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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왕권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했던 킬방원 태종의 따뜻한 반전 매력

by 사탐과탐 2022.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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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을 죽이고 외척까지 모두 없애버릴 정도로 왕권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자비가 없던 태종이 가지고 있던 따스한 반전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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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태종 이방원하면 피도 눈물도 없이 숙청을 하던 모습만 기억하지만 태종은 외척이나 공신들을 냉정하게 때려잡던 모습과는 다르게 일반 백성들에게는 무척이나 관대한 모습을 많이 보였던 왕입니다.

왕권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철퇴를 날렸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백성들에게 자비롭기로 유명한 명나라의 황제 홍무제보다도 훨씬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죠.

 

오늘은 태종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태종 13년 2월에 어린아이 4명이 혜정교 길거리에서 공놀이를 하면서

공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서 하나는 임금님, 하나는 효령대군, 하나는 충녕대군 이런 식으로 불렀는데요.

 

공을 차다가 공 하나가 다리 밑으로 굴러들어가자 한 아이가 “효령대군이 물에 빠졌다."라고 말했죠.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효령대군의 유모가 그 말을 듣고는 효령대군의 장인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고 장인은 형조에 고발하여 이 아이들을 옥에 가두고 처벌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어린아이들이 뭘 알고 그랬겠느냐? 요사한 말을 처벌하는 법도는 이런 곳에 적용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라고 직접 사태를 무마했는데요.

그리고 다시는 이 일을 논하지 말라고 어명을 내려 뒷말이 나올 여지조차 싹 차단해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403년 5월 5일에 경상도 조운선(물길을 통해 세금을 한양으로 운반하던 배)이 무려 34척이나 침몰해 많은 사람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실록을 보면 사망자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지만 당시 보고를 올린 신하들이 사망자가 천여 명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으로 봐서는 엄청난 대형 참사였던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실종자들을 찾기 위해 병사들이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근처에 숨어있던 생존자 한 명이 병사들을 보고 도망가다가 붙잡히게 됩니다.

 

왜 도망을 갔는지 이유를 물어보자 "조운선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깎고 다른 곳으로 도망쳐 이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라고 대답했죠.

태종은 그 말을 듣고 탄식하며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 아닌가? 바람이 이처럼 센 날은 배를 띄우지 말라고 했어야 하는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도 배를 출발시켰으니 내가 백성들을 죽게 만든 것이다."라고 자책했습니다.

 

그리고는 죽은 사람은 얼마이며, 잃은 쌀은 얼마나 되는지 신하들에게 물었고 신하들이 죽은 사람은 천여 명이고 쌀은 만석 정도를 잃었다고 대답했는데요.

태종은 "쌀이야 아까울 것이 없지만 죽은 백성들이 너무나 불쌍하구나 그 부모와 처자식들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조운하는 사람들의 고통이 이토록 심하니 도망치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죠.

 

그러자 이응이라는 신하가 "그렇다고 조세를 육로로 보내면 옮기기가 더 어렵습니다"라고 발언하자 태종은 "육로로 운반하면 소나 말이 힘들 뿐이지, 적어도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했다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 후로도 효율성의 문제 때문에 결국 수로로 운반할 수밖에 없었지만 태종의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을 잘 볼 수 있는 일화였습니다.

하루는 '조서'라는 관리가 친구를 궐에 데려와 숙직실에서 같이 잔 일이 있는데 다음날 아침에 조서의 친구가 궁을 나가려다 길을 잃고 헤매던 중에 왕의 침전까지 들어가 버리는 실수를 하게 되는데요.

 

잘못하면 국왕의 암살을 시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감옥에 갇히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중죄였기 때문에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진 관리라 해도 국왕의 침전으로 무턱대고 들어가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정 관료도 아닌 일반인이 임금이 거하는 궁을 멋대로 돌아다닌 것도 모자라 왕이 잠을 자는 침전까지 아무 제지 없이 침입한 대사건이 터진 것인데요.

 

만약 이 사람이 자객이었다면 태종이 시해됐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를 발견한 궁인들은 깜짝 놀랐고, 조서의 친구도 크게 당황하여 '저는 그저 궁을 나가려고 했을 뿐입니다'라며 멋모르고 한 실수임을 고백했죠.

원래 법대로 이 일을 처리한다면 조서 본인은 물론이고 당일 내시부 및 내금위 근무자들까지 모조리 목숨을 잃을 만큼 큰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이 들어왔다 해서 어찌 탓할 수 있겠느냐 다른 사람들이 알면 법대로 처벌하자고 할 테니 누구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고 빨리 궁을 나가라"라고 하며 신속히 조서의 친구를 내보냈다고 하네요.

 

태종 9년에는 시골에서 상경한 '손귀생'이라는 사람이 창덕궁에 오게 됐는데 난생처음 보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에 감탄해서 멋도 모르고 들어와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 광연루라는 곳에서 병사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당시 죄인을 처벌하던 의용순금사에서는 손귀생이게 곤장 80대를 선고했는데 곤장 최고형인 100대가 보통 사람에게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80대를 맞는다는 것은 후유증으로 죽거나 불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중형이었죠.

 

하지만 그 사실을 들은 태종은 "예전에 조서의 친구가 실수로 궁에 들어왔을 때도 그냥 보내주지 않았느냐?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이 모르고 한 일을 가지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하며 그냥 손귀생을 풀어주라 명하였습니다.

이렇게 잘못을 저지른 백성들이나 신하들을 관대하게 용서해 준 태종이었지만 때로는 신하들에게 심술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태종 이방원은 성리학이 흥하던 고려 말의 과거 급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성리학에 대해서는 자신이 거느린 신하들만큼 잘 알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신하들의 말꼬리를 잡아 물고 늘어지는 치사한 수법을 쓰거나 고려 말 시절 관직 생활을 하면서 얻은 경험을 통해 신하들을 갖고 놀았던 일화가 많다고 합니다.

 

하루는 태종이 별궁을 지으려 하는 것을 신하들이 반대하자 "아니 그러면 지금 집도 절도 없는데 나더러 길바닥에서 이슬을 맞으면서 잠을 청하란 것이냐?"라고 버럭 화를 냈다고 하죠.

신하들이 두려움에 떨며 우리 전하께서 성군이 되긴 글렀다고 통곡을 하자 "그냥 화 한번 내 본거다"라며 은근슬쩍 넘어갔다고 하네요.

그러면서도 자신이 짓고 싶었던 별궁은 기어이 완성시켰다고 합니다.

 

태종 6년에는 창덕궁에 새로운 정자를 지어 놓고 그 정자의 이름에 대해 신하들과 논의하던 중에 권근이라는 신하가 '청녕'이란 이름이 어떻겠냐고 얘기했죠.

그러자 태종은 "난 청녕보다는 '해온'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든다"라며 다른 사람들에게 해온은 어떠냐고 물었고 신하들은 최고의 이름인거 같다며 태종의 안목을 칭송했는데요.

 

그러자 태종은 "임금이 뭔 말만 하면 신하들은 아부하기만 바쁘구나 어디서 윗사람 비위 맞춰주는 법만 배웠느냐 권근이랑 다시 의논해서 결정하라"라고 받아쳤습니다.

신하들 입장에서 보면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될지 환장할 노릇이었죠.

결국 정자의 이름은 처음에 권근이 얘기했던 청녕으로 결정이 되었다고 하네요.

 

태종 14년에는 과거시험에서 시험감독관을 맡았던 하륜 등이 태종에게 3개의 시험 답안을 가져와서 하나를 장원으로 뽑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시험관들이 답안지를 읽어보니 셋 모두 수준이 비슷하지만 하나는 아주 약간 모자라고 나머지 둘은 수준이 비슷해서 뽑기가 어렵게 되자 태종에게 결정을 부탁한 것인데요.

 

그런데 태종은 답안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내가 잡는게 장원급제다!"라고 말하며 대뜸 한 장을 집어버렸다고 합니다.

이 행운의 당첨자가 바로 세종 시대의 유명한 학자인 정인지라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상왕이 된 후에도 태종은 계속해서 신하들에게 심술을 부렸습니다.

신하들에게 자신이 거처할 궁궐의 이름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내렸고 신하들은 목숨 수에 편안할 강을 써서 수강궁이라는 좋은 이름을 생각해냈죠.

하지만 태종은 수강궁이라면 옛날 남송의 광종이 정신병에 걸려 폐위당한 후 감금된 궁의 이름인데 그런 이름을 왜 내 궁에 붙이는 거냐며 신하들에게 면박을 주었는데요.

 

당황한 신하들은 궁 이름을 다시 지어 올리겠다며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태종은 때로는 관대하고 때로는 심술궂은 모습을 보였던 매력 있는 캐릭터였죠.

지금까지 냉혹한 숙청자로만 알려졌던 태종 이방원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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