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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홍수의 변에 이은 경신환국까지 질투심이 강했던 명성왕후로 인해 온 조정에 불어닥친 피바람

by 사탐과탐 2022.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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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의 변에 이어 경신환국까지 질투심이 강했던 명성왕후로 인해 온 조정에 피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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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옷소매 붉은 끝동' 이라는 드라마가 대 히트를 치고 성황리에 막을 내렸죠.

이 '옷소매 붉은 끝동'을 '홍수(紅袖)'라고 부르는데요.

 

궁녀들 중에 어린 나인들은 옷소매의 끝동을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상궁들은 남색으로 물들이는 대서 생긴 말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홍수는 어린 궁녀들을 의미하는 용어였죠.

그런데 이 홍수에 관련한 큰 사건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홍수의 변'이라고 하는 사건입니다.

현종의 아내였던 명성왕후가 질투심과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일으킨 사건으로 훗날 이일은 커지고 번져 조정의 피바람을 부르는 계기가 되죠.

 

조선시대 왕비 중 다혈질에 욱하는 성격이 강했던 왕비가 있었는데 그녀는 바로 현종의 아내였던 명성왕후 김씨였죠.

오죽하면 명성왕후 때문에 현종은 그 흔한(?) 후궁 한 명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궁녀들이 현종에게 눈길 한번 주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했고 함부로 현종의 곁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등 남편과 다른 여자가 눈이 맞지 못하도록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녀의 이런 행동은 어느 정도의 질투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행여나 다른 여인에게서 왕자라도 태어나는 날에는 자신의 가문과 서인들의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시에 정권을 잡고 있던 세력은 남인으로 모든 군 요직을 남인이 잡고 있었고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을 통제하는 도체찰사 역시 당시 영의정이던 허적이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조정의 상황이 그렇다보니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명성왕후에게도 아들이 단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이 왕이 되어야 서인 모두가 사는 길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아들의 나이가 어리기도 했고 언제 병들어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만약 현종에게 다른 아들이 생긴다면 훗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궁녀들의 단속을 철저히 했으며 행여나 있을 불상사에 항상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명성왕후 귀에 들려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종이 어느 한 궁녀에게 승은을 내린 것이었죠.

 

당시엔 승은을 입은 궁녀는 특별상궁이 되어 후궁 취급을 받았고 자식을 무탈하게 낳으면 후궁으로 진급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명성왕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큰일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승은을 입은 궁녀는 '김상업' 이라는 궁녀로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던 현종이 유일하게 눈길을 준 여인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현종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상업은 특별상궁은 커녕 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버리는데요.

바로 명성왕후가 질투심에 불타올라 그녀를 궁 밖으로 내쫓아버린 것이었습니다.

 

현종이 눈 동그랗게 뜨고 살아있을 텐데, 명성왕후가 그녀를 궁 밖으로 내쫓을 수 있었던 이유는 김상업이 승은을 입고 나서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현종이 갑자기 병을 얻어 앓아누워버렸기 때문이었죠.

심지어 더 안타까운 점은 김상업이 임신한 사실을 현종이 쓰러지는 바람에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현종이 급작스레 쓰러진 후 불과 17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죠.

 

그렇게 현종을 이은 다음 왕으로 숙종이 왕위에 올랐고 명성왕후는 대비가 되었습니다.

대개 승은을 입으면 후궁이 되어 팔자가 필 정도로 현재로 따지면 로또가 1등 된 거보다 더 대박을 친 것이었는데 김상업은 참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것 같죠.

 

그렇게 궁에서 쫓겨난 김상업은 효종의 동생이던 인평대군의 아들 복창군의 집에서 살게 되는데요.

현종이 살아있을 때 복창군과 형제처럼 잘 지냈고 복창군 역시 쫓겨난 김상업을 불쌍하게 여겨 현종 대신 그녀를 보살펴 주었던 것이죠.

 

시간이 흘러 김상업은 현종의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 소식을 들은 명성대비는 그 아이는 현종의 아이가 아닌 복창군의 아이라고 주장을 했는데요.

명성대비의 아버지인 김우명이 복창군이 궁녀 김상업을 그리고 복평군이 내수사의 비자 귀례를 강제로 범해 임신시켰다고 하며 고발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이 일은 복창군이 감히 왕의 여자인 궁녀를 건드린 사건으로 탈바꿈 되려고 하고 있었죠.

그러자 의금부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네 사람을 잡아와 심문했지만 아무런 혐의점을 찾지 못했고 그들은 모든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의금부에서는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야 한다고 했지만 숙종은 아무런 근거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고사건으로 결론을 지었죠.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김상업이 현종의 승은을 입어 임신까지 했지만 명성대비에 의해 강제로 궁에서 쫓겨났다는 사실과 김상업을 불쌍히 여긴 복창군이 그녀를 돌보아줬다는 사실까지 모두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종친인 복창군과 복평군을 무고한 이유로 명성대비의 아버지인 김우명이 탄핵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명성대비는 대비로써는 체통도 다 버려버리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해버리는데요.

 

그녀는 왕명을 사칭해 한밤중에 대신들을 긴급 소집한 뒤 숙종이 있는 편전 앞으로 쳐들어가 소복만 입고 대성통곡을 하며 아버지 김우명을 무죄방면하고 복창군과 복선군, 복평군을 처벌하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며 아들인 숙종을 협박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그런 어처구니없는 요청에 숙종은 결국 죄도 없는 복창군과 복평군을 유배 보냈고

명성대비의 아버지 김우명은 풀려나면서 이 '홍수의 변' 사건은 일단락 되게 되었죠.

 

사실 명성대비가 복창군과 김상업이 간통을 했다고 무고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요.

현종 12년에 발생한 대기근 당시 청나라에서 대량의 구휼품을 받아와 나라를 구한 공이 있는 복선군에게 아들의 왕위를 빼앗기지는 않을까 하고 항상 염려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삼복이라고 불리며 인기가 많았던 복선군, 복창군, 복평군 그리고 김상업과 그의 자식까지 모두 제거하고 싶어 했죠.

또한 복창군과 복평군은 남인들과 친분이 있던 사이라서 이 사건을 뒤집어 씌워 복창군 형제를 제거하면서 동시에 남인들을 대거 숙청해버릴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래서 친정아버지인 서인의 거두였던 김우명이 나서서 그들을 무고한 것이었죠.

어쨌든 김우명은 딸 덕분에 처벌은 면했지만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안 가 사망하게 되었고 죄 없이 유배를 갔던 복창군과 복평군도 곧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런 행태에 허목 등 남인 세력은 명성대비가 소복만 입고 왕을 사칭해 대신들을 밤에 불러 모은 뒤 협박하고 국사에 함부로 간여한 것에 대해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죠.

윤휴, 허목, 홍우원, 조사기 등 남인들의 빗발치는 명성대비 탄핵 상소에 숙종은 어머니인 명성대비가 문제를 일으킨 건 인정했지만 자신의 친어머니인 그녀를 처벌까지 하라고 주장하는 남인에게 점점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이던 허적의 집에서 잔치가 있었는데요.

하필 그날 비가 오자 허적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숙종의 허락 없이 가져다 썼는데 허적의 집에서 잔치가 있는 걸 알고 있던 숙종도 비가 오는 걸 보고 허적의 집으로 용봉차일을 보내라 명했지만 벌써 허적이 가져갔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인 자신을 무시한 허적의 행동에 격한 분노를 느끼고 말았죠.

 

이에 숙종은 허적을 영의정직에서 잘라버렸고 철원에 유배를 갔던 김수항을 불러 영의정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좌의정에 정지화, 우의정에 민정중을 임명했으며 6판서 자리와 조정의 주요 요직을 서인으로 싹 물갈이를 해버렸죠.

 

이렇게 남인이 모조리 조정에서 축출당하는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적의 서자였던 허견이 삼복형제와 역모를 도모했다는 고변이 들어왔습니다.

이에 결국엔 삼복형제와 허견이 처형 당했고 얼마 안 가 남인의 영수인 허적과 예전 명성대비를 비판했던 윤휴, 이원정 등 남인의 수장들도 처형을 당하게 되었죠.

 

이렇게 조정의 중심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전환된 이 사건을 '경신환국' 이라고 하는데요.

명성대비의 질투심에서 시작된 홍수의 변이 결국에는 경신환국이라는 피의 숙청으로 이어져 당시 조정의 한 축이었던 남인 세력의 몰락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또한 이 일로 인해 현종의 승은을 입고 현종의 아이를 낳은 김상업 역시 완전히 잊혀지게 되었죠.

어찌보면 최종 승리자는 명성대비인 것 같네요.

 

명성왕후의 질투심으로 시작된 홍수의 변이 경신환국으로 이어져 조정에 피바람이 분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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