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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생각보다 심각했던 걸로 보이는 영조의 편집증과 강박장애.

by 사탐과탐 2022.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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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자신만의 콤플렉스로 인해 현대의학으로 볼 때 편집증과 강박장애를 앓았던 걸로 보이는데요.
그걸로 인해 가족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영조의 이런 병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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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조선 후기 성군으로 묘사되는데요.

백성들을 아끼며 평생 동안 검소한 삶을 살았죠.

 

또한 52년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수많은 치적을 남기기도 한 대단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그의 성격은 현대 의학으로 미루어보면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영조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하는데요.

 

그는 현대의학으로 볼 때 편집증적이고 강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걸로 추정된다고 하죠.

영조가 보인 증상으로 여겨지는 강박장애는 본인의 생각과 의지랑은 상관없이 어떤 생각이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라 심리적으로 불안해지고 그 불안을 없애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반복하는 질환입니다.

 

또한 편집증은 남이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지만 항상 남이 자신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는 증세인데요.

그 이유를 많은 사람들은 영조의 콤플렉스 때문에 그렇다고 하죠.

 

영조에게는 3가지 큰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것은 천한 무수리의 자식이라는 것과 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오른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노론이 만든 왕이라는 것이었죠.

영조의 어머니는 숙빈최씨로 궁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던 천한 무수리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그렇게 영조를 낳게 된 것이죠.

 

그런데 당시 숙종에게는 훗날 경종이 되는 세자가 있었고 그는 영조의 이복형이었습니다.

숙종은 희빈장씨의 아들인 경종을 미워했는데요.

그를 세자 자리에서 밀어내고 연잉군(훗날 영조)을 세자로 삼으려는 목적으로 경종을 폐세자 하기 위한 트집을 잡기 위해 대리청정도 시키고 노론의 대신들과 독대를 하는 등 여러 가지 수를 썼습니다.

 

그렇지만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큰 공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크게 실수를 한 것도 없어서 결국 숙종이 죽고 나서 다음 왕이 된 것이었죠.

그러나 경종은 몸이 너무 허약했었는데요.

이에 노론은 연잉군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결심하고 경종에게 후사가 없으니 연잉군을 세제로 삼으라고 했으며 후에는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고까지 했었습니다.

 

나이가 30대 밖에 되지 않았던 경종은 얼마든지 후사를 낳을 수 있는 나이였는데 연잉군을 세제로 삼으라는 노론의 주청도 이미 역모에 준하는 사안이었지만 경종이 대리청정을 하겠다 해도 말려야 하는 상황에 노론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하라고 한건 정말 선 놈은 행동이었죠.

 

그러다 보니 결국 노론의 대신들이 대거 숙청을 당하거나 쫓겨나게 되는 일도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가 겨우 살아난 연잉군은 몸이 허약한 경종의 쾌유를 빌며 감과 간장게장을 올렸는데요.

 

그걸 먹은 경종이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소문이 나고 만 것이죠.

그렇게 그를 지지하던 노론이 큰 힘을 실어준 덕에 그는 왕이 되었고 그 이후로 영조와 노론 사이에는 서로 간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콤플렉스는 영조가 왕위에 오른 정당성과 정통성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는 죽을 때까지 무수리의 자식이라든지, 형을 죽인 동생이라든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수많은 소문과 비난 등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는 자신을 비난하거나 비판, 또는 공격하는 것에 대해 병적으로 예민해지기 시작했으며 자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신하들은 물론 자식들까지 경계하게 되었죠.

 

그렇게 영조는 남들에게 책잡힐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자신에게 철저하고 엄격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그런 강박 때문이었는지 영조는 신하들과 회의를 하던 와중에도 밥 먹어야 한다고 가버릴 정도로 정시에 딱 밥을 챙겨 먹었고 공부 또한 너무 열심히 해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다고 하죠.

 

심지어 항상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는 편이기도 했는데요.

하루에 12시간이 넘는 강도 높은 국정운영을 딱딱한 의자에 꼿꼿이 앉아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점점 성격도 예민해지고 까칠해진 것이죠.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의 기록에 따르면 영조의 독특한 성격이 잘 드러나 보이는데요.

그는 '죽을 사(死)'자와 '돌아갈 귀(歸)'자는 꺼려 하여 잘 쓰지 않았고 신하들과 회의를 할 때 입었거나 정무를 볼 때 입었던 옷은 부정한 기운이 묻었다 하여 방에 들어갈 때 반드시 갈아입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재수 없는 말을 하거나 들었을 때는 꼭 입을 물로 헹구고 귀를 씻었으며 누군가를 불러 아무거나 물은 뒤 대답을 들었다고 하죠.

영조는 죄인을 심문한 날에는 아주 늦은 밤이라 할지라도 꼭 사도세자를 불러 사소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은 뒤 귀를 씻고 나서 그 물을 자신이 싫어하던 옹주인 화협옹주의 처소 쪽으로 버리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어떻게 해서든 떨쳐내려 했고 심지어 싫어하는 자식들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죠.

거기다가 좋은 일이 있을 때 지나는 문과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지나는 문이 달랐을 정도였으며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같이 있는 것도 병적으로 싫어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사도세자와 화완옹주는 사이가 좋았다고 하는데요.

한날은 사도세자와 화완옹주가 우연히 마주친 일이 있어 함께 같은 방에서 담소를 나누는 일이 있었는데 영조가 그걸 보고는 눈이 뒤집혀서 사도세자를 죽이려 들었고 사도세자는 겁에 질려 창문을 넘어 도망가야 했던 사건도 있었죠.

 

또한 영조는 좋아하는 사람이 다니는 길로 싫어하는 사람이 다니지 못하게 하기도 했을 정도로 굉장히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영조의 그런 성격은 아들인 사도세자조차 미치게 만들어 버렸는데요.

 

그만큼 한나라의 왕으로써는 업적이 있지만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는 천륜을 저버린 잔인한 인간에 불과했으며 조선 왕조 역사상 최악의 아버지가 되어버렸죠.

영조는 신하들의 충성도 테스트를 위해 허구한 날 선위쇼를 하기도 하고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겠다고까지 했었는데요.

 

그러다 결국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조정에 어떤 일이 있어서 세자가 영조에게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물으면 영조는 세자에게 이런 것도 하나 못하면서 무슨 세자냐고 면박을 주고 넌 세자 자격이 없다고 하며 방에서 내쫓아버렸다고 하죠.

 

영조가 그렇게 나오다 보니 사도세자가 조정의 일을 혼자 처리해버리면 니가 왕이냐면서 니가 뭔데 마음대로 조정의 일을 처리하냐며 생난리를 쳐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비 오면 세자 때문에 재수 없게 비가 온다 하고 비 안 오면 세자가 덕이 없기 때문에 비가 안 온다고 하면서 천재지변이나 가뭄, 홍수, 역병 등 뭔 일만 있으면 사도세자 때문이라며 그를 몰아붙였죠.

 

심지어 사도세자가 눈병에 걸려 책을 읽지 못하자 영조는 오히려 꾀병을 부린다며 세자를 불러내 크게 혼냈다고 합니다.

이에 사도세자는 이래도 혼나고 저래도 혼나다 보니 결국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 자체를 공포스러워하면서 옷을 입는거 조차 두려워했고 마침내 광증이 깊어져 무수히 많은 사람들까지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영조의 강박증 때문에 아들이 미쳐버린 셈이죠.

결국 아들을 뒤주에 가둬 굶어 죽게 만들기까지 했으니 영조의 이런 증세는 그냥 무시하기에는 심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영조는 기다렸다는 듯 개선가를 울리며 환궁했다고 하죠.

그의 심했던 자식 편애는 손자들에게도 이어졌는데요.

혜경궁 홍씨의 자식들인 의소세손이나 정조는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지만 사도세자의 후궁 소생들은 박대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영조는 첫째 손자였던 의소세손이 태어났을 때는 썩 좋아하지 않았는데요.

그 이유는 자신이 가장 예뻐했던 딸 화평옹주의 삼년상이 끝나는 달에 의소세손이 태어났었기 때문이죠.

그날 혜경궁 홍씨의 출산을 도운 영빈이씨에게 "딸 죽은 건 다 잊고 손자 태어나는 것만 좋아하냐?"며 면박을 줬다고 하죠.

 

영조는 손자이던 은언군과 은신군이 사소한 잘못을 했을 때도 왕족으로써 처신을 잘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보내버렸는데요.

은신군은 귀양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은언군은 영조가 죽는 날까지 유배지에서 풀려나지 못했다고 하죠.

 

그만큼 손자들에게도 그의 편집증적인 증상은 예외일수 없었고 이 증세가 조금 더 심했으면 정조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영조는 세자의 후궁들을 심하게 구박했는데 오죽하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후궁들에게 질투하기는 커녕 동정했을 정도였으며 그들을 챙겨줬다고 하죠.

 

실제로 숙빈임씨가 임신했을 때 사도세자는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 것이 두려워 임씨의 아이를 지우려고 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자신의 아내였던 정성왕후도 평생 동안 철저히 무시하고 살았죠.

군주로서의 역량은 굉장히 뛰어났던 영조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점이 아닐 수 없네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콤플렉스로 인해 편집증이나 강박증을 겪으며 유독 가족들에게만 못살게 굴었던 영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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