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편집증과 강박장애로 싫어하던 사람은 정말 병적으로 싫어했는데요.
대표적인 피해자가 사도세자와 바로 이 정성왕후인 것 같습니다.
평생을 무시당하며 살았던 그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의 홍릉에는 조선 왕릉 42기 중에 유일하게 왕비 혼자 잠들어 있는 릉이 있습니다.
심지어 옆에는 남편의 무덤 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지만 홀로 쓸쓸히 넓은 터를 지키고 있는데요.
이 무덤의 주인은 3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왕이었던 남편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하며 살았고 죽고 나서도 버림받은 정말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산 정성왕후의 무덤이죠.
영조의 편집증과 강박장애와 같은 증세로 인해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병적으로 구분하면서 그의 눈밖에 난 사람들은 최후도 별로 좋지 않았는데요.
가중 대표적인 희생자는 아들 사도세자였고 정성왕후도 피해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만큼 영조는 아버지로서도, 남편으로서도 최악이었고 그로 인해 정성왕후는 너무 불쌍하고 쓸쓸한 삶을 살게 된 왕비였죠.
그녀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이었는데요.
그녀가 13세가 되던 1704년, 2살 연하이던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훗날 영조)과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의 부부 사이는 너무너무 좋지 않았는데요.
영조가 아내였던 정성왕후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죠.
영조가 정성왕후를 그렇게 차갑게 대한 이유는 첫날밤이 있던 날, 영조가 그녀에게 한마디 건넸는데 그녀가 대답을 잘못하는 바람에 이후 그녀를 대하는 영조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요.
첫날밤 정성왕후의 손을 잡고 영조가 "손이 참 곱구려" 라고 말하니 정성왕후는 부끄러워하며 "고생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해버린 것이죠.
그러자 영조의 안색이 바뀌면서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조는 그녀의 대답을 무수리 출신으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손이 거칠어진 자신의 어머니 숙빈최씨를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죠.
어머니의 신분은 영조 평생의 콤플렉스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효성이 지극했던 연잉군으로써는 그녀의 대답이 못마땅할뿐더러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죠.
그러다 형이던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왕위에 올랐지만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는데요.
아내이던 정성왕후는 창덕궁에 내버려 둔 채 자신은 경희궁에 살 정도로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해버렸습니다.
거기다가 승정원일기에도 영조가 정성왕후의 처소를 찾았다는 기록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죠.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던 남편 영조를 정말 살갑게 잘 모셨는데요.
영조의 후궁들과 그 자식들까지 잘 대해줬다고 합니다.
또한 사도세자도 친자식처럼 대해줬으며 시어머니였던 숙빈최씨와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등 왕실 어른들을 잘 모시던 착한 며느리였죠.
그에 보답하듯 사도세자와 영빈이씨 또한 이런 정성왕후를 잘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녀의 이런 성품은 영조도 인정한 부분이었는데요.
훗날 정성왕후가 죽은 후, 생전의 행적을 기록하는 행장에 그녀는 궁에서 살던 내내 늘 미소 띤 얼굴로 누구든 따스하게 맞아주었고 윗전 어른들도 극진히 모시는 것이 게으른 기색이 전혀 없었다라고 영조는 그녀에 대해 그렇게 기록해 두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대놓고 미워하며 차갑게 대하던 영조에게도 늘 미소 지으며 받아주었던 그런 너그럽고 현명한 여인이었지만 끝끝내 영조의 마음을 얻진 못했죠.
하지만 그녀도 모든 화를 속으로 삭이다 보니 나이가 50이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가 아파오기 시작했는데요.
그 소식을 들은 영조는 엄살부린다며 핀잔만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를 치료해주던 의관들도 어차피 영조에게 직접 정성왕후의 상태를 아뢰어봤자 들은 체도 하지 않을 테니 그냥 대전 내시에게 말해준 뒤 시간 나면 영조에게 알려주라고 했을 정도였죠.
그러다 시간이 흘러 정성왕후의 환갑 때가 되자 신하들은 영조에게 그녀의 환갑잔치를 열자고 말했지만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는데요.
그녀의 환갑을 3일 앞둔 시점에서 영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숙의문씨가 사도세자의 어머니이던 영빈이씨를 업신여긴 일로 대왕대비였던 인원왕후가 숙의 문씨를 처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화를 냈고 인원왕후에게 갑자기 양위를 하겠다고 선언하며 궁 밖으로 나가버리면서 그렇게 그녀의 환갑잔치를 무산시키기까지 했죠.
거기다가 친자식처럼 여기던 사도세자가 광증에 걸려 영조와 극심한 갈등을 보이자 세자의 안위를 걱정해 노심초사하다 결국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더 슬픈 사실은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날에도 영조는 아내의 장례식 자리에 없었던 것인데요.
정성왕후가 죽은 날 자신이 사랑하던 딸 화완옹주의 남편이던 정치달도 죽고 말았는데 자신의 아내이자 나라의 국모의 죽음을 내팽개치고 남편을 잃어 슬퍼할 딸을 위로하고자 화완옹주의 집으로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라며 대소신료들이 영조에게 달려들어 붙잡고 늘어질 정도로 격렬하게 행차를 반대했지만 끝끝내 영조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딸의 집으로 행차했던 것이죠.
또한 영조는 자신을 말리고 반대했던 대신들을 처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1724년에 왕비가 된 후로 33년간 중전의 자리에 있으며 역대 조선 왕비들 중 재위 기간이 가장 긴 왕비였죠.
그만큼 그녀는 오랜 기간 동안 쓸쓸하고 외로운 삶을 이어나갔던 것입니다.
훗날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는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검은 피를 요강에 가득 토했다' 라고 자신이 쓴 한중록에 적었다고 하는데요.
그것은 시어머니가 평생토록 가슴속에 쌓아두었던 울분을 모두 다 토해내고 돌아가신 것이라고 기록했다고 하죠.
영조는 그녀가 죽자 어찌 된 일인지 정성왕후의 무덤 옆에 자신이 묻힐 자리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영조의 능을 정성왕후의 옆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만들었고 그곳에는 훗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도 영조와 함께 묻혔다고 하죠.
그렇게 평생 동안 비참한 삶을 살았던 정성왕후는 죽어서도 영조와 함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정조는 아버지와 할머니를 아껴주던 정성왕후가 죽어서라도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영조를 다른 곳으로 모신 것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영조의 아내로 남편에게 평생토록 철저히 무시와 멸시를 당하며 살았던 정성왕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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