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은 사냥에 진심이었는데요.
사냥이 하고 싶었던 태종과 못하게 하려는 신하들과의 티격태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의 두 번째 왕이었던 태종 이방원은 킬방원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피의 숙청을 벌이며 왕권을 강화시켰던 인물로 유명하죠.
때문에 사람들은 이방원하면 무자비한 군주로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태종은 자신의 정적들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관대한 모습을 보였던 왕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은 무대포로 나가서 막 하고 돌아왔을 거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사냥조차도 신하들에게 온갖 눈치를 받으면서 해야 했기 때문에 신하들 몰래 혼자 궁궐 밖을 나가 사냥을 하고 돌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태종은 정치싸움에서 참아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몇 년이든 참아내는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했지만 자신의 취미인 사냥에 관해서는 자제심이 아예 없었다고 하는데요.
오죽하면 "전하께선 사냥을 너무 다니시니 걱정입니다." 라고 신하들이 간언을 올린 기록을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사냥과 관련된 태종의 재밌는 일화가 한 가지 있는데요.
1404년 2월 황해도 해주 인근에서 태종이 한창 노루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유난히도 짙은 안개가 꼈던 탓에 앞을 보지 못한 태종의 말이 넘어졌고 말 위에 있던 태종도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죠.
민망했던 태종은 말에서 떨어진 사실을 숨기고 싶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라고 지시했습니다.
말에서 떨어지면 충격이 꽤 컸을 텐데 아픔보다는 왕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은 게 더 신경 쓰였던 것인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날 태종이 말에서 떨어진 사실은 물론이고 사관에게 비밀로 하라는 말까지 고스란히 사관이 듣고 사초에 적어 실록으로 편찬됐기 때문에 태종의 흑역사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실록을 기록하던 사람이 바로 민인생이라는 사관인데요.
그는 거의 태종의 스토커 수준이었다고 하죠.
태종은 즉위한 초창기부터 측근 몇몇만 데리고 종종 비공식 사냥을 나갔는데 민인생은 복면까지 하고 뒤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대전이 아닌 왕의 개인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병풍이나 휘장을 들쳐 내고 몰래 엿보다가 쫓겨난 적이 수도 없이 많다고 하죠.
찰거머리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는 민인생의 행동에 참다 참다못한 태종이 버럭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민인생은 태종이 이런 이유로 화를 낸 것까지도 적겠다고 버텼죠.
생각할수록 민인생이 괘씸했던 태종은 결국 보복성 인사로 민인생을 사관직에서 내쫓았고 그는 세종 때가 되어서야 다시 복직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하루는 태종이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조선의 국왕으로 인정받은 사실을 종묘에 고하고 제사를 올리기 위해 한양으로 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냥이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태종은 갑자기 발을 돌려 종묘에 예를 올리기 위한 복장까지 다 벗어던지고 신하들 몰래 혼자서 사냥을 하러 가버렸는데요.
왕이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된 신하들이 깜짝 놀라 태종을 쫓아와서 종묘에 예를 올리러 와서 살생을 해서는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해댔죠.
그러자 태종도 화가 났는지 "아니 임금이 사냥을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왜 이렇게 잔소리가 심한 것이냐"라며 버럭 화를 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불과 며칠 전에도 태종이 주위에 알리지 않은 채 무사들만 데리고 기러기 사냥을 나가는 바람에 왕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의 반대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신하들이 필사적으로 반대를 할만한 것이 조선시대 왕의 사냥은 많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는데요.
사냥 규모가 커지기라도 하면 사냥터로 정해진 지역의 백성들은 곡식을 미리 수확해야 했고 미처 수확하지 못한 곡식이 말과 짐승 몰이꾼들의 발에 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말에게 먹일 풀을 백성들이 준비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자신의 고을에서 사냥하는 임금을 위해 지방관들이 올리는 선물도 결국 백성들에게서 걷어들인 것이었으므로 왕의 즐거움을 위해 백성들이 희생하게 되는 꼴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국왕에게 간언하는 일을 담당했던 사간원과 사헌부의 대간들은 자유분방하게 사냥을 즐기는 태종을 말리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만 했는데요.
당시 조선에는 국왕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지는 대규모 군훈련인 '강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강무는 사냥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일정한 체계 아래 역할을 분담하여 이루어지는 집단적 사냥 활동을 통해 병사들이 북과 깃발 등 여러 가지 신호체계로 군령을 전달하는 연습을 하고 짐승 몰이를 하면서 다양한 진법 훈련을 할 수 있으며 사냥감을 맞추면서 궁술도 연마할 수 있는 종합적인 훈련이었죠.
태종은 1년에 두 차례, 봄ㆍ가을로 농사철과 겹치지 않는 시기에 강무를 하도록 정해서 재위 기간 중 총 24번의 강무를 시행했는데요.
장소는 경기도와 강원도, 황해도 등지의 여러 지역을 돌아가며 정하였으며 기간은 10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강무처럼 정기 군사훈련의 명분이 있는 사냥만 했다면 신하들도 감히 뭐라고 하지 못했겠지만 태종은 좋은 매를 구했다던가 어디에 짐승이 많다던가 하는 핑계만 생기면 사냥을 나가려고 했다는 게 문제였죠.
태종의 사냥 사랑은 도가 지나칠 정도였습니다.
신하들의 이런 반대에 태종은 정기적인 군사훈련 또는 종묘에 바칠 제물을 구하기 위해 사냥을 가는 것이라며 반박하거나
"내가 과거에는 붙었지만 원래 무인 집안사람이라 가끔 몸을 움직여줘야 기가 잘 돈다"
"내가 원래 궁궐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 답답함을 참기 어려운 데다 매사냥은 사가에서 살 때부터 즐겨 하던 것" 이라고 핑계를 댔죠
그런가 하면 중국 송나라 시대의 유학서인 <대학연의>를 펴들고 "이 책에서도 사냥을 권장하고 있으니 내가 사냥해도 별문제가 없다!"라고 하는 등 온갖 핑계를 다 대며 기어이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고 하네요.
1418년 8월 태종은 “18년 동안 ‘호랑이’ 등을 탔으니, 이미 족하다” 라며 왕의 자리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됩니다.
이때부터 태종은 본격적으로 매사냥을 즐기기 시작했는데요.
아들인 세종에게 살이 너무 쪘으니 바람도 쐴 겸 함께 사냥 나가자며 은근슬쩍 세종을 끌어들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따가운 신하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형인 정종까지 끌어들여 세종과 셋이서 매사냥에 나서기도 했는데요.
그러다가 아예 매사냥 포인트인 뚝섬 인근의 풍광 좋은 곳에 별장인 낙천정을 짓고 대부분 사냥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태종의 매사냥은 죽기 한 달 전인 1422년 4월 22일까지 계속됐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너무나도 사냥이 하고 싶었던 왕 태종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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