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어머니 폐비윤씨에 대한 피의 복수극을 하면서 조정에 피바람이 불게 됩니다.
이후로 연산군은 제대로 흑화되어 명실상부 조선 최악의 폭군이 되어버린 사건, 갑자사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연산 9년인 1503년 9월 11일. 창덕궁 인정전에서는 한참 연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연산군은 이 연회에 참석한 신하들에게 술을 받고 자신도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고 있었죠.
그러던 중 예조판서 이세좌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평소 술을 잘 못 마시던 이세좌였지만 연산군이 주는 술을 연거푸 마셔댔고 그렇게 취기가 오른 이세좌는 또 왕이 주는 술을 받다가 그만 용포에 술을 쏟아버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죠.
이후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간 연산군은 갑자기 용포에 술을 쏟았다는 이유로 이세좌를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잡혀온 이세좌는 실수로 술을 흘렸다고 했지만 연산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4일 후에는 그를 파직시켜버렸죠.
이에 대신들은 이세좌가 술도 잘 못하는데 전하께서 내리는 술은 다 받아마셨다고 자랑까지 했을 정도였다며 단순한 실수였으니 그를 봐주라고 했지만 9월 20일이 되어서는 아예 유배형에 처해버렸습니다.
기껏 옷에 술 조금 쏟았다고 유배를 가게 되어버린 것이죠.
심지어 처음에는 남쪽 끝이던 전라남도 무안으로 유배를 보내라 했다가 며칠 동안 실컷 무안으로 내려가니 다시 북쪽 끝인 함경도 온성으로 가라고 할 정도로 연산군은 그에게 묘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세좌는 20여 년 전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사사당할 때 사약을 들고 갔던 인물이었고 이에 대신들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1504년 1월이 되자 연산군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세좌를 유배에서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표하는 이세좌에게 술을 따라주며 "이것은 니가 저번에 쏟은 술이다"라는 농담까지 하면서 말이죠.
그러고나서 2개월이 지난 3월 11일. 후궁을 뽑기 위해 간택령을 내렸는데 경기도 관찰사이던 홍귀달의 손녀도 후궁 후보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홍귀달이 거부하면서 손녀를 궁에 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글로 써서 연산군에게 보냈는데요.
이 글을 본 연산군은 막 화를 내더니 갑자기 불똥이 이상한 곳으로 튀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지난번에 이세좌를 제대로 벌주지 않아서 신하들이 자신을 업신여기고 기어오른다며 급발진한 것이었죠.
그러고는 이세좌를 다시 유배 보내버리면서 그의 아들과 사위들까지 모조리 곤장을 친후 유배를 보내버렸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 뒤 3월 20일 날 밤,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는데요.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이던 폐비윤씨를 모함했다는 이유로 아버지 성종의 후궁들이던 귀인정씨와 귀인엄씨를 끌고 와서 직접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버린 것이었죠.
그리고나서 연산군은 귀인정씨의 아들이자 자신의 이복동생 이항과 이봉을 잡아오라 명했는데요.
부하들이 그 둘을 잡아오자 둘 앞에는 자루에 쌓여있는 무언가가 있었죠.
그 자루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귀인정씨와 귀인엄씨였는데요.
연산군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물리친 뒤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앞에 보이는 자루 안에 있는 것들은 죄가 매우 큰 여자들이니 너희가 몽둥이로 때려라" 라고 하는 것이었죠.
바로 자식들 보고 어머니를 구타하라고 시킨 것입니다.
그러자 겁에 질린 이항과 이봉은 몽둥이를 집어 들었고 이항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아 자루에 담긴 사람을 마구 두들겨 팼지만 이봉은 자루 안에 있는 것이 자신의 어머니인 줄 눈치채고 구타하지는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었죠.
이를 본 연산군은 격하게 화를 내며 사람을 시켜 계속 폭행을 가하라 명했고 그렇게 귀인정씨와 귀인엄씨는 그날 맞아 죽어 버렸습니다.
그리고선 내관들에게 귀인 정씨와 엄씨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젓갈을 담근 후 산과 들에 뿌려버리라 명했죠.
눈 뒤집힌 연산군의 무시무시한 행동은 그게 끝이 아니었는데요.
계모이던 자순대비의 침소를 찾아가 검을 뽑아들고는 당장 밖으로 나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쳤죠.
그의 이런 미친 짓에 놀란 궁녀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버렸고 자순대비는 겁에 질린 채 방 안에서 꼼짝 달싹 못하고 있었습니다.
연산군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중전 신씨가 그곳으로 달려와 연산군을 붙잡고 울고불고 하며 말렸고 결국 연산군은 다른 곳으로 갔죠.
그런데 그가 다른 데로 이동한 곳 또한 마찬가지로 골 때리는 장소였는데요.
연산군은 이항과 이봉 둘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인수대비가 있던 대왕대비전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수대비가 있는 대비전 안으로 들어간 뒤 이항을 시켜 할머니에게 술을 올리라 했고 인수대비는 당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었는데 연산군의 강압에 못 이겨 억지로 술을 받았죠.
그리고 술을 받아 마신 인수대비에게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라고 말하자 정신이 온전치 못하던 인수대비는 베 두필을 연산군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인수대비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왜 죽였냐며 매우 불경한 언사를 내뱉었죠.
기록에는 불경한 언사라고만 되어있고 그가 어떤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손자 연산군의 이런 위협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인수대비는 불과 한 달 후인 4월 27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박치기를 가했다' 라는 이야기는 실록에는 기록이 없는 야사라고 합니다.
어쨌든 너무나도 살벌했던 그날 밤의 악몽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죠.
다음날 날이 밝자 이제는 신하들에 대한 피의 복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의 폐출에 동의한 신하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찾아내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찾아 죽이기 시작했죠.
사약을 전달했던 이세좌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거기다가 이세좌가 광주이씨라는 이유로 이극균 등의 광주이씨들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죠.
당시 이극균은 죽기 전에 "자신은 나라의 크고 작은 일에 전력을 다해 섬겨왔고 아무리 생각해도 죽을죄는 하나도 없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을 보고받은 연산군은 크게 화내며 이극균의 8촌 이내의 친족들을 모조리 몰살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윤씨를 폐하는데에 동의했던 윤필상 역시 자살을 명했죠.
또한 이미 죽고 세상에 없던 남효온,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어세겸 등은 무덤을 파 시체의 목을 잘라 버리는 부관참시에 처해졌으며 한치형은 시신의 목뿐만 아니라 온몸을 잘라버리는 부관능지를 당했습니다.
또한 어처구니없는 점은 죽은 대신들과 친했다는 이유로 이장곤, 이윤검 등이 처벌받았고 특히 이극균과 친했던 유자광과 임사홍도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죠.
이 이후로도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가 폐서인 될 때 별로 관련이 없던 사람도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이면 별의별 이유를 다 갖다 붙여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한동안 궁 내에서는 고문을 받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끊임이 없었죠.
또한 이세좌 등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이미 죽은 사람들은 뼈를 가루 내어 바람에 날려버리는 쇄골표풍이라는 처벌도 했으며 죄인들의 집을 철거한 다음 그 자리를 연못으로 만들어버리는 파가저택이라는 처벌을 내리기도 했죠.
이때 처벌을 받은 사람은 239명이었고, 이 중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122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것도 기록에 의해서 세어진 피해자들 수일뿐이지 여기 기록에 남지 않고 연좌제에 따라 처벌된 사람들까지 합하면 최대 3,000여 명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하죠.
이렇게 피바람이 불고 나서 사림파, 훈구파 할 것 없이 엄청나게 많은 신하들이 죽임당했고 유례없는 이 사태 덕분인지 연산군이 뭘 하든 연일 안된다고만 외치던 삼사와 대신들도 감히 연산군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라고만 하는 예스맨들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연산군은 왕으로써의 일은 완전 내팽개친 채 사치와 향락만 일삼았고 그렇게 조정의 창고는 텅텅 비어갔으며 결국에는 반정이 일어나게 되면서 그는 왕위에서 끌어내려지게 되죠.
조선이 건국되고 처음 있었던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이 사건은 훗날 '갑자사화' 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이 왕이었을 때는 언제 어떤 식으로 죽임을 당할지 신하들 입장에서는 살얼음판 같았을 것 같네요.
조선시대 최악의 폭군 연산군이 일으킨 피바람, 갑자사화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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