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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알렌.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아 조선의 이권을 모두 미국에 넘겨버린 로비스트이자 서구 의학을 들여온 의사 겸 선교사

by 사탐과탐 2022.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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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아 조선의 이권을 모두 미국에 넘겨버린 로비스트이자 서구 의학을 들여온 의사 겸 선교사인 알렌은 어떠한 인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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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고종 시절, 미국에서 선교사로 조선으로 왔다가 외교관 및 의사로 활동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인물은 미국과 조선의 외교를 주도하던 인물로 그 과정에서 조선의 여러 이권들을 미국에 몰빵시켜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했던 인물인데요.

 

이 인물은 바로 미국에서 온 선교사이자 의사, 외교관이었던 '호러스 알렌' 이라는 인물입니다.

1858년 4월 미국 오하이오주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알렌은 대학교까지 졸업 후 마이애미 의과대학에서 의사 면허를 취득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1883년 1월 해외 선교활동을 지원한 알렌은 곧 의사 자격증을 딸 예정이었던 덕분에 선교사로 뽑혀 베이징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난징과 상하이를 거친 뒤 조선에 도착한 알렌은 당시 조선에서 활동 중인 서양인들에게 서양 의사가 왔다는 이유로 격한 환영을 받았죠.

 

또한 조선 주재 미국 공사였던 푸트는 당시 종교에 대한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알렌을 미국 공사관의 의사로 임명해 주었죠.

그렇게 선교사이자 의사로 조선에서 활동을 하던 알렌에게 그가 조선에서의 입지를 완벽하게 다지게 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바로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만 것이었습니다.

당시 민비 척족이던 민영익은 얼굴과 목, 팔 등 온몸에 엄청나게 깊은 상처를 입어 피를 줄줄 흘리며 조선해관 총세무사였던 묄렌도르프의 집에 숨어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게 된 알렌은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게 되었죠.

 

알렌은 즉시 민영익을 성심성의껏 치료해 주었고 다음날과 그 다음날에도 그를 찾아와 물심양면 보살펴준 것입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당시 상황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었는데요.

조선에 군사를 이끌고 와 조선 정부에 내정간섭을 심하게 하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결국 일본군과 걷잡을 수 없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으며 조선인들은 일본인 상점이나 주택 등에 불을 지르고 부숴버리는 등 당시 한양은 그야말로 전쟁터 같았죠.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 독일, 미국, 영국 등 조선에 살고 있던 서양인들은 모두 제물포로 도망가 있는 상태였으며 오직 알렌과 그의 가족들만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남아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가 돌봐준 덕인지 다음 해 2월이 되자 민영익은 목숨은 건졌을 뿐만 아니라 많이 회복하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민영익을 치료한 결과, 조선에서의 알렌의 위치는 그 누구보다 확고해졌습니다.

거기다가 일본 공사 곤도 모토스케도 치료해 주어 일본 공사관에서 많은 돈을 받고 의료 봉사활동까지 하게 되었죠.

그런 어느 날 알렌은 한 사람의 초청을 받아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알렌을 초청한 사람은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그렇게 고종과 민비를 만나게 된 알렌은 그들의 전담 의사이자 고종의 정치 고문까지 맡게 되었고 심지어 민비는 민영익의 치료에 대한 대가로 그에게 거액을 건네기도 했으며 민영익 또한 그에게 우정의 표시로 10만 냥을 주기도 했죠.

그렇게 조선 조정과 연이 닿은 알렌은 고종에게 한국 최초의 서구식 병원을 만들자는 건의를 하게 되었고 조선인들에게 서구식 의학을 가르치자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조선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더 크게 미치게 하기 위한 계획이기도 했죠.

그러자 혜민서 소속 의관들과 독일 공사 측에서는 격렬히 반대를 하고 나섰지만 이미 알렌에게 푹 빠져버린 고종과 민비는 그의 계획대로 병원을 설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885년 4월, 광혜원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식 병원이 설립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을 제중원으로 변경하였으며 이곳에서는 진료뿐만 아니라 학교도 만들어 서양식 의학 교육까지 실시했죠.

 

이러한 공로로 인해 고종과 민비의 알렌에 대한 신임은 더 해갔고 그만큼 그의 관직도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러자 알렌은 고종에게 반청외교에 대한 자문을 하면서 자주외교를 위해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1887년이 되자 고종은 알렌의 말을 듣고 미국에 조선 공사관을 설치하기로 마음먹었으며 박정양을 전권대신으로 파견하면서 알렌을 외무 비서관으로 임명하여 박정양을 보좌하게 했습니다.

이에 알렌은 선교사와 의사직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요.

 

이때 그는 미국으로 가는 공사관 일행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았죠.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인데요.

 

'공사관 일행의 몸에서는 똥냄새와 지린내가 풍겼고 선실에서 끊임없이 담배를 피워대니 선실 안은 온갖 악취로 가득했다.

박정양 공사는 바보 천치 같은 인물이었고 공사의 수행비서 강진희는 짓궂은 말을 일삼는 귀찮은 사람이었으며 3등 서기관 이상재는 더러웠다.

번역관이던 이채연은 영어 한마디 할 줄 몰랐고 1등 서기관 이완용과 2등 서기관 이하영은 나았다'

라고 묘사해 놓았을 정도로 조선 관리들에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그가 남긴 일기 곳곳에 조선 공사관 일행들이 짜증 난다는 표현을 자주 기록해 놓기도 했으며 그나마 이용 가치가 있는 박정양 공사에게도 뒤에서는 욕을 하면서 앞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했죠.

 

어쨌든 이런 조선의 행보에 대해 위안스카이가 강력하게 반발하며 조선 정부를 압박하자 결국 박정양은 본국으로 돌아오고 말았고 알렌 역시 외무 비서관 직책을 그만두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고 말았는데요.

 

이후 미국 정부는 오랫동안 조선에 살면서 조선에 대해 잘 알고 조선 왕실로부터 신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조선 조정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던 알렌에게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직을 맡기면서 이때부터 알렌은 미국의 국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외교관으로써 활동하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미국정부는 조선에 대한 야욕이 전혀 없다는 식으로 어필하는 동시에 알렌은 조선 내각을 미국을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로 채워 나가고자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던 박정양을 총리대신으로 임명하라고 건의하는 등 친미적 성향이 짙은 인물들로 조정을 점점 채워나갔습니다.

고종은 이런 미국과 알렌의 힘을 빌려 당시 처해있던 답답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했는데요.

 

알렌은 이러한 고종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점을 적극 이용했고 또한 민비와 이완용, 그리고 조선의 대신들에게 로비를 벌이며 전기, 전차, 철도 등 여러 산업부문의 사업권을 따내 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데 엄청난 역할을 하기도 했죠.

그리고 1895년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금광이던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따냈으며 이를 미국의 제임스 모스에게 모종의 대가를 받고 넘기게 되었죠.

 

사실 알렌은 조선에 온 초기부터 조선 광산의 위치와 매장량 등을 조사했는데요.

사전에 있었던 조사 덕분에 운산금광에 엄청난 양의 금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자신을 신임하던 고종과 민비를 이용해 채굴권을 따낸 것이었죠.

'노다지 (no-touch)’ 라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노다지였던 운산금광에서는 이후로 40여 년간 900만 톤의 광석을 채굴했으며 5600만 달러에 달하는 금을 생산했고 1500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렸을 정도로 엄청난 금광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현재 시세로 환산하면 3조 6천억 원이 넘을 정도의 천문학적인 금액이죠.

당시 돈이 없어 이 나라 저 나라 기웃대며 돈 빌리러 다닐 정도로 돈에 쪼들리던 조선 조정이 도대체 왜 이렇게 노다지였던 금광을 홀라당 미국에게 넘겨버린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데요.

이 일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민비였습니다.

 

민비는 알렌이 10여 년간 조선 조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봉사한 것에 대한 답례로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넘겨주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또한 알렌은 미국인 회사와 조선 관리들, 민간인들과 마찰이 있을 때마다 미국인 권리를 지키고 보호하는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과 자신에게 우호적이며 적극적으로 도와주던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그는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으며 고종을 보호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는데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하는 아관파천을 주선하기도 했죠.

 

하지만 결국 조선을 둘러싼 각 나라들의 경쟁은 일본과 러시아로 압축되었으며 이때 알렌은 미국의 전권 공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이 조선에 빨대를 꽂아 이득을 따내는데 호의적이던 친일파들을 뒤에서 간접적으로 후원하기도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당시 미국은 일본을 도와 러시아가 내려오는 것을 막고 그 보상으로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면서 일본과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것으로 노선을 정해 그렇게 움직였는데요.

게다가 당시 서구 열강들이 가장 탐내던 이권사업인 경인선 철도 부설권도 조선 왕실의 비호 아래 알렌이 따내게 되었고 얼마 안 가 일본에 부설권을 넘기면서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돈을 받기도 했죠.

 

그리고 1898년에는 경부선 철도 부설권을 일본이 따내는데 기여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서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극비리에 맺었는데요.

그렇게 고종이 일부러 알렌을 총애하며 친미를 통해 조선이 극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타개해 보려고 했던 모든 일들은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되어버렸죠.

 

이후 알렌은 더 이상 조선에 빨아먹을게 없어졌는지 친미파 명단을 일본에 넘겨주고 자신의 주머니는 두둑이 챙긴 뒤 1905년 6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귀국 후엔 다시 의사로서의 삶을 살다가 1932년 12월,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선과 한국의 의학에 많은 기여를 하기는 했지만 조선을 도와주는척하면서 조선의 이권을 미국에 모조리 넘겨주는 그런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죠.

알렌의 외교정책은 절대적으로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만 몰려있었고 조선에 우호적인 척할 뿐인 인물이었다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에서 하와이 이민자를 모집한 적도 있는데요.

하와이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 관리인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복종의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배하기가 쉽다.

중국인들에 비해 교육하기 쉬운 족속'이라는 식으로 조선인들을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공사관 일행과 미국으로 갈 때도 자신의 일기에 그들에 대한 좋지 않은 말만 수두룩하게 적어 놓은 걸 보면 조선에 대한 인식도 고종과 민비가 그를 생각하는 것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긴 하네요.

 

서구식 병원인 광혜원을 만든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과 미국의 이익만을 추구한 외교관이자 로비스트 알렌이라는 두 가지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 호러스 알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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