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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고종. 지지리 운도 없고 능력도 없었던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왕

by 사탐과탐 2021.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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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도 잘못 태어났고 강한 아버지와 기센 아내를 만나 평생 기한번 못 펴고 살았던 왕 고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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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지도자는 부패한 지도자보다 나쁘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 지도자가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게 되기 때문인데요.

 

혼란했던 19세기 조선에 무능한데다 욕심까지 많았던 왕이 있었습니다.

나름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살려보려고 이것저것 노력은 해봤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변덕을 부리거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면서 신하들과 백성들이 나라를 살리려고 시작했던 일마저 다 말아먹었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자신의 무능함으로 조선을 멸망의 위기로 몰고 갔던 남자 고종입니다.

 

1852년 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고종은 열두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됐습니다.

25대 왕이었던 철종이 후손 없이 사망하자 왕실의 큰 어른이었던 신정왕후에게 입양되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왕위의 자리를 갑작스럽게 물려받게 된 것인데요.

 

나라를 돌보기에는 너무나도 아는 것이 없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고종이 15살이 될 때까지는 신정왕후 조 씨가 나랏일을 대신 처리했죠.

신정왕후가 물러난 뒤로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사실상 국왕의 역할을 대신하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대원군은 세도가의 과도한 특권을 줄이기 위해 온갖 비리를 저지르던 서원과 비변사를 없애버리고 양반에게도 세금을 걷는 호포법 등의 정책을 펼치며 세도가들로부터 착취 받던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강력하게 문호 개방을 요구하던 서양 세력과 절대 교류하지 않겠다는 '쇄국정책'을 펼쳤는데요.

 

당시 조선사회는 서양 세력에 대한 반감이 높던 시기였기 때문에 대원군의 이 같은 정책 또한 많은 지지를 받게 되죠.

백성들의 지지로 강력한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 때문에 고종은 이름뿐인 왕으로 자신의 10대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덕분에 즉위한지 10년이 지난 22세가 되던 해 최익현의 상소로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에야 비로소 나라를 직접 다스리게 되는데요.

흥선대원군은 나라 안의 문제들을 개혁하는 데 있어서는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세상의 흐름을 읽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영국의 침략에 의해 청나라가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봤으면서도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바깥세상과 교류를 거부했죠.

그렇게 조선은 주변 나라들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발전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고 훗날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고종은 흥선대원군과는 반대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데요.

조선을 개방하고 개화시키는 것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미국·영국·독일 등과 잇달아 수교 통상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서양의 우수한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정하고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배워야 함을 강조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만큼 고종의 근대화 의지는 확고해 보였는데요.

하지만 고종이 진정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근대화를 주장한 것인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개혁을 원하는 태도를 보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고종은 왕권 강화에 골몰했을 뿐 국권 수호나 진정한 근대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왜냐하면 고종은 나라를 근대화시키자는 논리를 펼치면서도 여러 면에서 대원군 이전 세도정권의 부패한 모습들을 똑같이 보여주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런 고종의 탐욕과 무능함은 여러 가지 사건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났습니다.

먼저 외척인 민씨 일파가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것을 사실상 방관하거나 부추겼는데요.

이 민씨 일파가 선혜청이라는 기관을 장악하고 군인들의 월급을 횡령하면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임오군란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은 13개월이나 월급을 받지 못해 난을 일으켰는데 당시 고종은 자신의 아들인 순종의 결혼식 혼수품으로 많은 양의 비단을 일본 회사로부터 사들였다고 하는데요.

군인들의 상황을 알고도 그랬다면 왕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고 상황을 몰랐다면 그것대로 무능한 것이죠.

 

고종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조선에서는 관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유행했는데요.

외척인 민씨 일족은 이 매관매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고종도 이를 통해 자신의 개인 비자금인 내탕금을 모았습니다.

 

문제는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산 관리들이 자신이 쓴 돈을 메꾸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했기 때문에 참다못한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이것이 결국 동학농민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고종은 자신의 실책으로 일어난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를 끌어들였고 결국 그들이 조선에 군대를 배치할 수 있게 되는 명분을 제공하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얼마 후에 조선에 있던 일본군이 민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고종은 자신이 한나라의 왕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을 가버립니다.(아관파천)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도 초기에는 김옥균과 박영효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금방 마음을 바꿔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버리는 변덕을 보였고 결국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나게 되죠.

 

또한 지나칠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여 독립협회를 무너뜨리고 만민 공동회를 탄압해버리기도 했습니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에 설립되어 1898년 12월 25일 해산될 때까지 2년 반 동안 조선의 민권운동과 근대화 운동에 힘썼던 민간단체입니다.

 

대한 제국의 황제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고종의 지원을 받아 나라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에 힘썼죠.

하지만 고종과 독립협회의 생각에는 큰 차이가 있었는데요.

독립협회의 주축인 서재필과 윤치호는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입헌군주제를 원했고 고종도 이에 동의하며 국회가 설립되기도 했지만 사실 고종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왕이 강력한 권한을 가지며 근대화를 진행하는 절대군주제였습니다.

 

고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의 발전이 아니라 자신의 왕권이 강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자신과 생각이 다른 독립협회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자신의 권력을 뺏길까 두려움을 느낀 고종은 황국협회라는 단체와 왕실의 병력을 동원해서 한때 자기가 직접 후원했던 단체를 강제로 해산시켜버립니다.

 

독립협회 협회장이었던 윤치호는 고종의 앞과 뒤가 다른 행동에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해서 대체 이 나라의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는가"라며 분노했죠.

고종은 나라의 자금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도 제대로 된 지식이 없는 상태로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에 예산조차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황실의 각종 집기에서부터 양무호 등의 외국산 무기와 전함 등을 사며 무분별하게 돈을 썼습니다.

 

게다가 일본이 대한 제국에 억지로 거액의 빚을 지게 만들었을 때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빚을 갚지도 못해서 보다 못한 백성들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키게 만들었죠.

당시 조선의 재정은 공식적으로 나라의 자금을 운용하는 탁지부가 아니라 왕실의 사유재산인 내탕금의 비중이 컸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고종은 주로 이 내탕금을 사용해 개혁 정책을 추진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 예산이 아니라 청와대 자금으로 정책을 시행한 것인데요.

당시 고종의 공식적 비자금 창고인 궁내부에 소속돼있던 내장원과 내탕금은 기존의 예산을 집행하는 탁지부를 훨씬 능가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고 합니다.

 

몇몇 학자들은 당시에 많은 권한들이 일본 및 다른 나라들에게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황제가 직접 관리할 수 있는 내탕금에 자금을 모아둔 것이라고 주장했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 자금들은 정말 써야 할 곳에는 제대로 쓰이지도 못했으며 애초에 고종은 그 돈을 나랏일에 쓸 생각조차 없이 홍콩이나 상하이, 독일 은행 등에 보관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비자금 규모는 드러난 것만 무려 51만 마르크(현재 가치 약 250억 원)에 달했으며 실제로는 100만 마르크 이상의 거액이었다는 문서도 남아 있다고 하는데요.

결국 이 돈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일제 통감부에 전부 빼앗겨 버립니다.

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가 이 돈을 되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죠.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비자금 관련 문서를 이승만에게 보내며 일본에게서 비자금을 되찾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승만은 이 요구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고 이 돈의 행방은 아직까지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60년간 이어졌던 세도정치 때문에 고종이 왕위를 물려받았던 시절 조선의 상황이 좋지 못 했던 것도 사실이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이 많은 것을 바꾸려고 노력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급변하는 19세기 말의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고 몇몇 그가 시도했던 일들은 오히려 외세의 개입을 부추기며 조선의 명을 단축시켰던것 또한 사실이죠.

 

무능한데다 시대를 잘못 타고나기까지 했던 불운한 조선의 왕 고종의 이야기였습니다.

위기에 빠진 조선을 담기에는 너무나도 그릇이 작았던 왕 고종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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