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는 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솔로들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서 모조리 결혼을 시키기도 했는데요.
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통계청이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30대 인구 중 미혼인 사람의 비중이 42.5%로 역대 최고치를 달성했다고 하죠.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결혼하는 남녀의 수마저 줄어들다 보니 정부에서도 결혼 장려금을 지원해 주는 등 여러 가지 지원정책을 펴고는 있지만 짧은 시간 안에 상황을 해결하기는 쉽지 않아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는 문제는 요즘 시대 우리만의 일이 아니었다고 하죠.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이들에게 독신세라는 세금을 매기며 경제적 불이익을 주기도 했고 17세기 캐나다 역시 남녀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 그 부모에게 벌금을 물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장가나 시집을 못 간 노총각이나 노처녀들은 고아나 홀아비, 과부처럼 반드시 구제해 줘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고 하는데요.
조선시대에는 과연 이 미혼 남녀들을 결혼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방법들을 썼던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는 가난 때문에 서른 살이 넘도록 출가하지 못하면 국가에서 결혼비용을 지원해 줘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고 하죠.
그리고 집안이 가난하지 않은데도 서른이 넘도록 자식을 결혼시키지 않으면 그 집의 가장을 죄인으로 다스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지역에서 가난 때문에 결혼을 못 하는 노총각과 노처녀가 있으면 그곳의 수령이 정부로부터 문책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수령이 먼저 왕에게 백성들의 혼수비용을 청구할 정도였다고 하죠.
세종 25년 조선에 이미 노처녀와 노총각을 구휼하는 법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30~40이 되도록 혼인하지 못하는 남녀가 생기자 사간원에서 세종에게 상소를 올리게 되는데요.
이에 세종은 어명을 내려 서울지역은 한성부 관리들이 그리고 지방에서는 감사가 백성들을 방문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가난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하는 남녀가 있으면 그들의 사촌 이상 친척들이 혼수를 준비해서 혼인을 할 수 있게 도우라는 것이었죠.
성종 시절에는 아예 전국에 있는 노총각과 노처녀들의 수를 모두 파악해서 가난한 자들에게는 쌀과 콩 10석씩을 혼수로 지급하고 양반이 아닌 경우에는 5석씩을 추가로 더 주도록 했습니다.
나라에서 결혼을 하지 못하는 백성들의 혼인을 관리하고 혼수품까지 구체적으로 지정해 준 것이죠.
그런데 사실 나라에서 이렇게 백성들의 혼인을 지원해 준 것은 지금 사람들이 보면 너무나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유 때문이었는데요.
가뭄이나 홍수, 지진 등의 자연재해가 생기는 이유가 바로 결혼을 하지 못한 노총각과 노처녀들의 화가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의 제11대 국왕인 중종 시절에는 유난히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났다고 하죠.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지진이 발생했다고 기록된 내용 중 무려 4분의 1이 중종이 왕으로 있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던 종묘에도 두 차례나 벼락이 떨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가뭄과 지진 태풍, 장마에 심지어 전염병까지 유행하는 등 끊임없이 자연재해가 생겨났다고 하죠.
계속해서 이런 재해가 발생하자 백성들은 물론이고 조정의 관료들도 지금의 재해는 모두 결혼을 하지 못한 백성들의 원망 때문이라고 믿으며 돈이 없어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혼수를 지원해달라는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이에 중종은 혼인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줬으며 직업을 잃은 사람들에게 다시 일자리를 찾아주는 등 덕을 베풀기 위해 애썼다고 하죠.
제9대 국왕이었던 성종도 나라에 오랜 기간 장마가 계속되자
“하늘의 도(道)는 아득히 멀어서 알 수 없다.
요즘 장마가 몇 달 동안이나 개지 않는구나.
아마도 가난한 양반가의 처녀가 제때에 출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노라.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명해 이들의 혼수감을 넉넉히 지원해서 시기를 놓치는 일이 없게하라." 라는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1791년 2월 어느 날 정조는 한성(서울)에서 가난 때문에 제때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의 수를 조사하게 했죠.
그 결과 총 281명의 결혼적령기 청춘 남녀를 찾게 되는데요.
정조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들에게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돈 500푼과 포목을 결혼비용으로 지원해준 후 그들의 혼인여부를 매달 보고하라는 어명을 내렸죠.
왕이 직접 나서서 결혼 비용을 대어주고 식까지 올려 주라고 명하니 관리들도 신속하게 일을 처리했고 석 달 만에 두 명의 남녀를 제외한 서울 시내의 노총각 노처녀들이 모두 혼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조는 높은 혼인 성공률보다는 남은 두 사람이 왜 혼인하지 못했는지에 더 관심을 보였다고 하죠.
조사 결과 남자는 28세의 노총각 김희집으로 서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기로 약속한 상대가 있었지만 그가 서얼임을 알게 된 여자의 집안에서 일방적으로 파혼을 해버렸다고 하죠.
그리고 여자의 이름은 신 씨로 그녀 또한 서녀이며 나이는 21세였습니다.
신씨의 경우 나라에서 결혼 비용을 지원해 줬지만 그녀의 집안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결혼식을 치르기 어려웠다고 하죠.
보고를 받은 정조는 신씨에게는 결혼 비용을 더 넉넉히 주고 김희집에게는 다른 결혼 대상자를 찾아 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신씨의 혼인은 또 다른 난관에 부딪치게 되는데요.
그녀와 결혼하기로 약속한 신랑이 그만 다른 집 처녀와 혼인을 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두 남녀는 파혼의 상처에 경제적인 문제까지 겹치며 혼인을 할 수 없게 돼버린 것이죠.
정조의 명으로 신씨의 결혼을 추진하고 있던 한성부의 관리들은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서부령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던 이승훈이 계책을 하나 내게 되는데요.
비슷한 상처를 가진 두 사람만이 혼인을 하지 못하고 남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인연이라고 할 수 있으니 김희집과 신씨 처녀를 서로 짝지어주면 어떻겠냐는 것이었죠.
그 말을 들은 관리들은 고심 끝에 두 사람의 혼인 계획을 세운 후 정조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보고를 받은 정조 역시 경제적인 지원에 그쳤던 이전과는 다르게 두 사람의 혼인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며 적극적으로 나섰죠.
일반 백성의 혼인에 국가가 나서는 대형 이벤트가 조선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것인데요.
이후 조정에서는 이승훈을 김희집의 집으로 그리고 한성부 주부 윤형은 신씨 집으로 보내서
각각의 집안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죠.
결국 두 집안에서 혼인을 하겠다는 허락을 받아낸 관료들은 즉시 정조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왕실의 혼례를 제외하면 이보다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고의 혼수품과 재물을 보내 주라고 명했다고 하죠.
이 대형 이벤트의 성공 결과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목민심서 등에 기록됐고 한성의 저잣거리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서는 훈훈한 해프닝 정도에 불과한 사건이었지만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기겁을 할 일인데요.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어야 할 결혼 상대를 국가에서 '장려'라는 이름 아래 반강제로 정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당시는 연애결혼을 하는 시대가 아니었고 가난 때문에 결혼하고 싶어도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 혼례를 치를 수 있게 한다는 의도였다는 것을 감안해야겠죠.
정조 이외의 다른 왕들도 마찬가지로 가뭄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가 오랜 기간 계속되면 나라에서 결혼하지 못한 총각과 처녀들을 찾아내 강제로 결혼시키기까지 했다고 하는데요.
때문에 나라로부터 결혼시키기 정책이 선포되면 결혼하지 못한 자녀를 둔 집안에서는 비상이 걸리게 되고 급하게 배우자를 찾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쉽게 말하기도 하죠.
하지만 요즘 사회에서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남녀 모두가 많은 희생을 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기에 폭등하는 집값과 맞벌이 상황에서 아이를 키우기 힘든 점 그리고 개인의 가치관의 변화 등 수없이 많은 이유로 '결혼을 꼭 해야만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빠지게 되죠.
지금까지 조선시대 모쏠이 별로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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