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해전은 해전의 무패신화를 이끌던 이순신을 몰아내고 원균이 수군통제사가 되면서 발생한 역사상 최악의 졸전입니다.
그 칠천량해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졸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당시 사관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는듯한 고통의 임진왜란 이후 최초이자 최대의 해상전 참패' 라고 기록하고 있죠.
이 해전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조선 수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다시 예전으로 회복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왜군이 서해안을 통한 해상보급로를 확보하는 사태까지 벌어질 뻔했는데요.
이 최악의 해전은 바로, 정유재란 당시 벌어진 '칠천량 해전' 이죠.
조선 수군의 첫 패배인 이 칠천량 해전의 지휘관은 원균이었는데요.
이때 원균이 아닌 그냥 평범한 장수가 지휘를 하기만 했어도 이런 처참한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죠.
도대체 당시 칠천량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왜군은 1597년 다시 조선에 침공합니다.
그런데 평소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하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중첩자였던 요시라를 경상 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 가토가 바다를 건너 침공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흘렸죠.
이에 김응서는 곧바로 권율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권율은 조정에 급한 파발을 보내는 동시에 빨리 바다를 건너오는 가토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기 위해 직접 이순신에게로 급하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권율이 한산도에 도착했을 때 하필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의 일로 여수에 가있었죠.
그렇게 이토록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건가 싶었지만 이미 수많은 첩자와 정찰병을 보내놓은 이순신은 벌써 가토가 부산 가덕도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가토가 이미 도착한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바다에서 계속 압박을 주면 다른 부대는 쉽게 오지 못할 것이니 이순신에게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죠.
이에 이순신은 부산포에 함대를 이끌고 가 그 일대를 서성거리며 왜군이 섣불리 다른 행동을 못하도록 들쑤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월 21일, 조선 조정에 원균이 보낸 하나의 장계가 도착하는데요.
내용은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삼도수군통제사였으면 가토를 잡을 수 있었다" 라는 내용이었죠.
그 장계를 본 선조는 갑자기 "그래, 그때가 가토를 잡을 절호의 기회였는데 이순신이 못 잡았다"라고 하면서 분노하며 급발진을 하는데요.
선조는 당시 이순신에게 계속 출진을 명했는데 선조의 명령 때문에 불리하고 위태로운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던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에 이순신에 대한 심기가 매우 불편했던 선조는 이 가토 사건을 빌미로 이순신을 처벌해야겠다 마음먹은 것이죠.
선조의 이런 행동에 눈치를 깐 사헌부에서는 이순신을 탄핵하기에 이르렀고, 선조는 이틀 후에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수일이 지나고 한양에서 선조의 명이 당도하자 이순신은 파직되면서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다음 삼도 수군통제사로 원균이 임명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압송되기 전 함선 134척과 수군 17,000여 명 그리고 군량, 화약, 총통 등을 원균에게 넘기고 서울로 압송되었죠.
이 모든 병력과 자원들은 조선 조정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이순신 혼자 만들어낸 것들이었습니다.
어쨌든 평소 증오하던 이순신의 자리를 빼앗은 원균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1597년 3월, 거제도 기문포에 왜선 3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수군을 출진 시켰습니다.
당시는 휴전 기간이었기 때문에 왜선이 돌아갈 때 뒤치기를 감행했는데 일본군의 반격이 너무나 거세 그만 판옥선을 탈취당하기까지 했죠.
그리고 이때 왜군 47명의 목을 베기도 했지만 조선 수군의 피해는 고성 현령 조응도와 병력 14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대단한 함선들을 이끌고 호기롭게 출진했지만, 오히려 손해를 본 것이죠.
또한 원균은 이순신을 끌어내리기 위해 부산포 공략이 가능하다고 큰소리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병력을 이끌고 부산포를 향해 갔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해 상황을 보니 이순신의 말대로 부산포를 함락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부산포 공략은 커녕, 작전회의실인 운주당에서까지 기생을 불러다가 술만 마시기 시작했는데요.
난중일기에 따르면 그는 기생을 끼고 노는 것 밖에 하지를 않았고 이 때문인지 부하들과도 사이가 나빠져 부하들이 원균의 명령을 듣지 않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죠.
아무튼 시간이 지나도 원균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선조는 원균에게 언제 부산포를 공격할 것이냐며 압박했고 원균은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이끌고 부산포로 출정을 하게 됩니다.
가는 도중 왜군을 만나 전투를 벌였지만 조선의 지휘관이 전사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은 뒤 부산포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귀환하게 되었죠.
원균은 출전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또다시 등 떠밀려 1597년 7월에 출전을 하게 되는데요.
왜군과의 첫 교전에서 왜군의 배 8척을 불태워 버리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무리하게 왜군의 수송선을 추적하다가 판옥선 12척이 해류에 떠내려가 버려 쓸데없는 전력의 손실을 입기도 했으며 서생포 앞바다에서는 왜군이 공격하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다 판옥선 20여 척이 파괴되기도 했죠.
그 이후에도 왜군의 세키부네 10척을 부순 것에 반해 판옥선 32척을 잃는 등 원균의 수군 지휘능력이 최악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불러다가 곤장을 때려버리는데요.
이처럼 참담한 일을 겪은 원균은 부대로 복귀한 뒤 성질을 내며 홧김에 전 함대를 이끌고 출전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러 버립니다.
그렇게 부산 가덕도에 도착한 원균과 그의 부대는 물을 구하기 위해 병사 400명을 육지로 보냈는데 왜군에 의해 기습을 당하게 되고 400명의 병사는 죽든지 말든지 그냥 내팽개치고 냅다 도망을 쳐버렸죠.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간 원균은 거제도의 영등포로 이동했지만 또다시 왜군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다시 바다로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날씨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는데요.
갑자기 엄청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이에 원균은 함대를 이끌고 폭풍우를 헤치며 칠천량으로 향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칠천량에 도착한 원균과 병사들은 경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기진맥진한 상태로 칠천량에서 밤을 맞게 된 것이죠.
그리고 지휘관이던 원균은 전투의 의지조차 잃어버렸고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왜군의 정찰병은 조선 수군이 경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완전 맛이 가있는 걸 확인했고 이순신에게 항상 패하기만 했던 도도 다카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모든 배를 긁어모아 칠천량으로 향했죠.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일본 육군도 칠천량으로 향했습니다.
지옥 같은 밤이 펼쳐지기 직전이었죠.
7월 15일 밤 10시쯤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조선 수군의 군량선에서 불이 났죠.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 조선 수군은 다시 곯아떨어졌는데 다음날 새벽이 되자 왜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습공격을 감행한 왜군의 적선은 고작 두척 밖에 되질 않았는데요.
당시 조선 수군은 병력 면에서도 기습해온 적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원균을 비롯한 지휘관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당황한 나머지 허겁지겁 달아나기 바빴고 지휘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은 가속화되었습니다.
이때 조선 수군의 절반 가량이 적군의 수는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도망을 쳐버렸고 나머지 절반은 원균의 후퇴 명령을 듣고 도망을 치고 있었죠.
이에 부하 지휘관인 김완은 기습해온 적선이 두척 밖에 안된다고 하면서 원균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적과 맞서 싸웠지만 얼마 안 가 도도 다카도라가 이끄는 배 50척이 도착하게 되면서 김완은 결국 포로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도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기도 했죠.
왜군의 수가 더 불어나자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력이 있었는데도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상태였기에 원균은 전군 퇴각 명령을 내렸고 전 조선 수군이 뿔뿔이 흩어져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8시가 되어가자 원균이 이끌고 퇴각하고 있던 주력함대는 진해만으로 도망을 치다 갑자기 방향을 바꿔 한산도 쪽이 아닌 고성현 춘원포로 향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원균이 지상에 내려 도망을 치자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조선 수군은 춘원포에서 배를 버리고 모두 도망쳐 버렸으며 제대로 된 퇴로를 확보하지 못한 원균의 주력부대는 바다와 육지 양쪽으로 협공을 받게 되었죠.
배설이 이끌고 도망친 배 12척을 제외하고는 이순신이 공들여 쌓아놓은 배 100여 척과 조선 수군이 모조리 죽고 파괴되거나 사라져 버렸으며 이때 원균의 무능력을 진작에 알아챈 지휘관들은 원균의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에 살아남았지만 그를 따라갔던 지휘관들은 대부분 왜군에 의해 도륙 당했고 원균은 생사도 확인하지 못한 채 그대로 행방불명 되어 버렸죠.
만약 이때 한산도 쪽으로 퇴각한 뒤 견내량을 틀어막고 버티기만 했어도 이 정도까지의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고작 왜의 수군 50여 척의 기습으로 최정예 조선 수군은 와해되어 버렸고 아무런 제제 없이 1천여 척에 달하는 왜의 수군 본대가 칠천량에 도착했죠.
그리고 춘원포에 고립된 조선 수군을 전멸시켜버렸습니다.
이 칠천량에서의 대패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큰 충격을 받았는데요.
이 엄청난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을 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선조가 드디어 입을 열었죠.
그 내용은 바로 "이일은 어떻게 사람의 지혜만의 탓이겠는가 하늘의 뜻을 어찌할 것인가"라는 말이었습니다.
바로 칠천량의 패전은 원균 때문이 아니라 운이 없었다는 것인데 패전의 원인이 원균 탓이라고 한다면 한 번도 지지 않고 잘 싸우고 있던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힌 선조의 책임 또한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패전의 이유는 단지 운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회피해버렸던 것입니다.
아무튼 더 큰 문제는 남해가 왜군에 완전히 넘어가버렸다는 사실이고 이는 더 이상 전라도 역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왜군의 보급도 바다를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들은 임진왜란 때부터 약 6년간 이순신과 함께 왜군들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살아남았던 최정예 병사들이었고 지휘관들 역시 이순신의 지휘 아래 맹활약을 펼쳤던 인물들이었는데 이번에 많은 수가 전사해 버린 것이었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하들의 이순신을 복직시키라는 요구가 거세졌고 선조는 마지못해 복직을 허락해 주었죠.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는 점은 이순신을 복직시켜주면서 선조가 내린 품계가 원래보다 훨씬 강등된 절충장군이었는데요.
이러면 원래 이순신의 부하들과 품계가 같아져 지휘를 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다행히도 부하였던 사람들이 품계를 떠나서 이순신의 명령을 잘 따랐기 때문에 별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군은 곧바로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 서해로 가는 길을 뚫었어야 하는데 의도치 않게 대승을 거둬 버린 탓에 어리둥절해 하며 7월 말까지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등 시간만 끌고 있었죠.
왜군이 처음부터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이기고 서해로 진출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전투를 승리하고 난 뒤 해야 할 일들의 모든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을텐데 칠천량 해전의 승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군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이순신은 상황을 수습할 어느 정도의 시간을 벌수 있었죠.
하지만 정작 다시 돌아온 이순신에게는 배설이 끌고 도망쳤던 열두 척의 배만 있었는데 천만다행인건 돌아오는 길에 흩어졌던 부하들과 병사들이 속속 합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건 원균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친 지휘관들이 많이 살아있었던 덕분에 바로 병사들의 지휘를 시킬 수 있었고 병력 손실도 패배한 규모에 비해서는 많지 않았던 것이죠.
이렇게 수습한 배 12척과 병력으로 이순신은 울돌목에서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하는 명량 대첩을 이루어 냅니다.
칠천량 해전은 너무나도 무능력했던 원균의 원맨쇼와 다름이 없는데요.
출정에서부터 칠천량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도 당시 조선 수군의 막강한 화력에 비해서 제대로 된 전투도 못하고 도망만 치다가 결국 습격당해 폭망한 것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이죠.
이 일에 선조도 한몫했다는 것이 더 열받기도 하네요.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졸전, 칠천량 해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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