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정말 자주 금주령을 내렸었는데요.
영조 시대에는 자그마치 10년 동안 금주령을 내렸었습니다 금주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이나 술 좋아하는 것으로는 어디 가서 꿇리진 않을 것 같은데요.
과거에 우리 조상들은 금주령이 내려졌을 때 어떻게 이 끓어넘치는 끼를 누그러 트렸는지 궁금할 정도이죠.
오늘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금주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제 3대왕 다루왕 11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에게 술을 빚는 것을 금지 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탓에 술보다는 차를 선호하기도 했죠.
그래서 당시 기록에 사람들이 모여 음주(飮酒)가 아닌 음다(飮茶)를 즐겼다는 기록이 많기도 합니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와서 성리학이 주를 이루자 차보다는 술을 더 많이 마시기 시작했죠.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술이었기 때문에 술은 당시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그렇게 사는데 있어서 술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니 한반도 역사상 정말 빈번하게 금주령을 내린 국가가 바로 조선이었는데요.
새로 왕위에 오른 왕들은 즉위하자마자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고 술은 쌀로 빚어야 했기 때문에 종종 흉년이 들었을 때나 기근이 들었을 때 쌀 소비도 줄이고 식량을 절약하는 차원에서 금주령이 내려졌죠.
또한 천재지변이 있거나 재난, 국상(國喪)이 있을 때면 백성들 모두 근신하자는 의미에서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금주령이 내려졌어도 부유한 양반집에서는 몰래 소주를 만들어 먹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또한 국가 행사나 의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술이 필요했기에 그것까지 처벌하기엔 무리가 있었죠.
그리고 가뭄이나 흉년, 기근이 있을 때 잠깐 동안만 금주령을 내렸을 정도였을 뿐 그렇게 강력하게 금주령을 시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만큼 조선은 술을 좋아하는 동시에 술을 배척하는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요상한 나라였던 것이죠.
조선시대 때 첫 금주령은 태조 2년에 있었습니다.
이 금주령은 고작 일주일 만에 끝났는데요.
이성계는 한반도 북단 출신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날씨가 춥다는 이유와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접대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금주령은 금방 끝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태종 때에도 금주령 기간에 생원시를 합격한 사람은 3일간 술을 먹을 수 있게 허락해 줬는데요.
그 이유는 생원시 합격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였죠.
이럴꺼면 왜 굳이 금주령을 했는지 모를 정도인데요.
그만큼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금주령이 종종 있기는 했지만 금방 해제되었고, 또한 제사를 지낼 때 쓸 술을 빚기도 하는 등 금주령의 적용도 어느 정도 느슨하게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조선은 유례없는 빡센 금주령이 내려지는데요.
그는 바로 영조였죠.
영조는 국가적 행사나 종묘 제례에서도 술을 금지 시킬 정도로 정말 강력한 금주령을 내렸습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금주령을 내리고 시작했는데요.
예전에는 제사상에 올릴 술은 항상 봐줬는데 영조는 이 제주조차 올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처음엔 신하들도 다른 왕들처럼 영조도 얼마 안 가 금주령을 해제할 것이라 여겼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죠.
위기감을 느낀 신하들은 태조 때의 일을 들먹이며 중국 사신이 오면 술을 대접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 라는 질문에 영조는 "우리의 사정을 잘 말하고 감주(甘酒)를 드려라" 라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재위 내내, 몇 번이나 금주령을 했다 안 했다 했다 안 했다를 반복하다 많은 좌절을 맛본 영조는 만반에 준비를 마친 후에 영조 32년인 1756년에 더욱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했고 이때 시행한 금주령은 무려 10년 동안 이어지기도 했죠.
심지어 이는 흉년이나 기근에 의한 금주령도 아니었기 때문에 검소했던 영조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어서 했던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든 영조는 조선에서 술을 아예 없애버릴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요.
영조는 술을 빚는 자는 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술을 마신자는 노비로 삼으며 선비는 멀리 귀양을 보내고 평민은 수군에 복무시켜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하자 고작 1년 만에 섬으로 유배를 간 사람이 700여 명에 달했고 술을 마시다가 잡힌 사람은 훨씬 더 많았죠.
금주령을 시행하고 1주년 되던 날 영조는 명을 어겨 유배를 간 700여 명을 모두 풀어주라고 했는데요.
그렇게 모두를 풀어주고 불과 한 달도 안 되던 어느 날 형조판서이던 김상익은 영조에게 또 금주령을 어겨 잡혀온 죄수가 100여 명에 달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만큼 강력한 처벌을 했지만 금주는 하기 힘들었던 모양이었죠.
그러다보니 영조는 처벌의 수위를 좀 내려줬는데요.
선비는 10년 동안 관직에 임명될 수 없게 했고 유생은 10년 동안 과거시험에 응시불가, 평민들은 10년 동안 노비로 만드는 걸로 정했습니다.
또한 영조는 금주령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 금란방(禁亂房)이라고 하는 금주령을 어긴 사람을 잡기 위한 단속반도 만들었는데요.
하지만 처음에는 단속을 했지만 얼마 안 가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했죠.
바로 금주령을 어긴 사람들에게 뇌물을 먹고 눈감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 폐해가 드러나자 신하들은 금란방을 없애자고 주장했고 영조는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죠.
그러자 신하들은 금주령을 좀 완화하자는 요청까지 하게 되는데요.
이에 영조는 신하들의 요청은 들어주지 않은 채 신하들의 뜻을 꺾으려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
그러던 어느 날 남도 병마절도사였던 윤구연이 자신의 집에서 몰래 술을 빚고 술판을 벌였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었죠.
이에 잘 됐다 싶었던 영조는 즉시 윤구연을 잡아들이라 명했고 당시 술 냄새가 나는 빈 술 항아리를 증거로 들고 왔습니다.
윤구연은 그 항아리에서 술 냄새가 나는 이유가 금주령 이전에 빚었던 술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영조는 어찌 파직만으로 그치겠냐며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한 뒤 그를 사형시키라 명했죠.
그러자 대신들은 윤구연을 구명하고자 영조에게 상소를 올렸지만 이미 그를 금주령의 본보기로 삼고자 마음을 먹은 영조는 그들을 모조리 무시해버렸고 심지어는 파면시켜 버린 신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윤구연을 숭례문 앞에서 사형을 시켰는데 영조가 직접 숭례문까지 나와 사형집행을 참관했다고 하죠.
사형 집행 장면에 왕이 직접 온다는 것은 대부분 역적이나 무거운 죄를 지은 죄인일 경우였는데 금주령을 어긴 자를 사형 시키는 곳에 영조가 직접 온 걸 보면 금주령 시행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윤구연이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에도 금주령 폐지를 요구하는 수많은 유생들과 신하들 역시 모조리 귀양을 보내버렸죠.
그런데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는데요.
어느 날 금주령을 어겼다는 고발이 들어왔습니다.
바로 유세교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 술 같다는 것이었죠.
그렇게 잡혀온 유세교는 자신이 만든 건 식초라고 하며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는데요.
그가 빚었다는 것을 가져오라고한 영조는 한 신하에게 맛을 보라고 한 뒤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신하는 술인 것 같다고 했죠.
영조는 다른 신하에게도 맛을 보라고 한 뒤 무슨 맛이냐 물으니 그 신하는 영조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것은 틀림없는 식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듣고 싶은 답을 들었는지 곧바로 유세교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고 하죠.
그만큼 양반과 관리들에게는 강하게 나갔지만 백성들까지 처벌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영조는 식량을 아끼는 차원을 넘어서 관리들의 나태해진 태도와 생활을 바로잡고 이렇게 자신의 왕권도 강화하자는 취지에서 금주령을 내렸던 것이었죠.
그 외에도 늙어서 병든 백성이 술을 약으로 먹는 경우나 농사꾼이나 군인들이 마시는 농주, 탁주, 맥주 등은 금주법에서 제외 되었었습니다.
이렇게 서민들이 고된 삶을 달래기 위해 마시는 술은 눈감아 주었던 것이죠.
하지만 심한 기근이나 흉년이 들때면 얄짤없이 모든 술이 금지되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취지나 의미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영조 혼자 너무 강력하게 밀어붙이다 보니 부작용이 따르기 시작했는데요.
몰래 술을 빚고 팔아 떼돈을 버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고 지방 서리들이 앞서 말한 금란방을 설치해 날이면 날마다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가기도 했던 것이죠.
그렇게 나중에는 관리들이 뇌물을 받는 수단으로 이 금주령을 이용하기 시작했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어느 고을에서 금주령을 어긴 자가 나오면 그곳의 관리까지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관리들이 죄다 술 먹는지 감시하러 다니느라 고을의 행정업무가 마비되다시피 한 것이죠.
관직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유배를 가는 일도 벌어졌으니 관리들이 음주단속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심한 것은 한집이라도 금주령을 어길 시 이웃에 있던 세 집까지 함께 똑같은 처벌을 했는데요.
이웃들끼리 서로 계속 감시하고 그러다 싸움이나고 갈등하게 만드는 좋지 못한 정책이었죠.
심지어 영조 자신도 술을 먹은거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었는데요.
하루는 영조가 술을 계속 마신다는 소문을 들은 신하들이 영조에게 진위를 묻자 '자신은 오미자차를 마셨을 뿐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소주로 의심하더라' 라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영조는 송절차 라고 하는 솔잎으로 만든 차를 즐겨 마셨다고 하는데요.
이는 차라기 보다는 술에 가까웠다고 하죠.
이렇게 철저하게 시행하던 금주령 때문에 많은 폐단이 일어나자 보다 못한 대신들은 영조에게 금주령을 거두어 달라고 간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오히려 금주령 덕분에 중범죄가 줄었다며 자랑하기도 했다고 하죠.
농업국가라면 흉년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할시 금주령을 내릴 수 있다고는 하지만 영조가 금주령을 내렸던 10년 동안은 가뭄이나 흉년이 든 적이 없었고 오히려 쌀 가격이 하락할 정도로 풍년이 든 적도 있었습니다.
이걸 보면 단순히 쌀이 없어서 금주령을 시행한 것이 아니고 영조 자신의 검소한 성격 탓에 행한 일이라 볼 수도 있겠죠.
영조 46년, 한 사관은 '금주령으로 술을 빚거나 마신자는 처벌하고 주점도 금지시켰지만 능히 금할 수 없었다' 라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영조의 강력하고 철저한 금주령은 훗날 손자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손바닥 뒤집듯 해버리는데요.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금주령을 바로 풀어버렸는데 그는 술을 즐겨 마셨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술에 대해 너그러웠다고 하죠.
그래서인지 정조 때에 한양에는 술집들이 많이 오픈했으며 그러다보니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금주령을 시행했지만 숨어서 마시거나 술을 빚거나 한걸 보면 마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마시는 것 같네요.
조선시대에 있었던 금주령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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