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영조시대, 기이하고 충격적인 장계가 올라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때는 영조 43년인 1767년 7월, 경상감사 김응순이 올린 장계 때문에 온 조정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경상도의 산음현에서 고작 7세밖에 안된 여자아이가 자식을 낳았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었죠.
한국나이로 7살이라는 말은 만으로는 5세나 6세밖에 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는데요.
당시 조선에는 어린나이에 결혼을 하던 시대이긴 했으나 결혼도 하지 않은 7살 여자아이가 임신을 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었지만 심지어 출산을 했다는 것도 전례가 없는 괴이한 일이었습니다.
훗날 이 사건을 두고 이덕무라는 인물은 자신이 저술한 '청장관전서에' 이렇게 기록해 두었는데요.
'7세 여자아이는 3주 만에 월경을 시작했고 고작 세 살의 나이에 음모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섯 살이 되었을 땐 보통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아이를 임신하고 난 뒤엔 갑자기 쑥 자라서 열네다섯살된 여자처럼 보였다.
그녀는 마치 요괴의 일종이었다.' 라는 식으로 기록해 놓았었는데요.
좀 와전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렇게 기록해놓았을 정도로 이 사건은 정말 기이한 일이었던 것이죠.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 영조와 대신들은 이는 나라에 큰일이 있을 것이라는 굉장히 불길한 징조로 여겼고 어떤 대신들은 이는 요괴가 틀림없으니 잡아서 처형해야 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이 여자아이도 내 백성이며 어린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만으로 처형을 시킬 순 없다고 신하들의 요청을 딱 잘라 거절한 뒤, 불길한 마음을 뒤로한 채 다시 장계를 훑어보았죠.
장계에는 7세 여자아이가 아들을 출산했다는 말과 '여자아이가 엄청 빨리 자란다'라는 말만 있을 뿐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 여자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여러 설명들은 빠진 채 뭔가 잘못된 느낌의 장계였던 것입니다.
이에 영조는 구상이라는 사람을 어사로 임명해 즉시 산음현으로 가 진상을 파악하라는 명을 내렸죠.
이 충격적인 일은 얼마 안 가 한양 내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지게 되면서 요괴에 짓이라느니, 나라에 무슨 변고가 있을 거라느니 하는 등 온갖 소문이 난무하며 민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 큰 혼란이 오기 전에 영조는 얼른 이 사태를 마무리 지어야 했죠.
그렇게 파견을 보낸 구상이 산음현에 도착을 하게 되었고 그는 출산을 한 아이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는 어머니 혼자서 두 딸을 키우고 있었는데 첫째 딸 이단은 10세이고, 이번 사건의 주인공인 둘째 딸 종단은 7세였죠.
어쨌든 종단은 출산을 한지 한 달도 안 되었던 산모라 그녀를 조사할 수 없었던 구상은 일단 종단의 어머니부터 추궁했는데요.
아무리 봐도 10대 중반의 나이로 보이는 종단이 진짜 7살이 맞냐는 물음에 어머니는 분명히 7세가 맞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이에 대해서는 동네 사람들에게도 물었지만 7세인 것은 확실해 보였죠.
그리고 다음에는 첫째 딸 이단에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단의 입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소금장수가 이번에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이었죠.
그것을 어떻게 아냐고 되물으니 소금장수가 종단이를 희롱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어머니와 밭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소금장수와 종단이가 옷을 다 벗고 방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도 하는 것이었죠.
이에 구상은 즉시 소금장수를 잡아들였습니다.
잡아들인 소금장수의 이름은 송지명으로 당시 23세의 나이였죠.
관아에 끌려온 송지명은 겁에 질린 채 구상이 묻는 말에 모든 걸 실토했는데요.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송지명은 종단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며 평소 그녀의 호의를 샀고 나중에 어머니와 언니가 없는 틈을 타 잠자리를 가지자고 꼬셨던 것이었죠.
구상은 즉시 영조에게 모든 사실을 기록한 보고서를 올렸고 그제서야 영조는 안심을 했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7세 아이가 아이를 낳았다는건 변고가 확실하다며 송지명과 종단은 풍습을 문란하게 했다는 이유로 노비로 삼아 각각 따로 다른 섬에 유배 보내버렸죠.
그리고 종단의 어머니는 딸 간수를 잘 못한 죄로 그녀 역시 노비로 삼아 섬으로 보냈으며 종단이가 낳은 아들도 어머니였던 종단을 따라 노비가 되어 종단과 같은 섬으로 보내버렸습니다.
게다가 처음 보고를 개판으로 한 현감도 파직시켜버렸죠.
또한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난 이유가 산음현의 이름에 '그늘 음'짜가 쓰인 것 때문이다 라는 소리가 나왔는데 이에 영조는 산음의 지명도, 산청으로 바꿔버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그늘 음'자를 쓰는 지역인 안음은 안의로 바꿔버리기도 했죠.
어린 나이에 출산을 하고 산후조리도 잘 하지 못한 상황에서 갓난아기를 데리고 유배를 갔어야 했던 종단과 그 아들은 안타깝게도 유배지인 섬에 도착하자마자 기력이 다했는지 바로 세상을 떠나고 마는데요.
만으로 따지면 고작 6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여자아이가 출산을 하고 그 힘든 유배길을 떠났으니 죽는게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죠.
종단은 그렇게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최연소 임신이라는 기록과 최연소 출산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로 따지면 이는 나라가 들썩거릴 정도의 엄청난 사건이지만 피해자인 종단이가 유배를 떠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지금은 그때와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네요.
조선 영조시대에 있었던 괴이한 사건이자 안타까운 사건, 종단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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