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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연남생. 나라 팔아먹어 700년 역사의 고구려를 망하게 했던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

by 사탐과탐 2022.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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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장남이었던 연남생은 동생들과의 불화로 인해 고구려의 주적이었던 당나라에 투항해버렸죠.
결국 연남생의 매국 행위로 인해 고구려는 멸망하게 되는데요.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 연남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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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한국인들에게 최악의 매국노가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 이완용을 떠올리기 마련이죠.

하지만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어떤 면에서는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라 불릴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수백 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북방민족들의 침입을 막아내며 한반도의 방파제 역할을 했던 고구려가 멸망하는데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인물인데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고구려 최고 권력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외세를 끌어들이며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었던 인물인 연남생입니다.

 

고구려를 공격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황제는 수문제와 수양제, 당태종과 당고종 이렇게 4명이었는데요.

이중 수문제는 1차 고수 전쟁에서 패배하자 큰 충격을 받고 고구려에 대한 원정 계획을 아예 중단시켰죠.

살수대첩에서 뜨거운 맛을 본 수양제는 수나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더 이상의 전쟁을 포기하고 강남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와의 오랜 전쟁으로 국정이 파탄 난 수나라는 5년 뒤인 619년 멸망하게 되죠.

당대 최강이라 불리던 당나라 또한 1차 대규모 원정에서 대패를 하고 돌아갔으며 당태종은 죽기 전 유언으로 '고구려를 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2차 고구려 원정 전에는 먼저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기세를 몰아 평양성으로 대규모 상륙을 계획합니다.

고구려의 동맹세력이나 우호세력을 모두 박살 낸 당나라였기에 고구려와의 1대1싸움만을 남겨두고 자신감에 가득 차서 공격을 시작했죠.

하지만 고구려는 앞서 멸망한 백제와는 달랐는데요.

 

일단 고구려는 백제보다 훨씬 강한 국가였고 백제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다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에 대한 대비 또한 철저했습니다.

그렇게 당나라의 2차 원정 또한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나게 되죠.

 

결국 당나라 고종은 패배 후 고구려와 수교를 맺으면서 침공 계획을 포기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얼마 후 당나라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오게 됩니다.

바로 고구려의 최고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고당 전쟁이 끝난 2년 후 사망해버린 것인데요.

연개소문에게는 연남생과 연남건, 연남산 이렇게 세명의 아들이 있었죠.

 

그중 장남인 연남생이 32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막리지가 됐고 군사와 나라의 업무를 총괄하는 등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태막리지가 된 연남생은 대권을 장악한 후 요동으로 순찰을 떠나게 되는데요.

만약을 대비해 두 아우인 연남건과 연남산을 수도에 남겨두어 뒷일을 맡겼죠.

 

그런데 이때 연남건과 연남산의 측근들이 두 사람에게 연남생은 필시 두 분을 죽이려 할 것이니 당하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요.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연남건과 연남산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한편 연남생 역시 두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켜 연남생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게 되는데요.

연남생 역시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계속되는 이간질에 결국 동생들에게 의심을 품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래서 연남생은 우선 자신과 친한 사람을 밀정으로 보내서 동생들을 염탐하도록 시켰는데 그 감시자의 존재가 연남건과 연남산에게 발각되고 말았는데요.

이를 계기로 형을 의심하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왕명을 칭하여 연남생을 평양으로 불렀으나 연남생은 동생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양성으로 돌아오지 않았죠.

 

결국 666년 연남건과 연남산은 정변을 일으켜 수도 평양성을 장악했고 급기야는 연남생의 아들인 연헌충마저 살해해버립니다.

정변 직후에 스스로 태막리지가 된 연남건은 군사를 보내서 지방에 있던 연남생의 세력을 토벌하려 했는데요.

이에 연남생은 수도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국내성으로 피신하게 되죠.

 

두 동생들 때문에 벼랑 끝에 몰린 데다 아들까지 잃은 연남생은 이성을 잃어버렸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당 고종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들과 치고받고 싸우던 상대였는데 말이죠.

당나라도 처음에는 이게 무슨 개수작인가 의심하며 믿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연남생의 또 다른 아들 연헌성까지 직접 당나라에 찾아와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게 되는데요.

 

그제야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을 짐작하고 재빨리 군대를 조직해서 대규모 원정을 다시 시도하게 됩니다.

당시 당나라는 1, 2차 고당 전쟁의 연이은 패배 이후 숨 고르기를 하는 중이었는데요.

연남생의 요청을 받은 당고종은 사신으로 파견된 연헌성에게 벼슬과 재물을 하사하여 국내성으로 돌려보냈으며 계필하력이라는 장군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가 연남생을 맞아들이도록 했습니다.

 

666년 6월에 연남생은 국내성을 비롯한 6개 성의 주민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게 되죠.

이때 연남생이 데리고 간 백성이 10만 호라고 하는데요.

당시 고구려의 전체 인구수가 69만 호였다고 하니 연남생이 고구려 인구 중 무려 7분의 1을 당나라에 바친 셈입니다.

그해 9월 연남생은 그 공으로 당고종으로부터 요동 도독에 봉해졌는데요.

 

한때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였던 연남생은 이때부터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을 위한 앞잡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662년 사수 전투에서 고구려 군에 대패한 뒤 고구려 정벌 계획을 포기했던 당나라에게 연남생의 존재는 천군만마와도 같았다고 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고구려 정벌을 떠나기 전 당 고종이 신하들에게 이번 전투에서는 당나라가 승리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가언충이라는 신하가 “예전에는 고구려에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남생 덕분에 고구려의 내부 사정을 다 알게 되었으니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을 했다고 하죠.

 

이런 천금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나라는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공을 해왔죠.

압도적인 전력 차이가 났음에도 고구려는 2년에 걸쳐 끝까지 대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668년 말 수도 평양성의 성문이 당나라와 내통한 승려 신성에 의해 활짝 열리게 됩니다.

물밀듯이 밀려온 나당 연합군은 평양성을 불바다로 만들었으며 마지막까지 고구려 군을 이끌던 연남건은 자결을 하려 했지만 실패했죠.

 

결국 보장왕과 함께 연남건이 당나라 군에 사로잡히면서 평양성은 완전히 함락당했고 그렇게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고구려가 멸망하게 됩니다.

중원의 패자인 수나라와 당나라의 연이은 대규모 공격에도 우주방어를 보여주며 잘 막아내던 고구려가 형제들의 권력 다툼 때문에 모래성 무너지듯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것인데요.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연남생은 당나라 군의 길을 터준 공을 인정받아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우위대장군 벼슬을 받게 되죠.

연남생이 항복하기 전까지만 해도 당나라는 수나라 시절부터 6차례나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면서 인력과 물자 소모가 심했기 때문에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연남생의 투항하기 전까지는 고구려 정복의 포기를 진지하게 고려할 정도였다고 하죠.

 

신라 역시 백제 부흥운동이 완전히 정리된 시점에서 슬슬 당나라의 이용 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게다가 당나라는 신라 정벌에 대한 욕심까지 대놓고 드러냈기 때문에 양국 간에 감정이 그리 좋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물론 신라 입장에서는 고구려도 수 세기 동안 대립한 나라였지만 그때는 이미 자신들의 주적이었던 백제가 사라진 시점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때문에 백제 입장에서 고구려는 오히려 당나라를 위에서 막아주는 '울타리'로서의 가치가 더 컸기 때문에 고구려 멸망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대신 정세를 보며 저울질하는 상황이었는데요.

뜬금없이 연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면서 이 모든 상황을 뒤집어버렸고 고구려의 멸망이 갑작스럽게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7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구려는 중국과의 기나긴 70년 대전쟁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연씨 형제들의 집안싸움으로 어이없이 망하게 돼버린 것이죠.

어쩌면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매국노라 불릴만한 남자 연남생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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