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후궁인 숙의문씨는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를 이간질해 세자를 몰아내고 자신이 아들을 낳아 그를 왕으로 올리려고 한 악녀입니다.
숙의문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조선시대 대표 악녀 중 한 명인 귀인 조씨와 굉장히 흡사한 부분이 많은 인물입니다.
귀인 조씨는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를 이간질했던 악녀 중 악녀인데요.
오늘의 주인공인 이 인물도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벌어지게 하기 위해 온갖 모략을 꾸몄으며 이후 행적과 최후까지 귀인조씨와 비슷한 인물이죠.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영조의 후궁이던 숙의문씨 입니다.
영조가 25세에 얻게 된 효장세자는 10세 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 매흉과 화흉으로 인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게 되죠.
그렇지만 효장세자에게는 부인이 있었는데요.
그녀가 바로 현빈조씨였습니다 .
고작 14세의 나이로 과부가 된 며느리가 너무 불쌍했던 영조는 그녀를 딸처럼 여기며 잘 보살펴 주었고 화평옹주와 함께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두 자식 중 한 명이라고 할 정도였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빈조씨는 3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이에 영조는 무척이나 슬퍼하며 며느리의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그런데 현빈조씨의 장례를 치르던 중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데요.
현빈을 모시는 궁녀들 중 한 궁녀가 영조의 눈에 띈 것이었죠.
그렇게 며느리의 장례식 중에 영조는 그녀를 자신의 침실로 불렀고 그렇게 그녀는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됩니다.
그녀가 바로 숙의문씨이죠.
하지만 며느리의 장례 중에 그녀를 모시던 궁녀와 잠자리를 가진 건 왕으로써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었는데 숙의 문씨가 너무 마음에 들었었나 봅니다.
그렇게 영조의 아이를 가지게 된 숙의문씨는 약 1년 후 화령옹주를 낳았죠.
그리고 얼마 안 가 영조는 그녀의 품계를 파격적으로 올려주는데요.
바로 정 4품 소원의 작위를 하사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영조의 총애가 얼마나 과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그는 문씨를 소원으로 임명하는 교지에 어보를 찍으라 명했죠.
하지만 어보는 중전이나 세자를 임명할 때 쓸 정도의 중요한 것이었는데 일개 후궁의 작위를 내리는데 쓰기에는 과분한 처사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대신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했지만 영조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억지를 부리며 기어코 교지에 어보를 찍어버렸죠.
이 일화만 보더라도 그가 숙의문씨를 얼마나 총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조가 문씨에게 눈이 멀어 얼토당토안한 일을 한다고 여긴 대소신료들은 느닷없이 문씨에게 정 4품이라는 파격 승진에 대해 수많은 의혹과 불만을 가지게 되었죠.
그만큼 숙의문씨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궐내에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문은 바로 문씨가 사가에서 아들을 데려와 자신이 낳은척 하려고 한다는 소문과 그녀의 어머니가 중인데 문씨가 아이를 낳을 때 환속했다는 소문 등 이런 이상한 소문이 날 정도로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좋지 못했죠.
그러나 이런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조 47년인 1771년, 영조는 문씨를 종 2품 숙의로 임명했습니다.
그러자 숙의문씨는 영조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점점 기고만장해지기 시작했는데요.
안하무인이 된 그녀는 어느 날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에게 대들었다가 왕실 최고 어른이던 대왕대비인 인원왕후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죠.
아무리 영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영빈이씨는 문씨보다 나이도 훨씬 많았고 품계도 높았던 데다가 심지어 현 세자의 생모였기 때문에 숙의문씨의 이런 행동은 너무나 무례한 행동이었고 내명부의 법도와 질서를 뒤흔드는 어처구니없는 짓이었죠.
하지만 영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터라 왕실의 최고 어른인 인원왕후가 직접 나섰던 것입니다.
그렇게 인원왕후의 처소로 불려간 숙의문씨는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 잡는다며 사도세자와 영빈이씨 앞에서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죠.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격하게 분노했는데요.
그는 인원왕후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사도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당시 인원왕후는 매일 사도세자를 옆에다 끼고 밥을 먹여서 애가 뚱뚱해졌다며 영조가 투덜거릴 정도로 세자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죠.
그런데 당시 왕이 양위를 한다고 했을 때 신하들이나 세자가 그냥 받아들이게 되면 반역의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면서 몇 날 며칠을 엎드려 빌었어야 했는데요.
영조의 이런 양위쇼에 사도세자는 눈보라가 치는 한겨울에 이마를 바닥에 찧어가며 영조가 명을 거두기 전까지 몇 날 며칠을 무릎 꿇고 기다렸어야 했죠.
그러다 결국 인원왕후는 사도세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실수 한걸로
숙의문씨 문제를 마무리 지어버렸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숙의문씨는 다시 영조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데요.
그녀는 그때부터 내서는 안될 욕심을 내기 시작했죠.
그렇지 않아도 영조와 세자 사이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고 만약 세자가 죄를 지어 폐세자 되면 죄인의 자식이 세자가 될 수 없으므로 세손 (훗날 정조)의 위치도 흔들릴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렇게 됐을 때 자신이 아들을 낳는다면 자신의 아들이 세자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죠.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 역시 궁녀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뱃속에 있는 아이가 아들이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죠.
하지만 그녀의 그런 큰 기대와는 다르게 또다시 옹주를 낳았는데요.
불과 2년 만에 두 번이나 임신을 했으니 앞으로도 계속 영조의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숙의문씨는 자신의 오빠인 별감 문성국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문성국은 동궁전 (세자의 처소)의 별감들과 내통을 하면서 사도세자의 비행을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숙의문씨에게 알려주었고 그녀는 그렇게 알게 된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낱낱이 일러바치며 둘 사이를 이간질했죠.
또한 문성국은 정승이던 김상로와도 손을 잡고 사도세자를 폐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습니다.
당시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세자가 이러든 저러든 돌아오는 건 영조의 야단밖에 없었고 이에 세자는 이렇게 답답하고 견디기 힘든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영조 몰래 궁 밖으로 나가 놀다가 새벽에 돌아오는 일이 잦았죠.
숙의 문씨는 이러한 사실을 알아채고 사람을 시켜 세자가 궁 밖을 나가기라도 하거나 그가 무슨 일만 하더라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한 뒤 영조에게 쪼르르 달려가 없는 일까지 지어내며 사도세자의 비행을 꼰질렀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세자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조는 숙의문씨가 들려주는 사도세자의 비행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 날 창경궁 낙선당에서 불이 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영조는 이 일도 사도세자가 저지른 일이라며 그를 불러 크게 화를 냈습니다.
이에 너무 억울했던 세자는 가슴속에 맺혀있던 울분이 폭발해 우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을 정도였죠.
그렇게 숙의문씨가 입을 열면 열수록 부자 사이는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후 영조에게서 세자를 커버 쳐주던 인원왕후와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의 정신은 더욱더 피폐해져 궁녀들이나 내시들에게 칼을 휘둘러 상해를 입히거나 심지어는 목숨까지 빼앗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고 1762년, 마침내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숙의문씨는 세자를 폐위시키는 목적을 달성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아들은커녕, 다시 자녀를 낳지 못했죠.
그 이후로 계속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다가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게 되는데요.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숙의문씨와 그녀의 오빠 문성국의 악행을 모조리 까발리기 시작했습니다.
창경궁 낙선당에서 일어난 화재도 문성국이 사도세자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지른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죠.
그로 인해 문씨와 그녀의 가족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다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 모조리 붙잡히게 되었고 숙의문씨는 사도세자를 무고하고 죄를 뒤집어씌운 이유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며 얼마 안 가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녀의 집안까지 풍비박산이 나는데요.
숙의문씨의 어머니는 제주도의 관비가 되었고 오빠 문성국은 노적에 올랐으며 가산을 몰수당한 뒤 처형당했죠.
게다가 그의 아내는 노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성국의 아들은 유배를 떠나게 되었고 처남 역시 유배형에 처해졌죠.
이뿐만 아니라 대신들은 숙의문씨의 두 딸, 화령옹주와 화길옹주의 작위를 박탈해야 한다고 정조에게 주청했는데요.
정조는 문씨가 흉계를 꾸밀 때 옹주는 갓난아기일 뿐이었다며 그들을 처벌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폐서인 되고 나서 작호를 빼앗겼기 때문에 흔히 문녀(文女)라고 불린다고 하죠.
숙의문씨는 영조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살았지만 결국 자신의 악행에 대한 죗값을 가족 전체가 치르게 된 것 같습니다.
인조의 후궁이던 귀인조씨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영조의 후궁, 숙의문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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