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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정비안씨.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너무나도 비참한 삶을 산 여인

by 사탐과탐 2022.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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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안씨는 고려 공민왕의 비였는데요.
그녀는 남편도 잘못 만났고 시기도 잘못 타 온갖 비극적인 일이 겹치며 일어납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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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역사상 어떤 왕조든 멸망할 때나 멸망하기 직전에 왕실 가족들은 정말 비참하기 마련인데요.

오늘은 고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왕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바로 고려 공민왕의 제 4비 정비안씨인데요.

흥미로운 사실은 그녀는 고려 공민왕의 아내로써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태종 이방원보다 더 오래 살다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죠.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았던 그녀였지만 그녀의 삶은 굉장히 비극적이었습니다.

 

정비안씨는 1352년 문정공 죽성군 안극인의 딸로 태어났죠.

그리고 그녀가 15살이 되었을 때 공민왕의 왕비로 간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최악의 일이 될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죠.

 

시간이 흘러 공민왕의 1비이던 노국대장공주가 세상을 떠나고 당시 동지밀직이었던 아버지 안극인이 공민왕에게 노국대장공주의 영전 공사하는 것을 중지하라는 건의를 하자 이에 열받은 공민왕은 그녀의 아버지를 파직시켜버리면서 정비 안씨 또한 궁에서 쫓겨나버렸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쫓겨나 궁 밖에서 사는게 더 나았을 수도 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궁으로 돌아가게 되었죠.

그러나 1372년 음력 10월, 공민왕은 자제위 소속의 홍륜과 한안 등을 시켜 자신의 후비들을 강간하도록 명령했는데요.

다시 궁으로 돌아간 정비안씨에게도 역시 강제로 자제위의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때 익비 한씨는 이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자제위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임신까지 해버렸죠.

하지만 정비안씨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스로 목을 매 죽어버리려고 하자 그제서야 공민왕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물러섰다고 합니다.

또한 혜비 이씨와 신비 염씨 또한 공민왕의 명령을 끝까지 거부했다고 하죠.

 

이런 치욕을 견디며 살아오다 시간이 흘러 1374년이 되었습니다.

남편이었던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다음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죠.

정비 안씨에게 우왕은 아들뻘이었지만 그녀 앞에서 우왕은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 : 정비안씨)와 같은 사람이 없는가" 라고 하면서 대놓고 희롱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허구헌날 정비안씨의 처소에 들렀는데 그녀의 처소에서 있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기도 하다보니 추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 정도였죠.

정비안씨 또한 자신에게 막 들이대는 우왕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남동생 안숙로의 딸을 우왕에게 보여줬고 우왕이 기뻐하며 아내로 맞아들여 현비로 삼았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를 보고 사람들은 "정비안씨가 남들의 비웃음이 두려워 스스로 감추기 위해 조카를 소개해 준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1388년이 되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우왕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버리자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이던 정비안씨는 조민수와 이색, 그리고 이성계의 강요로 우왕을 폐위하는 교서와 창왕을 즉위시키는 교서를 선포했죠.

 

하지만 1년 후인 1389년에 이성계가 다시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다음 왕으로 세울 것을 정비안씨에게 강요했고 아무 힘도 없었던 그녀는 또다시 왕실 어른이라는 자격으로 창왕을 폐위하는 교서와 공양왕을 즉위시키는 교서를 선포했습니다.

그녀는 왕실 어른이라는 이유로 이성계에게 지독하리만치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이죠.

 

또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배극렴 등의 이성계 일파가 정비안씨를 찾아와 공양왕의 폐위와 새로운 왕조의 건국을 윤허하는 교서를 쓰라고 협박했고 그녀는 별다른 수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즉위 교서를 또 선포했고 어보를 이성계에게 넘겨주면서

마침내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죠.

 

그녀는 어느새 우왕, 창왕, 공양왕, 이 세명을 폐위시킨 사람이자 고려를 멸망 시킨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조선이 건국되고 정비안씨는 의화궁주로 강등되었죠.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잘 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녀를 잘 대우해 줬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실록에 따르면 정비안씨의 어머니가 태조 이성계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와 정비 안씨의 집에 직접 찾아가 연회를 즐기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태종은 이명덕이라는 신하에게 "의화궁주가 늙고 병이 있어서 약주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부터 묵은 술을 쓰지 말고 새술을 갖다주도록 해라" 라고 명령했다고 하죠.

그렇게 날마다 술 1병씩을 정비안씨에게 가져다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세종은 박포의 집을 정비안씨가 쓰도록 내려줬다는 기록도 있을 만큼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고려왕족이었던 그녀가 보살핌을 받은걸 보면 조금 의아하기도 하죠.

그렇게 대접은 받았지만 자신의 손으로 고려 왕들을 폐위시키고 고려를 멸망 시켰다는 죄책감이 컸던 탓일까요.

그녀는 슬픔과 죄책감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그 이후 여생을 술에 취해 거의 폐인처럼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조선이 건국되고 36년 후인 1428년 6월, 한많던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정비안씨는 태조 이성계가 죽은지 20년 그리고 태종이 죽은지 6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도 세상을 떠났을 만큼 오래 살았습니다.

비극적인 삶을 오랫동안 사는 것 또한 고통이었을 텐데요.

 

예조에서는 의화궁주의 장사를 왕비의 예로 하자고 세종에게 건의했고 세종도 이에 따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녀는 세종의 배려로 고려 왕비로써 장사를 지낸 것이었죠.

그 이후 그녀가 어디에 묻혔는지 기록은 없습니다.

그녀의 삶을 돌아보면 지독하기 그지없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왕비가 되자마자 얼마 안 돼 쫓겨나기도 했고 다시 궁에 돌아왔지만 남편 때문에 강간을 당할뻔했으며 아들 뻘이던 우왕에게 희롱당하고 왕을 세 번이나 갈아치우는 교서를 내렸으며 결국 자신의 손으로 고려를 멸망에 이르게 했으니 이보다 더 최악의 삶은 없을 것 같습니다.

또 더한 고통은 이런 거지 같은 삶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이죠.

 

공민왕의 비가 되어 평생 동안 비참하고 힘든 삶을 살았던 정비안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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