 유배를 보내버렸고 얼마안가 유배지에서 사망하고 말죠.
그 이후 정순왕후는 정조의 편에서 갈라서며 정조의 최강의 견제자이자 노론 벽파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부터 정조가 사도세자를 추숭하려고 하면 반대하고 나섰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하나밖에 없는 이복동생 은언군이 상계군 사건에 연루되면서 죽을뻔 했을때 정조 덕분에 목숨만은 건질수 있었는데요.
이때 정순왕후는 대신들을 시켜 은언군을 죽여야 한다며 상소를 올렸고 이에 정조가 은언군 탄핵상소를 거부하는 단식투쟁에 들어가자 그녀 역시 단식투쟁까지 하며 강한 처벌해야한다고 주청하기도 할정도로 서로 척을 지게 되는 사이가 되었죠.
그러나 사실 둘의 사이는 그렇게 심하게 나쁘지는 않았고 정조가 할머니로써 그녀를 극진히 봉양했으며 정순왕후 또한 정조에게 잘 대해주었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부터 그녀의 거침없는 행보는 둘사이가 좋았던거 맞나 싶은데요.
정조가 죽고난 뒤, 11살의 어린나이로 순조가 즉위하자 그녀는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가 되면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는데요.
신하들에게 각각 충성 서약을 받기도 했을 정도였죠.
정순왕후는 권력을 잡자마자 정조가 진행하던 정책들이나 만들었던 기관들을 철저히 부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조가 만들어 놓았던 장용영을 폐지 해버렸고 정조가 부활시킨 규장각 마저 축소시켜버렸죠.
그리고 정조가 그렇게 보호하려했던 은언군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또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동생이던 홍낙임 또한 처형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정조가 재위하고 있던당시 급성장한 남인 세력과 소론 시파들을 숙청하기 위해 정조가 묵인하고 있던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신유박해를 일으켰는데요.
이때 정약용을 비롯한 정약종, 정약전 등이 귀양을가거나 처형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정조가 내쳤던 김관주, 김용주 등 노론 벽파 관료들을 대거 등용했죠.
한마디로 정조가 아꼈던 신하들은 대부분 내치거나 배척해버렸고 정조가 배척했던 신하들을 재등용 해버린것입니다.
신유박해를 실시하고 고작 1년만에 온 조정은 노론 벽파로 가득채워졌죠.
그렇게 권력을 휘두르다, 1803년 여기저기에 큰 화재가 나면서 민심이 흉흉해지자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에서 물러나며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노론벽파가 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시기와 겹친다고 봐도 되는데요.
그녀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자마자 순조의 장인이던 김조순에 의해 순식간에 노론 벽파가 대거 숙청되며 정순왕후의 힘도 많이 약해져 버렸고 그렇게 김조순으로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그녀의 말년은 뒷방으로 쫓겨난 늙은이 마냥 조용히 지내다가 1805년 2월,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정순왕후는 개혁으로 나아가던 조선을 퇴보시켰으며 조선이 당파중심의 정치에서 외척 중심의 정치로 변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평가 받고 있죠.
바로 정조가 세운 업적을 몽땅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조선을 망국에 접어들게한 벽파의 수장 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녀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녀가 수렴청정을 하며 행했던 여러 정책들은 알고보면 정조를 부정한것도 아니었고 정조의 정책을 싸그리 엎어버린것도 아니었다는 것이죠.
정순왕후가 신유박해를 주도하긴 했지만 남인의 핵심 인물들이 살아남을수있게 제어를 했고 소론과 시파의 관리들도 조정에 남아있는 사람도 많았기에 최소한의 균형은 맞추면서 정치를 했었다는 것입니다.
장용영을 폐지하고 규장각의 권한을 축소 한것도 정약용조차 이곳의 폐해를 인정할 정도였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들이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녀가 물러나고나서 오히려 세도정치로 나아간 이유가 사실 안동김씨 세력이 벽파세력을 치면서 안동김씨가 조정을 장악하고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는데도 아무것도 안하고 그대로 방치해버린 순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훗날 수렴청정을 했지만 안동김씨 가문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인 순원왕후에 비하면 정순왕후의 정치력은 뛰어났다는 것이죠.
현재도 그녀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첨예하게 갈리고 있는데요.
과연 그녀는 나라를 망친 악녀 였을까요? 망해가던 나라를 그나마 살린 여걸이었을까요?
15살 어린나이에 궁으로 시집와서 어린나이에 왕실 최고 어른 대접을 받으며 온갖 정쟁속에 뛰어들어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삶을 산 정순왕후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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