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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화완옹주. 조카인 정조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다 나중에는 해를 가하려고까지 한 여인

by 사탐과탐 2022.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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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완옹주는 영조에게 편애를 받다시피 한 딸이었는데요.
사도세자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녀는 조카이던 정조에게 과도하리만치 집착을 했는데 훗날 비위가 상했는지 해를 가하려까지 하죠.
정조의 고모 화완옹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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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영조가 사랑했던 딸이지만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던 화평옹주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죠.

그런 영조가 화평옹주를 허망하게 보내고 나서 다시 편애하게 되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오늘 이야기할 인물입니다.

그녀는 바로 화완옹주인데요.

 

영조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자식들 중 몇몇에게만 사랑을 주었고 사도세자와 화협옹주와 같은 자식들은 유난히 미워했었죠.

심지어 영조가 사랑하던 딸인 화평옹주를 만나러 갈 때는 일부러 사도세자를 불러 무언갈 물은 뒤 대답을 듣고는 귀를 씻고 그물을 화협옹주가 사는 곳 방향으로 버렸을 정도였었습니다.

 

이 정도로 편집증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영조의 자식들에 대한 차별은 유독 심했었죠.

그런 그에게 화완옹주의 탄생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화완옹주는 1738년,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의 딸로 태어났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영빈이씨가 바로 사도세자를 낳았던 영조의 후궁입니다.

그녀는 사도세자의 친동생이자 정조에게는 고모이죠.

사랑하던 화평옹주가 22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했을 당시 영조 곁에 남아있는 딸은 화완옹주와 화유옹주 밖에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화완옹주는 아직 어리고 애교가 많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화평옹주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에 사랑하던 딸을 잃고 상심하고 있던 영조에게 큰 위로가 되었죠.

하지만 영조의 편애를 다른 동생들에게 돌아가도록 노력하던 화평옹주와는 달리 화완옹주는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남매들과의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결혼도 하고 나서는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 자신이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남편인 정치달도 그런 그녀에게 영조의 미움을 받는 남매들을 신경 써주라고 조언해 주었다고 하죠.

혜경궁홍씨가 쓴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가 화완옹주만 편애하고 사도세자는 미워하는 것을 정치달은 매우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그때부터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편에 서서 영조와의 사이가 좋아지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는데요.

그 덕분에 사도세자는 동생인 화완옹주의 배려에 고마워했으며 화완옹주가 훗날 딸을 낳았을 때도 제 자식인 마냥 기뻐하고 축하해 줬다고 하죠.

 

사도세자가 이 정도였다면 영조는 어땠을까요?

영조는 손주를 낳은 딸 화완옹주를 축하해 주기 위해 버선발로 뛰쳐나갔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화완옹주에게는 비극이 일어나는데요.

 

바로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던 딸이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버렸고 심지어 딸이 죽고 난 다음 달에는 남편인 정치달마저 사망하고 만 것이죠.

그런데 정치달이 죽던 날 중전이던 정성왕후도 세상을 떠났는데요.

영조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슬퍼하고 있을 딸에게 먼저 찾아갔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궁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대소신료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영조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질 만큼 극렬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자신의 아내이자 중전의 죽음보다 너무 슬퍼하고 있을 딸이 더 걱정되었던 것이죠.

거기에다가 남편과 딸을 잃고 홀로 슬퍼할 화완옹주를 그냥 두기에 마음이 아팠는지 그녀를 다시 궁에 불러들여 살게 했는데 이 또한 관례를 깨는 일인 동시에 엄청난 특혜였습니다.

 

세자가 아닌 이상 혼인을 한 왕의 자식들은 모두 궁 밖으로 나가 살아야 했기 때문이죠.

또한 영조는 죽은 사위 정치달의 형제였던 정석달의 둘째 아들 정후겸을 화완옹주의 양자로 정해주기도 할 정도로 그녀의 후손까지 생각해 주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어쨌든 다시 궁에서 살게 된 화완옹주는 이상하리만치 오빠인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조카였던 세손, 정조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그녀는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보다 정조를 더 세심하게 신경 써주었다고 하죠.

그러다 1762년, 임오화변이 일어나 사도세자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어린 정조를 옆구리에 끼고 살다시피 하면서 먹는 것부터 입는 것 노는 것까지 살뜰히 챙겼습니다.

이것도 어머니인 영빈이씨와 함께 있을 땐 어느 정도 행동을 자제 하긴 했지만 영빈이씨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눈치 볼 것도 없었는지 더욱 정조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고 하죠.

 

이런 편애나 집착하는 것은 아버지 영조의 그런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는데 아버지로부터 편집증을 물려받은 것이라는 의견도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화완옹주는 정조의 아내였던 효의왕후에게도 마치 자신이 시어머니인 양 심하게 구박하기도 했다고 하죠.

그리고 세손인 정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도 심한 질투를 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정조가 아끼는 물건에까지 질투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화완옹주의 비정상적인 집착으로 인해 정조는 나이가 좀 들고나서부터 고모인 그녀를 꽤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했다고 하죠.

그리고 혜경궁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화완옹주가 세손빈이었던 효의왕후를 질투하면서 세손과 세손빈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내용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이간질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1770년 이후부터 정조 부부 사이는 굉장히 벌어지기 시작했죠.

하지만 정조는 아내와는 사이가 벌어졌지만 처남과는 여전히 돈독한 사이로 지냈는데요.

이마저도 질투한 화완옹주는 정조에게 효의왕후 친정집에 대한 험담을 끊임없이 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정조가 좋아하던 장인어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슬퍼하던 정조의 모습을 본 화완옹주는 행여나 정조가 아버지를 잃은 세손빈을 불쌍히 여겨 다시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워했다고 하죠.

사태가 그 정도까지 가다 보니 화완옹주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하는데요.

 

그것은 바로 "세손빈의 부친상이 뭐 그리 대수냐,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이냐"라는 말을 해댄 것이었죠.

그녀의 선 넘은 언행에 제대로 열받은 혜경궁 홍씨는 화완옹주를 불러 크게 혼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해대는 옹주였지만 영조의 총애를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다 보니 영조의 분노가 두려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심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눈치를 봤다고 하죠.

 

그렇게 자신의 조카인 세손을 아끼고 집착했던 화완옹주였지만 어느 순간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하고, 그가 왕위를 잇는 것을 방해하면서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녀의 양아들이었던 정후겸이 홍인한 등과 결탁해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고 왕위를 잇는 것을 방해하고자 온갖 모략을 꾸미기까지 했죠.

 

갑자기 그녀가 집착하던 정조에게 등을 돌린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정조가 나이가 들면서 고모의 집착이 부담스러워지고 간섭하는 것도 싫어지자 점점 화완옹주를 피했는데 이에 빈정이 상해서 사이가 틀어졌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조카에게 하던 비정상적인 집착이 정조에게 등을 돌리게 된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아무튼 그녀의 양아들 정후겸은 세손이 기거하던 동궁에 사람을 심어두고 세손의 뒷조사를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세손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까지 퍼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정후겸과 홍인한 등과 함께 화완옹주 역시 탄핵당하게 되어 옹주의 신분을 빼앗기고 유배를 가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래도 옛정이 남았던 것인지 정조는 화완옹주가 가있던 유배지로 문안인사를 드리러 가기도 했으며 시간이 흘러 그녀의 유배지를 남편이었던 정치달의 묘가 있는 파주로 옮겨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화완옹주가 아파서 쓰러진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가기까지 했으며 1799년에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완옹주의 죄를 용서해 주었죠.

 

그런데 그녀는 유배를 가고 나서부터 옹주가 아닌 정처 (정치달의 처라는 뜻) 라고 불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 기록으로 봤을 때, 그녀의 신분이 다시 옹주로 복권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죠.

거기다가 왕실 종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요.

 

다만 1808년 5월 17일 자에 기록된 순조실록을 보면 "정처가 죽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는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죠.

여러 드라마에 항상 등장하는 화완옹주를 보면 항상 사도세자와 정조를 음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악역으로만 나왔던 것 같은데요.

 

사실 사도세자와도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정조에게 이상하리 만치 집착했던걸 보면 또 드라마와는 다른 점이 많구나 하고 생각이 드네요.

영조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딸 화완옹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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