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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사관.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자 최고로 강직했던 관리들 그리고 사관과 왕에 얽힌 에피소드

by 사탐과탐 2021.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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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로써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자 최고로 강직했던 관리들입니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다 보니 왕들과 티격태격할 때도 많았는데요.
사관과 왕에 얽힌 에피소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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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 어느 날 노루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렇게 말을 타고 사냥을 하던 중 태종은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는데요.

너무 부끄러웠던 나머지 멋쩍게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사관에게 "내가 말에서 떨어진 것은 적지 말라"라고 명했죠.

 

그러자 사관은 '전하께서 말에서 떨어진 것을 적지 말라고 명하셨다' 라고 기록해놓았고 이것은 훗날 그대로 태종실록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사관은 매우 꼼꼼하고 정확한 사실을 기록했었는데요.

그러다보니 왕들에게는 이 사관이 제일 신경 쓰이고 밉상이 아닐 수 없었죠.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록하다 보니 말이나 행동도 함부로 못하고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실수 한번 잘못 했다가는 몇백 년, 몇천 년 동안 기록이 남아 전해지기 때문이었죠.

무슨 스토커나 파파라치 마냥 늘 감시당하는거 같은 기분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사관을 뿌리치려는 왕과, 왕과 붙어있으려는 사관 사이에서 팽팽한 기싸움이 연일 벌어지기도 했죠.

이런 기싸움은 태종대에 많이 벌어졌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태종 1년인 1401년 4월 29일, 사관이던 민인생이 편전에 들어왔죠.

그러자 태종은 "어찌 사관이 편전에 들어왔냐" 라고 묻자 사관 민인생은 "대신들이 아뢰는 것, 경연에서 강론하는 것들도 다 기록해야죠"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편전은 내가 쉬는 곳이니 안 들어와도 된다. 듣고자 하면 밖에서도 다 들릴거 아니냐." 라고 하니 한마디도 지지 않던 사관 민인생은 "나처럼 올곧은 사관은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라면서 아무리 왕이라도 역사적 기록을 하는 사관을 마음대로 내칠 수 없다는 표현을 간접적으로 했던 것이죠.

 

이 역대급 골 때리는 사관 민인생은 그 후로도 고위 관료들만 참석할 수 있는 연회에 몰래 참석하기도 했고 매 사냥을 나간 태종이 자신을 못 알아보게 하기 위해 변장을 하면서까지 따라나서기도 했으며 경연 때는 병풍 뒤에서 왕과 신하들의 말을 엿들으면서 사초에 전부 기록하다 보니 별명이 킬방원일 정도로 강한 군주였던 태종은 그가 하는 짓이 다 음흉한 짓이라며 결국에는 그를 귀양을 보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세종도 사관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는데요.

친형이었던 양녕대군이 한양에 머무는걸 반대하는 상소가 빗발치자 짜증 난 세종은 그 상소를 모두 태워버리라고 명령했죠.

그러자 신하들은 "이 상소들을 불 태우는건 상관이 없지만 어차피 사관들이 이 모든 사실을 기록할 텐데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라고 말해 결국 세종은 상소를 태우라는 명을 거둬들였다고 하죠.

 

또한 정종은 격구라는 운동경기를 하는걸 좋아했는데요.

궁 한쪽에서 격구하는 소리가 들리자 정종은 그들과 함께 격구를 하고 싶었던 것이죠.

하지만 사관들이 이를 기록할까 신경 쓰였는지 옆에 있던 사관에게 "격구 하는 것도 사초에 쓰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관은 "전하께서 거동하시는 것 모든 걸 쓰는데 격구는 당연히 쓰겠죠" 라고 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렇게 사관들이 왕을 따라다니며 메모 비슷하게 해놓은 걸 사초라고 불렀고 이 사초를 모아 정리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이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기록 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세계에 알렸는데요.

정확한 역사를 기록하는건 조선시대 때는 특히나 엄청나게 중요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역사는 다른 것에 오염되지 않고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해야 역사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때 묻지 않고 강직한 신참 관료가 주로 사관으로 임명되었죠.

조정물 좀 먹다 보니 편이 갈리고 당색에 물들거나 편파적이게 된 나이 든 관리보다는 젊은 관리들은 자부심이나 사명감 등이 투철해 객관적인 사실만 기록해야 하는 사관으로써는 적격이었습니다.

 

또한 사관은 왕이나 신하들이 말을 한 것을 순식간에 한자로 고쳐 써야 했기 때문에 문장력이나 재능, 학식, 재치와 순발력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 사관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당시 재상이 되려면 어릴 적 사관을 했어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도 하죠.

 

전적으로 사관의 일만 하는 전임사관은 24시간 교대로 근무를 하게 되는데 왕의 근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낱낱이 기록했었고 그렇게 기록한 것을 사초라고 했습니다.

전임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실록을 만드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기록이었죠.

 

전임사관은 국정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도 사초에 남겼는데요.

이렇게 비밀리에 적어놓은 사초들을 가장사초라고하여 집에서 보관해놓았다가 왕이 승하하면 실록청에 제출했었습니다.

 

사초는 왕들도 볼 수 없었는데요.

사초에는 왕이나 대신들을 까는 내용도 수두룩했기 때문에 이를 왕이 알게 되면 온 조정에 피바람이 부는 경우도 있었죠.

그런데 당나라의 태종은 유일하게 사초를 본 군주였는데요.

 

사초를 가져오라는 당태종의 협박에 못이긴 재상 방현령은 급하게 사초를 고쳐서 당태종에게 바쳤고 그렇게 왜곡된 역사가 만들어졌던 것이죠.

군주가 권력으로 사초를 보게 되면 어떻게 역사가 왜곡되는지 증명해 보인 당태종이었습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고려 공양왕 때의 사관이 우왕과 창왕을 죽인 자는 이성계라고 적어놓은 사초를 보게 되었는데요.

그러자 죽일 마음은 없었는데 신하들과 백성들의 뜻이 모여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듯, 이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까지 했다고 하죠.

 

그 이후에도 찜찜해서 그런지 계속 사초를 보여달라고 하면서 당태종도 사초를 봤는데 왜 나는 못 보냐며 우기기도 했지만 이러다가 더 큰 사단이 나겠다 싶었던 신하들이 극구 태조를 만류하는 바람에 더 이상 사초를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사관이었던 신개는 사초를 본다면 기록이 좋게 남더라도 후대 사람들이 그 기록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될 것이라고 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훗날 연산군 때에는 실제로 사초 때문에 피바람이 부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사관이었던 김일손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기록했었는데 그 기록을 당시 실록청의 책임자였던 이극돈이 보았고 이를 연산군에게 고했다가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되면서 김일손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났었죠.

 

사관의 사초가 왕인 연산군 귀에 들어가서 피바람이 불자 사관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하면서 사관의 힘은 위축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연산군 일기의 내용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데 오늘은 날씨가 흐리다, 오늘은 맑다 정도만 기록된 것도 많죠.

 

연산군이 이 사단을 내놓다 보니 '왕이 사초를 보는 것 자체가 자신이 폭군이라는걸 인증하는 행위' 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또한 실록에 실자만 꺼내도 폭군 연산이 했던 행위다! 연산군이다!! 라며 신하들이 난리를 치니 감히 실록을 보거나 사초를 보는 것에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죠.

 

사관들은 왕뿐만 아니라 대신들에 대한 평가도 남겼습니다.

황희 정승을 황금을 뇌물로 받는 대사헌이라는 뜻의 '황금 대사헌'이라고 기록해 놓기도 했죠.

 

당연히 사초는 그 누구도 보지 못했으며 사관들 조차도 왕이 승하한 후에 실록 편찬의 목적으로만 사초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조선시대에는 역사의 기록에 진심이었다 보니 심지어 중종대에는 왕의 침전에까지 들어가는 사관이 있어야 한다며 여자 사관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죠.

 

또한 의정부나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일을 하면서 사관의 업무까지 겸직하는 경우도 많았는데요.

이들은 각자 일하던 곳에서 국정 운영과 제도에 관한 모든 것들을 기록해 놓았고 매년 그 기록들을 모아 연월일 순으로 편집하고 정리한 것을 '시정기'라고 했습니다.

 

왕이 죽으면 임시 관청인 실록청을 만들어 사초, 시정기, 가장사초 등 모든 자료를 다 모아놓고 뺄 건 빼고 넣을 건 넣고 해서 실록을 만들었던 것이죠.

또한 실록이 완성되면 나머지 사초들은 사관들의 후환(?)이 될 수도 있으니 모두 폐기했어야 하는데 당시엔 종이값도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에 물에 사초 쓴 것을 씻어 글씨는 지우고 종이는 재활용했습니다.

 

이를 세초라고 불렀는데 세초를 했던 덕분에 사관들이 왕이든 대신이든 그들의 부정적인 평가까지 마음 놓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죠.

완성된 실록은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보관되었습니다.

사초와 마찬가지로 실록은 왕이 절대 볼 수 없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실록을 보려고 했던 왕들이 몇몇 있었지만 신하들이 격한 만류로 보지는 못했고 어쩌다 사관들을 통해 일부 내용만 들을 수는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사관의 힘은 굉장히 강했고 강직하고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한 사관들도 많았지만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당파 싸움으로 인해 사관의 강직한 면모가 많이 누그러뜨려졌으며 그러다보니 '선조 수정실록'이나, '현종 개수실록'과 같이 당시 집권한 당파에 따라 실록의 내용이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화재나 소실, 파손에 대비해서 총 4군데에 분산해서 보관을 했는데요.

이렇게 분산해서 많이 보관을 했었던 덕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전란의 화마가 실록에까지 미치게 되어 대부분 불살라졌지만 결국엔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은 살아남아 현재까지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죠.

 

그만큼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사관들이 있었고 그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잘해주었기에 이렇게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왕들에게 밉상으로 찍혀 온갖 수모를 받을 때도 많았지만 역사를 기록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버텨온 사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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