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역사 탐구

이순몽. 재주는 있었던 덕에 세종과 태종의 비호 아래 온갖 만행을 저질러도 강한 처벌을 받지 않았던 문제아

by 사탐과탐 2022. 1. 23.
반응형
이순몽은 재주는 있었던 덕에 세종과 태종의 비호 아래 온갖 만행을 저질러도 강한 처벌을 받지 않았던 문제아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역사 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격까지 뛰어나지는 않다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요.

조선의 세종 시절에도 야전부대의 지휘관으로서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쉴 새 없이 말썽을 일으키는 사고뭉치 장군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죠.

평생 동안 별의별 꼴통 짓을 다 하고 다녔지만 공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세종에게 용서받았던 남자 이순몽입니다.

 

이순몽은 1386년 경상도 영주군에서 이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응은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공로로 좌명공신에 선정되며 영양군에 봉해지고 후에 병조판서까지 올랐던 인물인데요.

덕분에 이순몽은 이런 아버지의 덕을 두고두고 보게 되죠.

 

이순몽은 1405년 좌명공신인 아버지 이응 덕분에 음서로 벼슬에 올라 대호군이라는 무관직을 맡게 되는데요.

10년 정도는 별 탈 없이 관직생활을 하나 싶더니 태종 16년인 1416년부터 본격적으로 똘끼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해 6월 그는 대궐 안에서 술에 취해 자신의 상관인 최윤덕과 조서로에게 쌍욕을 퍼부었다가 의금부의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요.

하지만 공신의 아들인데다 태종이 개인적으로 남다르게 그를 총애한 덕분에 얼마 안 되어 석방되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직후인 1418년 9월 13일 이순몽은 또다시 이상한 짓을 벌입니다.

세종이 태종과 함께 모화루에서 명나라 사신을 전별할 때 이순몽은 임금을 호위하는 별운검으로서 세종을 따라 모화루 위에 올라갔는데 문제는 그가 칼을 찬 채로 그 옆에 서 있었다는 것인데요.

 

이에 세종이 "니가 어찌 감히 부왕(태종)이 계신 곳에서 칼을 차고 옆에 있을 수 있느냐."라고 화를 내는 바람에 또다시 의금부에 갇히게 되죠.

하지만 이순몽이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자 신하들이 그를 고문할 것을 청했지만 세종은 그가 공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저 영천군에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태종은 이순몽을 도로 서울로 불러들이게 했는데요.

1년 뒤에는 우군 절제사에 임명되어 이종무의 지휘를 받고 대마도 정벌에 참여해 공을 세우게 되죠.

그런데 이때 이종무를 비롯한 장수들이 죄를 짓고 유배지에 가있던 김훈과 노이라는 인물을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대마도 정벌 때 데리고 간 일이 밝혀져 처벌을 받게 되는데요.

 

이순몽 또한 김훈을 데려가도록 추천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이순몽은 얼마 후 석방되었고 대간들이 그를 처벌할 것을 청했지만 세종과 태종은 끝내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하죠.

이순몽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야전 무장으로서는 유능했지만 평상시에는 시도 때도 없이 사고를 쳐서 간관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물론 세조 시대의 홍윤성처럼 극악무도한 강력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고 왕이 마음먹기에 따라 그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정도였다고 하죠.

이순몽이 주로 저질렀던 죄들을 보면 평소에 거리낌 없이 막말을 하고 술과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하다 보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종 2년에는 상왕인 태종이 점심을 먹고 있던 자리에서 동료와 잡담을 하다 뜬금없이 "나는 목이라도 매서 죽고 싶다"라는 헛소리를 하게 되는데요.

이에 태종이 밥 먹는데 불길한 소리 하지 말라며 그를 꾸짖고 물러나게 하죠.

그런데 사헌부에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머지않아 이순몽을 탄핵하기 시작했고 태종은 그에게 절제사로 부임하면 탄핵을 피할 수 있다는 꼼수를 알려줬죠.

그렇게 이순몽은 태종 덕분에 또다시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세종 5년에는 태종의 사망으로 인한 국상 기간이 있었는데 이순몽은 이때도 강에서 배를 띄우고 술을 마시며 놀다가 사람을 물에 빠져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사헌부에서는 또다시 이순몽을 탄핵했지만 세종은 듣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이번에는 사헌부에서도 집요하게 그의 처벌을 요구했기에 마지못해 이순몽을 파직시켰지만 얼마 안 가서 복직시켰다고 하죠.

 

그것도 모자라 경상우도 처치사에 좌군 총제라는 직책을 맡기고 말과 옷까지 하사하면서 그를 총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순몽은 세종 7년에 또다시 금주령을 어기고 48명과 술판을 벌이다가 걸려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되는데요.

하지만 세종은 이번에도 이순몽이 공신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세종 10년 이순몽은 또다시 사고를 칩니다.

당시 그는 임금이 타는 수레인 거가를 호송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친구의 기생첩인 월화봉과 데이트를 하느라 땡땡이를 치게 되는데요.

그래놓고 뻔뻔하게 아내의 친가에 다녀왔더니 날이 저물어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죠.

 

하지만 그의 거짓은 곧 밝혀졌고 사헌부에서도 이순몽은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거 같으니 장형 70대에 처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이번에도 그를 파직시키는데 그쳤습니다.

그렇게 말썽을 부리는 와중에도 전장에 내보내면 장수로서 제 몫을 해내기는 했는데요.

 

세종 15년에 조선은 국경을 자주 침입해 백성을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여진을 정벌하기로 결심했죠.

이에 세종은 최윤덕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정벌군을 보냈는데 이순몽 또한 여진 정벌군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순몽은 4월 19일 파저강에 도착해 여진족 추장 이만주의 무리를 격파해버렸는데요.

이 과정에서 26명의 목을 베고 46명을 활로 쏴 죽였으며 여진인 56명을 생포했다고 하죠.

세종은 큰 공을 세우고 귀환한 이순몽을 판중추원사에 임명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세종이 이순몽에게 관대한 모습을 자주 보였던 이유는 그가 공신의 아들인데다 장수로서의 능력도 뛰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다음 해인 세종 16년 이순몽은 손이 근질근질해졌는지 또다시 꼴통 짓을 하게 되는데요.

당시 금주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연회를 벌이며 술을 마셨다가 탄핵되었는데 이번에도 금방 복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이순몽이 경상도에 있는 어머니 무덤에 성묘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엄청난 엽기 행각을 저질렀는데요.

 

기생 한 명을 데리고 문경현이라는 곳의 냇가에서 목욕을 한 후에 나무그늘 밑에서 음란한 짓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나 기생하고 쨱스한다!!!!"라고 사자후를 질러버린 것이죠.

그 사실이 발각되어 또 파직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종 20년에는 술에 잔뜩 취한 채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이 앉는 호상에 앉아버렸다고 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한 관원이 그의 행동을 꾸짖자 이순몽은 오히려 그 관리에게 욕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사헌부에서는 그 일로 또다시 이순몽을 탄핵했지만 세종은 이번에도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고 하죠.

세종 22년에는 자신의 노비와 관련해 소송을 걸었는데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자 담당관에게 쌍욕을 퍼부었다고 하는데요.

 

사헌부가 이순몽을 탄핵 요청했으나 세종은 그를 불러다 훈계하는 것에 그쳤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그는 허락도 없이 임금의 사냥터인 강무장에서 사냥을 하고 자신에게 무례하게 군다는 이유로 다른 관료를 구타하거나 뇌물을 받은 혐의로 탄핵당했지만 그때마다 세종은 그에게 어떤 처벌도 하지 않았는데요.

 

세종 28년에는 자신의 아내가 죽자 미모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과부를 찾아갔죠.

그리고 그 과부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곡식을 빌린 것을 빌미 삼아 자신에게 시집을 오라며 협박을 합니다.

게다가 이순몽은 그녀에게 만약 당신이 내 청을 거절한다면 당신의 어머니에게 장가를 가버릴 것이라는 협박도 했죠.

 

이에 과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요.

과부가 떠난 후 그녀의 두 아들이 어머니를 찾으며 우는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세종 31년 이순몽은 6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는데요.

그의 아들인 이석장도 아버지를 닮았는지 이순몽의 애첩과 간통을 했다고 하죠.

애첩이 이석장의 아이를 낳으면서 그 사실이 발각되어 이석장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요.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또다시 화장실에서 아버지의 애첩과 간통하다 또 그녀를 임신시켜버리는 바람에 장형을 맞고 죽게 되었다고 하죠.

 

지금까지 능력은 있었지만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던 문제아 이순몽의 이야기였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